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22 13:53최종 업데이트 24.01.22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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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유가족 등이 지난 12월 28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미쓰비시중공업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상고심 선고가 마친 후 기뻐하고 있다. 이날 대법원 3부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미쓰비시중공업과 히타치조선을 상대로 각각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의 선고기일을 열고 원고 일부 승소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 연합뉴스

 
한미일 3국 정상의 잦은 회동은 한일 역사문제가 퇴행한다는 인상을 조성하는 측면이 있다. 이들이 한일관계의 무조건적 봉합을 추구하고 있기에, 이들의 강고한 연대는 역사문제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중에도 역전의 계기가 될 만한 현상들이 최근 들어 연달아 나타나고 있다. 작년 11월 23일에는 서울고등법원이 이용수 할머니와 김복동 할머니 유족을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 16명의 손을 들어줬다. 12월 21일에는 대법원이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에 대한 원심의 강제징용 손해배상판결을 확정했다. 같은 달 28일에는 대법원이 미쓰비시중공업과 히타치조센에 대해 강제징용 손해배상을 선고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측의 핵심 논리 하나가 타격을 입었다. 11월 23일 서울고법은 '국가는 타국 법정에 서지 않는다'는 일본 측 주장을 무시하고 손해배상을 선고했다. 국가면제론 혹은 주권면제론으로 불리는 이 논리는 이 사건에서 일본에 면죄부를 주기보다는 도리어 족쇄로 작용했다. 이는 일본 정부의 상고 제기를 곤란하게 만들어 12월 9일 0시에 피해자들의 승소가 확정되는 원인이 됐다.

강제징용 소송들에서 충분히 증명됐듯, 한국 법원의 재판은 일본 측에 상당한 타격이 된다. 피해자가 일본 법원에서 승소하는 편이 의의가 훨씬 클 수도 있지만, 피고가 판결에 불복할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판결 이행을 거부하는 일본 측을 상대로 법원 강제집행절차를 진행할 때는 한국이 일본보다 더 유리할 수 있다. 일본 법원이 식민지배문제를 놓고 일본 측 재산을 강제집행하는 것은 법적으로는 가능할지라도 현실적으로는 녹록지 않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일본 재산에 대한 강제집행절차가 얼마든지 여론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 그래서 피해자들이 일본 재산으로부터 배상을 받아 그 한이 조금이라도 풀어지는 한편, 뒤늦게나마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에 무릎을 꿇는 상징적 장면이 일어날 수 있다. 한국에서 진행되는 재판은 그런 가능성 때문에 일본에 부담이 된다.

그런 한국 땅에서 강제징용 문제에 이어 위안부 문제로도 피해자들이 거듭거듭 승리하고 있다. 윤석열 정권이 사법부에 압력을 가하는 속에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본 재산이 배상금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피해자들에게 불리한 형국이 조성돼 있지만, 역전의 계기가 될 만한 현상들이 하나둘 쌓여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때 램지어가 있었더라면'?
     
상황이 이런데도 한일 극우세력은 발상의 전환을 꾀하지 못하고 기존 것에 계속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국제적으로 이미 충분히 망신을 당했다고 할 수 있는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교수에게 변함없는 기대감을 표시하고 있다.

'위안부는 매춘부'라는 취지의 논문으로 파문을 일으킨 램지어 교수의 책이 지난 3일 한국에서 나왔다. 그간에 발표된 논문 다섯 편을 수록한 <하버드대학 교수가 들려주는 위안부 문제의 진실>이라는 책이다. 극우로 분류되는 류석춘·이우연 두 학자가 함께 번역했다.

이 책은 논문 5편을 토대로 '일본제국의 매춘 연계(年季)계약: 상업적 매춘 시장에서의 신뢰할 만한 약속', '위안부들 그리고 학자들', '태평양전쟁에서의 매춘 계약', '태평양전쟁에서의 매춘 계약: 비판에 대한 반론', '위안부 문제: 북한과의 커넥션'이라는 5개 장으로 구성돼 있다.

지난달 13일에는 비슷한 책이 일본에서 발행됐다. <위안부 성노예설을 램지어 교수가 완전 논파>(慰安婦性奴隷説を ラムザイヤー教授が完全論破)라는 꽤 자신만만한 제목이 달린 램지어의 책이다. 일본의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역사수정주의자인 후지오카 노부가츠 전 도쿄대 교수, '위안부의 진실 국민운동' 대표인 야마모토 유미코 등이 함께 번역했다.

이 책은 4개의 논문인 '전전(戰前) 일본의 연계(年季) 고용계약에 의한 매춘제도: 성 산업에서 신뢰할 만한 약속', '위안부들과 교수들', '태평양전쟁에서의 성매매 계약', '태평양전쟁에서의 성매매 계약: 비판자들에 대한 회답'으로 구성돼 있다. 한국판과 다른 점은 북한과의 커넥션을 다룬 제5장이 없다는 것이다.

램지어 교수는 극우파인 아리마 데츠오 와세다대학 교수와 함께 2022년 8월 8일 '위안부: 북한 커넥션(Comfort Women: The North Korean Connections)'이란 공동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의 요지는 "북한과 긴밀히 연계된 명백히 부패한 조직이 위안부 운동을 통제해왔다"는 문장에 함축돼 있다. 이 논문이 이번 일본어판에서 빠졌다.

<산케이신문> 인터넷판인 <산케이뉴스>는 일본어판을 띄우기 위한 보도들을 내보내고 있다. 지난 19일에는 후쿠이 요타쿠 아오야마가쿠인대학 교수의 입을 빌려 '위안부=성노예'설을 따르는 구미권 학계에서 램지어가 홀로 분투하고 있음을 소개하는 '거짓을 계속 믿는 구미···램지어 씨의 고발'이란 기사를 내놓았다.
 

지난 19일 <산케이뉴스> 기사 '거짓을 계속 믿는 구미···램지어 씨의 고발' ⓒ 산케이뉴스

  
뒤이은 21일에는 이 책의 의의를 한껏 부풀리는 객원 워싱턴 특파원의 서평을 내보냈다. 제목이 '<위안부 성노예설을 램지어 교수가 완전 논파> 비평'인 이 기사는 일본의 오욕을 씻어주는 "제1급 자료"라면서 이 책이 위안부 문제에 공헌한 측면들을 열거했다.

이 기사는 위안부는 고액 임금을 받는 매춘부였으며 이들에 대한 강제연행은 없었다는 점이 이 책에 의해 입증됐다며 "일본이나 아시아의 빈곤이 불행한 매춘을 낳은 것에 대한 동정"이 책에서 나타났다고 소개한다. 일본의 전쟁범죄가 아닌, 빈곤 계층의 문제가 위안부 문제의 본질이라는 점이 램지어에 의해 분명하게 됐다는 것이다.

<산케이뉴스> 서평은 위안부 결의가 미 하원에서 통과된 2007년 7월 30일이 "일본 국가나 국민의 오욕의 날"이었다고 평한다.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20만 강제연행이 이 결의에 의해 인정된 것이 일본의 수치였다고 애석해 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때 램지어가 있었더라면'이란 말이다.

"그 시점에서 이 책이 소개하는 램지어 교수의 연구 논문이 알려졌다면 그러한 오욕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 측이 이런 종류의 자료를 사용해 조기 단계에 반론을 했다면 일본 전체의 오욕도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완전 논파'된 램지어, 한일 극우의 현주소

지금 식민지배 문제에서 일본이 유리해 보이는 것은 미국의 압력하에 윤 정권이 일본을 편들기 때문이다. 램지어의 주장이 이런 결과를 만든 것은 당연히 아니다. 램지어가 점점 희화화되는 것은 그의 황당한 주장들이 일본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음을 방증한다.

램지어는 구미권 학자들로부터 집중 비판을 받고도 제대로 된 반론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는 서구 학자들에게 "완전히 논파"됐다. 그는 일본을 불리하게 만들면 만들었지 결코 유리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한일 극우세력은 램지어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를 띄우고 있다. 이는 식민지배문제에 대한 미국의 역할을 잘못 평가하는 것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주된 전쟁터'를 의미하는 미키 데자키 감독의 2019년 다큐 영화 <주전장>에서도 묘사됐듯이, 일본 극우는 위안부 문제의 승부가 미국 무대에서 판가름 난다고 믿고 있다. 2007년 위안부 결의가 미 하원에서 나온 것이 그런 믿음을 조성했다고 볼 수 있다.

미 하원 결의가 위안부 문제의 진전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 문제를 추동하는 힘이 미국에서 나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를 이끌어가는 근원적인 힘은 한국인 피해자와 한국 운동단체들 그리고 이들을 지지하는 한국 여론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 이 에너지가 기반이 되어 이 문제는 세계적 이슈로 발달했다.

오바마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영향을 주고 바이든 행정부가 2023년 강제징용 제3자 변제안에 영향을 준 데서 나타나듯이, 미 행정부가 식민지배 문제 해결을 지연시킬 힘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슈를 끊임없이 산출하는 곳은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들을 움직여 여론을 바꾸고자 한다면 미국보다는 한국에 더욱더 신경을 써야 한다. 한일 극우가 한국에서 상당 부분 희화화된 램지어를 계속 내세우는 것은 그들 자신의 홍보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일 극우가 램지어를 앞세운 지 이미 3년이나 됐다. 그 사이에 램지어는 엉터리 학자의 대명사 중 하나로 각인됐고, 일본의 무기 중 하나인 국가면제론은 한국에서 힘을 잃었다. 이 정도면 램지어를 앞세운 선전전은 실패했다고 봐도 무방한데도, 이미 욕을 먹을 대로 먹은 램지어의 기존 논문들을 엮어 아예 책으로 내놓았다. '완전 논파'된 램지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한일 극우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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