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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살 검도 특기생, 가족의 불행에 흔들리는 미래

[넘버링 무비 333]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 로컬시네마 1 <아무 잘못 없는>

23.12.05 10:50최종업데이트23.12.05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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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아무 잘못 없는> 스틸컷 ⓒ 서울독립영화제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중학교 3학년인 도윤(한기옥 분)은 검도 특기생이다. 곧 다가올 동계 대회를 굳이 나가지 않더라도 체고에 갈 수 있을 정도로 벌써 여러 다른 대회에서 입상도 해왔다. 남은 중학교 생활을 이대로만 잘 마무리하면 꿈꾸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내일의 상황은 급변하고 만다. 비닐하우스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엄마(이지영 분)가 갑자기 쓰러지면서다. 아빠(박일용 분)가 손이 찢어진 동생 지후(전민우 분)를 병원에 데려간 사이 일산화탄소가 누출되면서 혼자 남아 있던 엄마가 의식을 잃게 된 것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사고. 마을 어른들은 이 사고가 동생 때문에 일어났다고 말을 옮긴다.

영화 <아무 잘못 없는>을 통해 박찬우 감독은 가족이라는 범주와 그 안에 위치한 개인의 의무와 선택을 충돌시킨다. 이를 통해 바라보고자 하는 것은 그로부터 파편이 되어 튀어 오르는 잔해다. 부서진 후에 무엇인가 조금씩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는 자신의 시점과 위치, 그리고 감정. 여기에서 개인은 누구나 스스로를 지키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반동을 표출하게 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다시 가족의 영역 안에서 어떤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으로 치환되며 죄책감과 상처, 슬픔을 일으킨다. 가족이라는 이름 앞에서 종종 우리가 아픔을 겪는 이유다. 스스로를 책임지고자 했을 뿐인 선택이 한없이 이기적이고 못된 선택으로 치부될 때. 심지어는 결코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을 때. 영화는 16살 소녀의 아직은 어린, 작고 여린 마음을 통해 그 지점을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다.

02.
"엄마가 저리 된 것도 지우 때문이잖아."

작품에 등장하는 도윤이라는 인물의 양손에는 두 개의 역할이 쥐어져 있다. 하나는 학생이자 검도 유망주로서의 역할(개인)이고, 또 하나는 딸과 누나로서의 역할(가족)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이 두 가지 역할 하나씩을 각각의 내러티브로 삼으며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가족 내에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을 때는 두드러지지 않던 후자의 역할이 엄마의 사고 이후 강요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서다. 7살밖에 되지 않은 동생 지후는 아직 혼자 지낼 수가 없고, 엄마가 쓰러진 상황에서 유일한 보호자일 아빠는 엄마의 병간호를 위해 병원에 매인 사람이 되었다.

문제는 도윤의 입장에서 이 두 가지 역할을 균등하게 혹은 융통성 있게 분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다. 손이 크게 찢어져 매일 소독을 해야 하는 동생을 돌보기 위해서는 오후 훈련도 빠지고 집으로 일찍 돌아와야 하는 상황. 동계 대회를 위한 합숙 훈련은커녕 대회를 나갈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가족의 범주에 떠밀려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순간이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이 문제가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일지 모른다. 하지만 도윤이 아직 16살에 불과하다는 점과 곧 중요한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

그렇지 않아도 서운한 마음에 아빠의 말 한마디는 더 큰 상처를 남긴다. 찢어진 동생 지후의 오른손 상처 소독 담당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신의 입장은 조금도 생각해주지 않고 동생을 챙기는 역할만을 강요해 오는 모습이 괜히 미울 수 있는 순간이다. 게다가 마을 어른들은 엄마를 위독하게 만든 이 사고가 지후의 장난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나. 아빠는 그런 동생을 감싸고 돌기만 한다.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아무 잘못 없는> 스틸컷 ⓒ 서울독립영화제


03.
하나의 역할, 가족 내에서의 역할이 덩치를 키우며 압박을 가해올 때 나머지 다른 하나의 역할이라도 아무런 문제 없이 있어주면 그나마 나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함께 운동을 하는 동료이자 친구들은 도윤의 다른 사정도 알지 못한 채 시기하고 질투하기 시작한다. 특히 그동안 도윤의 실력에 밀려 번번이 대회 수상에 실패했던 연주는 응어리진 마음이 크다. 굳이 나갈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자리를 스스로 지켜내기 위해 도윤이 동계 대회 참가를 결정하고 난 뒤에는 더욱 그렇다. 아무도 응원하지 않을 것이라며, 부상이나 당했으면 좋겠다는 나쁜 말까지 쏟아낸다.

결국 좋은 학교에 진학해 훌륭한 선수가 되겠다는 목표와 노력 하나가 가족 안에서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치부되고 또래 내에서는 욕심으로 절하되고 만 것이다. 그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버텨온 날들이 그런 모양이 되었을 때 열여섯 소녀의 마음에는 어떤 감정이 남게 될까? 동생이 혼자 지내기에는 아직 어리다는 걸 너무 잘 알면서도 합숙을 떠나고, 아직 깨어나지 못한 엄마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는 아빠에게 대회에 응원하러 와달라고 투정을 부리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아직은 어린 마음, 나의 자리가 다른 그림자 아래에 양보되는 것이 어려울 때다. 두렵고 무섭기도 하고.

04.
두 역할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동안에도 잔혹한 현실은 멈추지 않고 그녀를 덮쳐온다. 호기롭게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치긴 했지만 꿰맨 상처를 혼자 관리하기에는 아직 어린 동생의 손은 괴사가 진행되기 시작하고, 아직 일어나지 못한 엄마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지기 시작한다. 이제야 지금 자신이 어떤 역할을 선택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 것 같지만 너무 늦어버린 뒤다. 동생의 손에는 지워지지 않을 흉터가 남고, 엄마를 떠나보내야 할 순간도 조금씩 다가온다.

이제 생각이 나는 장면이 하나 있다. 서로 마주하고 있는 다른 자리의 두 화면이다. 사고 이후 처음으로 병원에 엄마를 만나러 온 도윤이 자신의 손을 붙잡지 못하는 엄마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모습이 하나. 잠이 든 동생의 손을 소독해 주다가 잠결에 제 손을 쥐어오는 동생의 손을 슬쩍 놓아버리는 도윤의 또 다른 모습이 또 하나다. 이 두 장면 사이에 갇힌 채로 서 있던 그녀는 영화의 종반에 이르러 자신 때문에 엄마가 아픈 것이냐고 묻는 지우의 손을 꼭 붙들며 비로소 걸어 나온다. '아무 잘못 없는', 영화는 모두를 향해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용서와 응원의 말을 건넨다.

05.
영화 속 도윤의 이야기에 '성장'이라는 단어는 붙이고 싶지 않다. 그녀는 분명히 한 뼘 더 자라 조금 더 어른에 가까워졌을테지만 이걸 성장이라고 말하기에는 가혹한 면이 없지 않다. 16살. 아직은 하지 않아도 좋을, 너무 빠르고 아픈 성장이니까.
영화 서울독립영화제 아무잘못없는 독립영화 박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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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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