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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금횡령-불륜녀 취급... 이렇게 기구한 운명이라니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세기말의 사랑>

24.01.25 14:09최종업데이트24.01.25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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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져보면 현대 자본주의 체제는 기껏해야 이삼백년 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도 그 전에는 공상의 영역에 불과했던 게 허다한 셈이다. 요즘 유행하는 시간여행 퓨전 사극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장면, 즉 미래에서 온 주인공이 과거의 인물들에게 나중에는 이러이러한 세상이 온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고 헛소리 취급하는 건 그 시대 인물들에겐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판단에 기반을 둔 태도다. 뜬금없는 소리 같다면 불과 한 세대 전 기록영상을 살펴보자. 지금 우리로선 상상하기 힘든 낯설고 생경한 풍경이 가득 펼쳐진다.
 
지금의 우리는 휴대전화와 분리불안을 느낄 지경이지만 지난 세기만 해도 이를 소유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전화와 문자 정도가 가능했던 시절이다. 이제는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를 수기로 작성하는 게 꼰대 취급받지만 그 당시엔 한자성어 구사하는 게 미덕으로 받아들여지곤 했었다. 그만큼 현대사회에서 시간에 따른 격차는 가팔라졌다. 분명 변하는 게 더 많다.

하지만 그렇게 세태가 급속하게 변할수록 지쳐가는 이들은 뭔가 변하지 않는 건 없을까, 과거의 익숙하고 친근하던 것들이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하곤 한다. 복고 - Retro 열풍 같은 유행의 반복은 그런 정서에 기인한다. 어떤 유행은 너무 얄팍하고 조잡해서 금방 시들곤 하지만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와 접속한 것들은 꾸준하게 소환되곤 한다. <69세>를 선보였던 임선애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세기말의 사랑>은 후자로 자리매김하려는 의지를 선보이는 영화다.

이렇게나 기구하게 출발하는 새천년이라니
 

▲ "세기말의 사랑"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엔케이컨텐츠

 
때는 1999년 연말, 두 번째 밀레니엄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다. 사람들은 변화에 들뜨기도 하지만 당시 세계를 뒤숭숭하게 만들었던 'Y2K' 증후군 때문에 뜻 모를 공포에 휩싸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일상은 유지되어야 한다. 웹캠을 주력상품으로 제조하는 중소기업 '정직테크'에서 경리과장으로 일하는 '영미'는 자기 맡은 일에선 실력자이지만 회사 직원들에겐 놀림감 취급을 당한다. 회사 내에서 영미에 대한 주변의 취급은 '경리'-'과장'이라는 그의 정체성 가운데 명백하게 전자로만 기운다. 과장 쯤 달았으면 자신에 대한 주변의 하대에 단호하게 성질머리 드러내거나 따끔하게 지적도 할법한데 영미는 늘 모른 척 자기 일만 묵묵히 수행할 뿐이다. 회사에서 영미에게 '과장' 대접해주는 건 입사 5개월 신입 배달기사 '도영'이 유일하다.
 
수십 명 일하는 회사 내에서 섬처럼 외톨이 신세였던 영미는 그런 도영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가 일하는 비좁은 사무실 창가에서 도영이 보이면 김이 서린 창문을 하트 모양으로 슥슥 문질러 만화경처럼 시선을 고정시키곤 한다. 그 시선의 끝에는 물론 찰나지만 도영이 있다. 점심시간 구내식당에서도 홀로 밥을 먹던 영미의 맞은편에 도영이 다가온다. 그에게 말 한마디 붙여보고자 영미는 좋아하는 소시지를 먹지 않는다고 거짓말한다. 소시지를 주거니 받거니 작은 소동이 영미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두근두근 데이트처럼 작동한다.
 
하지만 영미에겐 남들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이 몇 개 있다. 사연이 많았는지 그는 치매 걸린 큰어머니 집에 얹혀서 살고 있다. 하지만 집안일에 무관심한 큰오빠 대신 수발을 들어야 하니 오히려 입주 도우미 신세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퇴근 후에 작은 의류공장에서 일감을 받아 부업을 하느라 졸음에 시달린다. 달리 씀씀이가 헤픈 것도 아닌데 왜 자신을 혹사하는 걸까. 실은 회계업무엔 베테랑인 영미는 신입기사 도영이 배달과정에서 횡령을 저지르는 걸 일찌감치 간파한 상태다. 하지만 그에게 호감이 있다 보니 적발하기는커녕 자기의 부업으로 공금을 채워 넣던 참이다. 하지만 밀레니엄이 임박한 시점에서 도영도 영미가 자신의 횡령을 인지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어떻게든 채워놓겠다고 사과하는 도영과 잘 수습해 보려던 영미는 함께 무사히 Y2K를 넘기지만 새해 벽두에 횡령과 횡령방조로 구속되어 새천년을 교도소 수감으로 맞이하게 된다.
 
한겨울에 감옥 생활을 시작한 영미는 늦여름에 풀려난다. 돌아가신 큰어머니 집으로 돌아왔더니 그새 큰오빠가 집을 팔아치웠다. 살림은 물론 옷가지 하나 건지지 못한 영미는 어디에도 갈 곳이 없다. 거처할 곳을 궁리하던 영미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긴다. 실은 영미의 출소를 마중하러 온 이가 있었다. 도영의 아내 '유진'이다. 휠체어에 의지한 지체장애인인 그는 영미를 자기 남편의 불륜대상으로 취급한다. 출소하려면 몇 개월 더 남은 도영과 이혼 예정이라며 영미에게 돈을 갚아주겠다고 했지만 괜찮다며 거절했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영미는 유진에게 돈을 받으려 한다. 하지만 막상 영미가 의사를 번복하자 유진은 당장 돈이 없다며 대신에 자신의 활동지원사(활동보조인) 노릇을 새로 구할 때까지 맡으며 자기 집에 머물러도 된다고 권한다. 그렇게 두 여자의 동거가 시작된다.
 
<69세>에서 <세기말의 사랑>으로, 다른 듯 닮은꼴 이야기
 

▲ "세기말의 사랑"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엔케이컨텐츠

 
얼핏 <세기말의 사랑>은 감독의 전작 <69세>와 대척점에 선 것처럼 보인다. 전작은 그동안 거의 다뤄지지 않은 노년여성 성폭력 피해자의 진실을 밝히고 가해자를 처벌하기 위한 투쟁 과정을 담아냈기 때문에 영화의 전반적 정서가 밝을 수 없었다. 물론 고립된 가운데 외로운 싸움을 조명하면서 다대한 시련에 처하지만 결국 당사자의 결연한 의지로 돌파하는 이야기 자체는 차기작에서 고립무원 상황인데도 삶의 전망을 놓지 않는 내용과 크게 어긋나진 않는다. 감독의 두 편 모두 영화 밖 현실이라면 자포자기해 주저앉아도 3자가 함부로 뭐라 못할 기구한 처지임에도 포기하지 않고 세상에 맞서는 여성 주인공을 중심으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닮은꼴이라 해도 무방할 테다.
 
하지만 <69세>의 영화 속 세계와 달리 실제 모티브가 된 사건의 결말이 피해자가 억울한 사연을 끝내 인정받지 못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진실을 호소한 비극으로 끝났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세기말의 사랑>은 무정하고 부당한 현실 세상에 맞서되, 영화 속 세상의 캐릭터들이 단지 기능적으로만 사용되지 않고 영화를 보는 이들이 그들의 행복을 기원하고 자신들 또한 극중 인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얻어갈 여지를 감독이 부여하고픈 것처럼 다가온다. 아무래도 나날이 더 가팔라지는 세상살이의 무게와 우울한 일상에 더 무거운 짐을 얹게 하고 싶지는 않은 심경의 변화가 감독에게 일어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주인공의 결단과 변화를 두 영화 모두 중심축으로 삼지만 <69세>와 <세기말의 사랑> 작품 간 색채와 톤은 사뭇 다른 느낌이다.
 
<69세>가 동시대를 배경으로 삼아 관객들에게 지금 우리 곁에서 일어나지만 묻히고 마는 노년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조명하는 당대적 이야기인데 반해, <세기말의 사랑>은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는 '밀레니엄' 시간대를 설정 상 배경으로 삼았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임에도 거의 몇 세대는 지난 것 같은 어렴풋한 시기로 영화 속 풍경을 배정한 덕분에 지나치게 시간적 간격이 아득하지도, 그렇다고 동시대처럼 영화의 안과 밖이 실시간으로 겹쳐 보이지도 않는 줄타기를 시도한 셈이다. 감독의 의도를 정확히 투시하진 못할지언정, 그런 적당한 거리감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비극성을 과잉으로 몰고 가진 않으면서 적절히 관객이 관조할 수 있게 완충역할을 해주는 듯하다. 그런 약간의 '노스텔지어' 효과 덕분에 영화는 사회적 마이너리티를 다루면서도 전반적으로 적당히 코믹하고 밝은 기운을 조성하는데 성공한다.
 
자석의 양극처럼 서로를 끌어당기는 두 주인공 따라가기
 

▲ "세기말의 사랑"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엔케이컨텐츠

 
영화는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던 새천년 전후의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하지만 기능적으로 밀레니엄을 맞이하던 당시의 분위기를 소재로 활용할 뿐, 지나치게 깊게 파고들진 않는다. 그 대신 '영미'와 '유진'의 동떨어진 것 같지만 실은 무척 닮은꼴 고슴도치 캐릭터들이 가까워지는 과정 묘사에 집중하려 한다.
 
영미는 정직테크에서 근무하던 시절 회사 직원들이 그를 우습게 여기며 조롱하듯 붙이던 별칭 '세기말'처럼 음울한 기운을 뿜어내던 존재다. 사연은 모르겠지만 부모를 여의고 큰어머니의 한복집에서 천덕꾸러기처럼 얹혀산 지 오래로 보인다. 자연히 어릴 적부터 눈칫밥 신세였을 게 뻔하다. 공금유용을 메우기 위해 늦은 밤까지 아르바이트를 위해 돌리는 재봉틀도 한복집 시다처럼 일하며 자연스럽게 익혔을 테다. 큰오빠는 치매 걸린 자신의 모친을 돌보는 일은 내팽개치고 집안 재산 빼먹기만 하면서 심지어 영미에게 빌린 돈도 갚지 않고 떼어먹었다. 치열도 고르지 않고 촌스러운 패션에 외톨이로 매사에 웅크리고 숨은 형세다.
 
유진은 집안내력인 유전병으로 목 아래는 움직일 수 없는 지체장애인이다.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지만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물론, 외모 때문에 성적 모욕까지 겪다 보니 심성이 거칠어진 탓인지 장애 등급에 빗대어 '지랄1급'으로 불리며 장애인지원센터 직원들 사이에서 기피대상이 된 지 오래다. 남편인 도영이 공금에 손을 댄 것도 유진이 명품을 툭하면 구입하며 씀씀이가 컸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 두 사람이 동거하게 되었으니 막장 드라마 설정으로 보면 그야말로 '적과의 동침' 자체다. 머리채 쥐어뜯고 매일 육두문자 질러대며 싸워도 모자랄 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알고 있던 기본정보는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정확하지 않다는 게 차츰 드러나기 시작한다. 영미는 유진에 대해 사치 때문에 남편을 감옥살이로 내몬데다 성질 고약한 '나쁜 장애인'으로, 유진은 영미를 자기 남편과 불륜을 저지르며 함께 공금횡령에 가담한 상대쯤으로 여겼지만 사실관계는 그들 각자가 알던 것과 무척이나 동떨어진 것이었다. 둘의 공통분모인 '도영'은 성이 구씨라 '구석기'라 불리는데 2000년이건 2024년이건 현실에서 보기 드문 지고지순한 존재에 어울리는 별명이다. 그는 영화 속에서 매우 기능적인 역할을 수행하는데, 실제 그의 등장은 영화 초반 20세기의 끝자락(해당 부분은 흑백으로 묘사된다)과 영화 끝자락에서 원격으로 모니터에 등장하는 지극히 짧은 분량에 머문다. 사회적으로 온당한 권리와 대우에서 소외된 두 주인공을 만나게 해주고, 실은 보석처럼 빛나는 그들의 진가를 알아봐준, '전설 속의 동물'이 도영의 몫인 셈이다.
 
우울한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전파되는 긍정과 희망

영미는 납작 웅크려 묵묵히 주변의 학대와 모욕을 참고 견디는 방식으로, 유진은 위악적인 가면을 쓴 채 타인에게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고집불통에 기선제압 스타일로 버티고 견딘다. 둘의 생존방식은 초반에는 정반대 양상으로 보이지만 무색무취건 악다구니를 쓰건 둘 다 사회적 약자이자 주변에서 이용하거나 착취하기 좋은 먹잇감으로 간주되는 대상인 건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 각자가 겪고 있던 고통을 서로 목격하고 유일한 '편'이자 '아군'이 되어주면서 둘의 관계는 급속히 진전되며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은 물론, 그들 스스로의 변화를 이끄는 촉매 작용 또한 함께 생성된다. 누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역할을 주체적으로 찾아내면서, 누구는 자기 내면에 감춰진 슬픔과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돌파할 동력을 얻게 되는 셈이다.
 
영미와 유진 주위의 인물들 대부분은 (영미의 큰오빠 정도를 제외하면) 둘의 고통을 일정부분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만만한 상대로 치부되는 둘에 대해 이기적으로 이용하려는 욕망을 일정부분 품고 있던 이들이다. 영화 밖 현실에서 만만하게 보이는 상대, '호구' 격의 존재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평범한 자화상 같은 존재들이다. 하지만 그런 존재들이라도 주변에서 사라지면 견디기 힘들어하던 주인공들, 특히 까칠한 성격 유세하는 유진은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자신은 아무리 센 척 해봐야 휴대전화 확인도 못하는 핸디캡에 처해 있다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조금만 톤을 다운시키면 지독히 차갑게 묘사 가능한 해당 대목들이지만 감독은 한없이 추락시킬 의도는 없다는 걸 관객에게 끊임없이 주지시킨다. 요즘 같은 시기에 그렇게 늪지대로 빠져드는 기분을 관객이 견디기엔 무리가 있다는 동시대적 공감 같은 기분이다. 그렇게 현실의 암울한 기운 넘실대는 배경이지만 솟아날 구멍은 남아 있다는 안전장치를 감독과 제작진은 공들인 장치와 풍경을 통해 효과적으로 풀어낸다.
 
연기파 배우들의 열연으로 구현된 꽃말의 의미
 

▲ "세기말의 사랑"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엔케이컨텐츠

 
영미 역 이유영 배우의 신비로운 눈빛과 함께 미용실습 희생 제물로 빨강머리 앤이나 말괄량이 삐삐처럼 현란하게 염색된 머리카락, 틀니 착용으로 연출된 뻐드렁니는 배우의 원래 외모를 적당히 하향시키되 천편일률적 외모 묘사와는 차별화되는 개성을 부여한다. 지체장애인 유진 역의 임선우 배우는 우아한 외모와 상처받아 냉소의 갑옷을 두른 독설가의 면모를 겸비한 배역을 현실감 넘치게 그려낸다. '전설 속의 유니콘' 같은 도영 역 노재원 배우의 인상적인 캐릭터 해결사 능력, 유진의 '호구2호' 오준 역 문동혁 배우의 미용사 배역도 조화롭다.
 
여기에 짧은 분량이지만 자기 자식만 챙기고 알게 모르게 영미에게 상처를 입힌 큰어머니 역할 변중희 배우 역시 지독히 있을법한 우리주변의 초상을 상징적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거의 이 영화 주요 배역 중 '절대 악'에 가까운, 하지만 자신은 정작 잘못한지도 잘 모르는 영미의 큰오빠 역 허준석 배우의 찌질 그 자체 캐릭터인 개성 있는 악역도 눈에 쏙 들어온다. 영화 초반 뜬금없던 소시지 다툼은 이 둘에 의해, 그리고 한 세대 이전의 시대 배경 덕분에 주인공 영미의 과거사를 별다른 해설 없이도 체감시키는 디테일로 구현될 수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그렇게 영화는 적재적소에 투입된 배우들의 안성맞춤 캐릭터 소화와 제작진의 공들인 패션 및 헤어스타일, 2000년 전후의 시간대를 환기시키는 소품 등으로 개연성과 분위기를 조화시켜내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극장에서의 2시간 전후를 위로와 격려의 기운으로 채워낸다. 따지고 보면 2000년 당시에도 세기말적 불안과 IMF 직후의 불황과 혼란은 넘쳐났었고, 2024년 현재는 모두가 현실에선 너무 힘들고 불안한 나머지 인스타그램 자기자랑과 유튜브의 자극적 콘텐츠에서만 행복할 뿐이지 않은가.
 
영화는 기술발전의 변화상과 인간본성의 불변적 측면을 동시에 취급하지만 주제의식은 명확해 보인다. 말미에 등장하는 인터넷 네트워크 연결을 통해 가능해진 원격 면회의 혁신성은 전자를, 원활하지 않은 접속환경으로 영상전송이 중단되지만 서로의 마음이 확인된다는 암시는 둘 중 무엇이 더 중한지 작가적 태도를 은유하는 '결정적 찰나'에 해당될 테다. 연이어 등장하는 높고 푸른 가을하늘 역시 말이다.
 
그렇게 극장 안과 밖이 별반 다르지 않기에 <세기말의 사랑>은 비록 불투명한 미래에 로또 당첨 비결을 제시하진 않을지언정 영화 속 '세기말' 영미처럼 자신과 주위를 사랑하는 법과 의지를 부흥시키는 데에는 만만치 않은 효능을 안긴다. 영미의 몸 한 구석에 아로새겨진 '지고지순함'의 자세 같은 영화다.
 
<작품정보>
 
세기말의 사랑 Ms. Apocalypse
2022|한국|드라마
2024.01.24. 개봉|116분|12세 관람가
각본/감독 임선애
주연 이유영(영미 역), 임선우(유진 역), 노재원(도영 역)
출연 문동혁(오준 역), 변중희(정자 역), 허준석(규태 역),
미람(정은 역), 김기리(기훈 역), 장성윤(미리 역)
제공/배급 ㈜엔케이컨텐츠
공동배급 ㈜디스테이션
제작 ㈜기린제작사
공동제작 ㈜위드에이스튜디오
 
2023 27회 판타지아 영화제 슈발뉴아경쟁
2023 28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파노라마
2023 49회 서울독립영화제 페스티벌 초이스
세기말의사랑 임선애감독 이유영 임선우 노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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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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