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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이 낳은 또다른 비극, 그들은 왜 민항기를 격추시켰나

[TV 리뷰]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24.01.19 17:08최종업데이트24.01.19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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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은 대한민국의 민간항공기가 타국의 영공에서 군의 오인 격추로 인하여 불시착하며 사상자가 발생한 충격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이는 불과 몇 년뒤 찾아올 더 큰 참사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냉전이라는 이념적 대립이 불러온 갈등이 무고한 민간인들을 어떻게 희생양으로 만들 수 있을지 극명하게 보여준 가슴아픈 비극이기도 했다.
 
18일 방송된 SBS 실화 스토리텔링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에서는 '격추의 시대-1978 어느 생존자의 기억' 편을 통해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의 진실을 조명했다.
 
1978년 4월 20일, KAL-902편 비행기는 프랑스 파리에서 출발하여 중간 경유지인 미국 알래스카 앵커리지 국제공항을 거쳐 대한민국 김포 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당시 승객은 97명, 승무원은 12명으로 총 109명이 탑승해 있었다.
 
당시는 냉전시대였다. 현재는 파리에서 서울까지 직항노선이지만 1978년에는 항로가 달랐다. 자유진영의 대한민국은 공산주의 진영의 소비에트 연방(소련, 현재의 러시아)과는 적대관계였다. 민간항공기가 소련의 영공이나 영토를 지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항로를 멀리 돌아서 우회해야만 했다.

그런데 앵커리지에 도착해야 할 비행기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린란드 상공에서의 마지막 교신을 끝으로 모든 소식이 끊겼다. 109명이 탄 비행기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902편은 결국 공식적인 '실종'으로 발표됐고, 이 소식은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한국에도 '파리발 서울행 KAL기 902편 행방불명'이라는 뉴스가 보도됐다. 그중 누구보다 충격을 받은 것은 바로 902편 탑승자의 가족들이었다.
 
과연 그날 902편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당시 902편 비행기를 운행하던 김창규 기장은 창밖에 다른 비행물체가 나란히 날고 있다는 것을 포착했다. 민간항공기와는 확연히 다른 비행기 꼬리에는 '붉은 별' 마크가 달려있었다. 승객들 중에도 이를 목격하고 신기해하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사전이 약속된 항로에 따라 비행기 간격과 고도 설정을 다르게 운행하는 항공계 관행상, 시야에 다른 비행기를 목격할 확률은 희박했다. 이는 곧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902편 조종실에서는 비상 주파수로 긴급히 교신을 시도했지만 상대는 묵묵부답이었다. 김 기장은 충돌을 우려하여 비행기 고도를 낮추려고 했다. 그 순간 갑자기 엄청난 굉음과 함께 기체가 중심을 잃었다. 당시 탑승객들은 천둥번개가 치는 것 같은 번쩍하는 소리가 났다고 증언했다.
 
기체가 한쪽으로 기울면서 기내에서는 물건들이 쏟아지고 통로에 서 있던 승객들이 넘어지며 아수라장이 됐다. 안내 방송을 할 틈도 없이 비행기는 고꾸라지듯이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 조종실의 김창규 기장은 비행기의 왼쪽 날개가 파손되고 엔진도 하나 꺼진 것을 확인했다. 기내 압력이 비정상적으로 떨어지며 김 기장은 필사적으로 비행기를 하강시켰다. 더이상의 비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김 기장은 결국 비상착륙을 시도하려고 했다.
 
김 기장은 착륙할 곳을 계속 살폈지만 불확실한 시야와 불안정한 기체상태속에 마땅한 장소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곡예에 가까운 비행은 무려 1시간 가까이 계속되었고, 그동안 탑승객들은 모두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서서히 연료가 바닥나가던 902편은 문득 거대하게 펼쳐진 한 호수의 표면이 얼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착륙을 결정한다. 얼음의 두께가 어느 정도인지, 902편 비행기의 무게를 견딜수 있는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김 기장은 호수에 비행기를 착륙시키며 간절한 바람과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쏟아서 브레이크를 당겼다.
 
다행히 착륙은 기적적으로 성공했다. 조종실에서는 서로를 얼싸안았고, 기내에는 환호와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그야말로 죽음의 문턱에서 구사일생한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탑승자들의 시련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추락 과정에서 비행기 파편으로 안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다. 떨어진 왼쪽 날개 인근 좌석들에 부상자가 집중되며 치료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불시착한 비행기는 연료가 바닥나고 엔진도 모두 꺼진 상태였다. 추락할 때 기체에 구멍이 뜷리며 탑승객들에게는 엄청난 추위가 몰아쳤다. 눈으로 뒤덮인 광활한 호수 일대는 어디가 어디인지 위치도 파악할 수 없고 도움을 요청할 곳도 없는 막막한 상황이었다. 탑승자들은 비행기 이상으로 자신들이 미국 알래스카 인근에 불시착한 것으로 추정했고 일단 기내에 머물며 도움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잠시후 탑승객들 앞에서 일련의 무리가 나타난다. 놀랍게도 그들은 구조대가 아니라 무장한 군인들이었다.

탑승자들은 그제서야 자신들이 불시착한 곳이 소련 영토이며 눈앞의 군인들이 소련군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충격에 빠졌다. 냉전시대에 소련은 북한과 함께 적성국으로 분류된 금기의 땅이자 한국과는 비수교국이었다.
 
소련군은 총구를 겨누며 기내에 진입했다. 승무원들은 필사적으로 이 비행기가 민항기이며 부상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소련군은 부상자의 상태를 확인하고 어린 아이와 부상자가 있는 가족부터 차례를 헬기를 통해 이송했다.
 
가장 마지막으로 나온 것은 승무원들이었다. 그제서야 기체의 상태를 두눈으로 확인하게 된 승무원들은 비행기가 추락한 이유가 기체 결함이나 기상악화 때문이 아니라 '격추'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탑승자들이 추락직전 목격한 비행물체의 정체는 소련군의 전투기였고, 민항기에 미사일을 쏘아서 격추시킨 것이었다.
 
비행기가 불시착한 곳은 소련 영토인 코르피야르비 호수였다. 902편 탑승자들은 소련에 허락 없이 들어온 '침입자' 취급을 받았다. 비행기는 무슨 이유에선지, 예정된 항로를 벗어나 소련 영공으로 넘어온 상태였다, 냉전시대라 안보에 예민했던 소련은 자신들 영공에 들어온 낯선 비행기를 보고 '미군 정찰기의 침입'으로 간주했다고 한다.

소련군은 902편 탑승자 전원을 한 마을의 수용소로 이송했다. 여권과 카메라는 모두 압수 당했다.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탑승자들은 이러다가 북한으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감에 시달려야했다.

이어 소련군은 탑승자들을 하나씩 불러서 심문했다. 소련군은 KAL 902편이 민항기로 위장한 미국 정찰기가 아닌지 의심했다. 승무원들의 적극적인 해명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은 스파이가 숨어 있을 수 있다며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특히 김창규 기장은 육군 항공대 출신이라는 경력을 문제 삼아 집중적으로 추궁을 당했다. 당시 세계 어느 나라나 민항기 조종사 대부분이 군 경력자 출신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소련군의 의심에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KAL 902편의 항로를 살펴볼 때, 애초에 소련 영공으로 넘어온 과정이 석연치 않았다. KAL 902편의 마지막 교신 지점은 그린란드 상공이었고 불시착한 소련의 호수까지는 유턴에 가까울 정도로 비행기를 꺾어야 했다. 사실상 일부러 찾아왔다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1978년 당시만 해도 GPS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고, 비행기 또한 인간 내비게이션이라고 할 수 있는 '항법사'가 나침반을 기준으로 직접 항로 각도를 계산하여 길을 안내하던 시대였다. 문제는 극지방으로 갈수록 나침반 오차가 심하고, 장치가 고장나거나 오차를 잘 잡아내지 못하면 큰 오류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항로가 조금만 꺾여도 순식간에 엄청난 거리를 이동하게 되는 비행기의 특성상 벌어진 실수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편 탑승자들은 불안한 수용소 구금기간 동안에도 차츰 켐 마을 주민들과 교류하며 사람간의 정을 쌓았다. 1917년 공산주의 혁명 이후 외부와 문을 닫았던 소련의 특성상, 켐 마을에 외국인이 온 건 무려 50년 만이었다고 한다. 신기해하던 주민들은 음식도 나눠주고 부상자들을 적극 간호하여 호의를 베풀었다고 한다. 소련이라는 존재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탑승자들은, 평범한 소련 주민들의 인정 많은 모습을 보며 '다 같은 보통 사람들'이라는 것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약 이틀의 시간이 흘러, 마침내 민간인 신분이 밝혀진 탑승자들의 송환이 결정됐다. 탑승자들은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소식에 진심으로 안도했다. 그동안 정든 주민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탑승자들은 마을을 떠났다. 그리고 소련에서 핀란드를 거쳐 1978년 4월 24일 월요일 오후 6시 40분. 탑승자들은 악몽 같던 시간들을 무사히 극복하고 다시 한국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 탑승객들은 모두 이제 살았다고 만세를 외치며 환호했다고 한다.
 
109명의 탑승자 중 생존자는 107명, 출장 갔다 돌아오던 한국인 남성 그리고 가족과 함께 타고 있던 일본인 남성. 두 사람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소련군 전투기가 발상한 두 대의 미사일은 첫 번째 미사일이 빗나가고, 두번째 미사일도 왼쪽 날개 근처에서 폭파되며 그나마 대량 참사는 피한 게 다행이었다. 절체절명의 비상상황 속에서 불시착에 성공하는 천운도 따랐다.
 
민간인이 탑승한 항공기를 격추시킨 소련은 전 세계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KAL 902편은 누가 봐도 민항기로 비행기 외부에는 태극마크까지 달고 있었다. 과연 소련군이 민항기라는 것을 정말로 몰랐는지, 아니면 알고도 쏜 것인지는 풀리지 않은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탑승자들은 대부분 무사히 송환됐지만 조종사인 김창규 기장과 항법사 만큼은 소련 영공 침범에 대한 의혹을 이유로 여전히 억류되어 있던 상태였다. 이들은 소련에서 내내 강도 높은 심문을 받았지만 당연히 이들이 스파이라는 근거는 발견되지않았다. 미국과 한국 정부가 모두 나서서 강력하게 송환을 요구한 덕분에 약 10여일 만에 이들도 풀려나 다시 고국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김 기장은 송환 인터뷰에서 "국민의 배려로 인하여 이렇게 조국의 땅을 다시 밟게 된 데 대해 감사를 드린다"고 화답했다.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려낸 김창규 기장을 '영웅'으로 칭송했지만, 정작 김 기장은 희생자를 낸 것에 대한 죄책감을 언급하며 이후로도 많이 힘들어 했다고 한다.
 
한국 정부는 호수에 불시착한 KAL 902편의 기체 반환을 요구했다. 하지만 소련은 이를 거부했고 사고 원인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증거인 블랙박스와 음성기록장치도 돌려주지 않았다. 결국 사고의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고, 소련은 민항기 격추에 대하여 끝내 그 어떤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풀리지 않은 진실은 불과 5년 뒤에 더 큰 비극을 초래하는 씨앗이 되고 만다. 1983년, 뉴욕을 출발한 대한항공 007편이 또다시 항로를 이탈하여 소련 영공에 잘못 들어서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번에는 902편 사고 이후, 자동항법장치가 설치된 상태였지만 사고 당시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수동모드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소련은 또다시 전투기를 출격시켜 민항기를 격추시켰다. 이번에는 미사일이 빗맞는 천운도 일어나지 않았다. 비행기에 타고 있던 무고한 민간인 269명이 전원 사망했다. 이는 지금까지, 한국 국적기가 당한 최악의 비행기 참사로 기록되어 있다. 사망자들의 유해조차 단 한 구도 찾지 못했다.
 
5년 만에 되풀이된 비극은 거센 후폭풍을 불러왔다. 국내에서는 전국적으로 궐기대회가 일어나고 진상 규명과 소련의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유가족뿐 아니라 국민 전체가 분노하고 절망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소련은 이번에도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다. 902편도, 007편도, 민항기로 위장한 정찰기라고 판단했기에 격추는 정당한 행위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007편을 격추시킨 소련 조종사가 "민항기인 걸 알고도 격추했다"고 증언하는 인터뷰가 훗날 밝혀졌다. 소련이 1991년 붕괴될 때까지 격추한 민항기는 총 9대에 이르렀고 그 중 2대가 바로 대한민국의 비행기였다.
 
항공계에는 '모든 항공 규정은 피로 쓰여졌다'는 격언이 있다. 1983년 007기 격추 사건 이후에야, 영공을 침범하였다 하더라도 민간 항공기를 격추하지 못하도록 법안이 명시됐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미 국방부가 군사목적으로 개발한 GPS가 민간에게 모두 공개되며 항로 시스템이 치밀하게 개선되는 변화도 가져왔다. 그만큼 수많은 시행착오와 수많은 희생을 대가로 치르고 나서야 뒤늦게 대책이 마련되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두 번의 민항기 격추라는 비극은 모두 모두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남긴 갈등에 죄 없는 민간인들만 희생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던 83년 격추 사건에 비하여 902편 사고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만일 첫 사고가 있었던 1978년에 명명백백히 진실을 규명하고 문제를 짚어냈다면,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꼬꼬무 902편격추사건 냉전 소련 항공기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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