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남에서 한나라당(옛 민자당)의 20년 독주 계기가 되었던 3당 합당
이윤기
특히 정 전 사령관은 2021년 3월 5.18진상조사위에 제출한 추가 진정서에서 민정당 창당 자금 모금, 언론통폐합법과 관련된 '쓰리허와의 갈등관계'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추가 진정서에 따르면, 1980년 2월 초 정 전 사령관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부터 "참모들이 정당 창당을 하려는 모양인데 어디서 자금을 구할 수 있는지 알아봐 달라"라고 요청받았다. 이후 그로부터 지시를 받은 김충립 특전사 보안반장은 '박보희(통일교) 100억 원, 조내벽(라이프주택) 50억 원, 박성철(신원통상) 30억 원' 등 총 180억 원의 헌급 약속을 얻어냈다.
김충립 반장은 정 전 사령관에게 이러한 '180억 원 헌금 약속' 메모를 전달하면서 허화평 보안사령관 비서실장(대령)에게는 절대 전달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그가 이것을 허화평 실장에게 전달하면서 '문제'가 일어났다. 허화평 실장이 통일교의 2인자인 박보희 한국문화재단 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 아침 10시 이전에 한국에서 떠나라, 그 시간 이후에 체포하겠다, 죄목은 정치자금법 위반이고, 조사에 따라 반국가음모죄가 성립될 수도 있다"라고 통보했고, 결국 박보희 총재가 미국으로 강제출국을 당한 것이다.
정 전 사령관은 "허화평 대령은 나에게 창당한다는 정보가 알려진 것을 두려워하고 감추고 싶었던 것 같다"라며 "결국 정치자금을 낼 용의가 있던 한 사람은 강제출국을 당했고, 이 일을 주선했던 나는 허화평 대령에 의해 수모를 당했지만, 1980년 2월 정당 창당을 시도했다는 사실은 명확한 일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 이후로 창당 자금건은 잠잠해졌고 실제 창당은 1980년 9월에 시작되었다"라고 덧붙였다.
또한 정 전 사령관은 추가 진정서에서 "(1980년) 4월 중순 허문도 중정 비서실장이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언론통폐합법을 브리핑하기에 '잘못된 것 같다, 김충립 소령과 새로운 법을 만들어보라'고 한 사실이 있으나 허삼수 대령으로부터 '쓸데없는 일에 관여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 같은 비난을 듣게 되어 매우 불쾌했다"라고 전했다
물론 정 전 사령관이 '쓰리허'와 갈등관계에 있었다는 것은 대체로 인정되는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 참여나 권력욕이 없었다"라는 주장은 제3야전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 내무부·국방부 장관, 13대 국회의원 등 5공과 6공에서 승승장구한 그의 행적을 헤아리면 '궤변'이라고 할 수밖에 있다.
"5공 집권시나리오, 정국수습방안에 참여한 일 없다"

▲ 1980년 초여름 전두환. '쓰리스타'로 진급해 보안사와 정보부를 장악했다.
김충식 제공
이어 정호용 전 사령관은 "상기 네 가지 이유로 입장이 난처해진 본인은 5월 광주사건이 발생하자 허씨들로부터 배척당하는 처지가 되어 작전임무를 부여받지 못하고 사령부에 대기하게 되었던 바 김충립 보안반장이 사령부 장석규 대전복과장에게 부탁하여 광주에 출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 전 사령관은 "따라서 본인은 5공 집권시나리오나 정국수습방안 연구에 참여한 일이 없으며, 보안반장 김충립 소령으로부터 돌아가는 분위기를 청취하고 있었으나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라며 "전두환 장군이 본인에게 집권시나리오나 정국수습방안에 대하여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은 세 허씨들이 본인과 불편한 내색을 보이는 등 영향이 컸던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주장했다.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열고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확정했고, 같은 날 저녁 9시 40분 임시국무회의에서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 선포안'이 찬반토론없이 단 8분 만에 가결됐다. 이보다 몇 달 앞서 보안사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비상계엄 확대, 국회 해산, 비상기구(국보위)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해둔 상태였다. '시국수습방안'이라고 하지만 '신군부집권시나리오'였다. 이후 국보위 출범, 민정당 창당, 전두환 대통령 선출 등이 이어졌다.
정 전 사령관은 "본인은 1980년 5월 31일 국보위 상임위원 임명장을 받으러 오라 해서 참석한 자리에서 오래전부터 집권시나리오가 준비되고 있었다는 감을 잡았을 정도였다"라며 "그런데 (5.18) 주동자로 몰린 것은 현지 지휘관(소준열 전투병과교육사령관 등)이나 작전참모(장세동) 같은 자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본인에게 전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정 전 사령관은 추가 진정서에서 "본인은 광주사건이 매듭지어지고 5월 31일 국보위가 설치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라며 "국보위란 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5월 31일 당일 임명장을 받으러 가서 '국보위가 무엇하는 것이냐'고 주위사람들에게 물어본 사실이 있다"라고 말했다.
"노태우 '3당합당'을 위해 국회의원직 사퇴했다"

▲ 1989년 3월 21일 서명한 김윤환 민정당 원내총무와 김원기 평화민주당 원내총무의 합의각서.
오마이뉴스
특히 정 전 사령관은 자신을 '5.18 책임자'로 몰고간 인사로 노태우 전 대통령을 지목했다. 그는 "(내가)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5.18 책임자가 된 것은 노태우 대통령과 김윤환 의원(민정당 원내총무)이 3당 통합을 위해 꾸민 정치적 모함에 의해서였다"라며 "이때부터 5.18의 원흉이 되었고 1996년 재판에서 내란목적 살인죄를 저지른 것으로 처벌받는 것이 억울하다"라고 말했다.
이어 정 전 사령관은 "여소야대 정국이 되자 노태우 대통령이 3당 합당을 추진하면서 야당 총재들에게 '군사문화를 청산하겠다', 즉 '다음 대통령에 군 출신인 정호용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겠다'고 약속한 후 김윤환 총무가 위 내용을 적시한 서류를 작성하여 야당 지도자들에게 보여주었고, 광주사건 청문회을 통하여 정호용 국회의원을 영원히 정계에서 제거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라고 주장했다.
위의 언급한 서류는 1989년 3월 김윤환 민정당 원내총무와 김원기 평화민주당 원내총무 간에 이루어진 합의각서를 가리킨다. A4용지 6장 분량의 이 합의각서에는 5공 청산과 5.18광주민주화운동 문제 처리, 1980년 언론통폐합과 해직 관계자 처리, 전직 대통령 증언 문제 처리, 민주화문제, 지방자치제 실시, 공무원 노조 결성 협의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특히 5공 청산과 5.18문제 처리 항목에는 5.18특별법 제정, 정호용 국회의원직 사퇴, 이희성 공개사과문 발표, 전두환의 대국민사과, 이원조 공직 사퇴 등이 포함돼 있다.
정 전 사령관은 "이런 각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노태우 대통령을 만나 이럴 수 있느냐?고 항의했더니 노 대통령은 '당신이 무슨 죄가 있느냐?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라며 "김윤환 총무에게 항의했더니 자신은 그런 서류에 서명한 일이 없다고 했다"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런데 청문회가 시작되자 여당 의원들이 야당 의원들보다 더 심하게 공격해왔고 정웅 의원이 거들어서 본인이 5.18의 책임자가 되었고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게 되었다"라고 설명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당신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 주면 3당 통합이 된다, 앞으로 3년간 국정운영이 원활히 되도록 희생해 달라'고 부탁해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5.18 책임자가 되었으나 '다른 방법으로 보상하겠다'는 노태우 대통령의 약속은 헛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정 전 사령관은 1988년 실시된 제13대 총선에서 대구시 서구갑에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하지만 5공 비리와 5.18 청문회에서 국회의원 사퇴 요구가 거세지자 1990년 1월 사퇴했다. 그리고 며칠 뒤인 1월 22일 노태우 대통령은 '3당 합당'(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을 전격 발표했다.
"혼자라도 망월동 묘지 참배하고 명복 빌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