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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검증 테스트라는 '아찔한 실험'... 87문항의 함정

[리뷰] 웨이브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필요한 건 '차별'과 '사상'을 구분하는 힘

24.02.08 09:17최종업데이트24.02.08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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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브 오리지널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의 한 장면. ⓒ 웨이브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세상에선 이런 착각에 빠지기 쉽다. 그건 '차별적인 생각도 사상'이란 착각. 표현의 자유를 맹신하는 사회는 때론 논쟁거리와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이러한 오류는 개인의 견해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사실이나 존중되어야 할 정체성을 왈가왈부의 장으로 초대하고, 차별적인 시선마저 하나의 의견이란 이유로 비판 없이 수용한다.

예고편부터 반응이 뜨거웠던 서바이벌 예능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가 본색을 드러냈다. 극과 극의 가치관을 가진 출연진들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이념 서바이벌을 벌인다는 프로그램 취지처럼 시작부터 '사상' 이야기다. 사상 검증 테스트를 통해 출연진들을 특정 유형에 넣고 그들이 대립할 만한 자극적인 주제를 던진다. 출연진 간의 치열한 토론에 몰입하다가도 근본적인 의구심이 맥을 끊는다. 과연 세상 모든 의견을 '사상' 혹은 '토론'의 범주에 넣어도 되는가?
 
당황스러운 테스트 문항들 
 

웨이브 오리지널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의 한 장면. ⓒ 웨이브

 
지난 1월 26일 공개된 웨이브 오리지널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아래 사상검증구역)는 출연진의 가치관을 분류하기 위해 사상 검증 테스트를 제작했다. 테스트는 개인을 '정치', '계급', '젠더', '개방성'의 4가지 영역으로 나눈 후, 그 안에서 '좌/우', '서민/부유', '페미니즘/이퀄리즘', '개방적/전통적'으로 세분화한다. 사상 논쟁을 벌이는 만큼 엄격한 기준이 필요할 터. 그러나 테스트의 유효성 입증에 제동이 걸렸다.

예고편 공개부터 '개인의 사상은 쉽게 범주화할 수 없다'는 따가운 의견이 있었다. 특히 정치, 경제, 가치관 등 분야를 막론하고 양극화가 심해진 현 시점에서 개인의 사상을 이분법적으로 분류하는 프로그램의 시도가 적절한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사상검증구역> 1화 방영과 출연진들이 참여한 사상 검증 테스트 또한 공개되었지만, 비판의 목소리는 여전히 남아있다.

총 87문항으로 구성된 테스트에선 일부 자극적인 문항이 눈길을 끈다. '미국의 흑인 차별은 어느 정도 정당한 근거가 있다', '여성의 명백한 동의를 받지 않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섹스는 성폭행일 가능성이 높다' 등 차별을 내포한 질문이 개인의 성향을 판단하는 기준선을 자처한 상황. 이에 차별적인 관점을 개인의 사상이란 명목하에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테스트에 참여한 A씨는 "테스트 문항이 당황스러웠다. 만일 누군가 흑인 차별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사상으로 존중해야 할 것이 아니라 사회에 위험한 발상이 아니냐"고 답하며 "이미 답이 정해진 질문을 받는 거 같아서 테스트하면서 의아했다"고 밝혔다. 그는 테스트를 통해 도출된 자신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또한 문항은 복잡한 사회 현상을 단순히 일축하며 문장이 내포한 맥락을 유추하지 못하게 한다. 참여자 B씨는 "PC주의자들의 주장이 선을 넘는 경우가 많다는 문항에서 잠시 멈췄다. 테스트가 정의한 'PC주의자'나 '그들의 주장'이 무엇인지 모르겠더라"고 이야기하며 "상세한 맥락을 알고 깊이 고민해야 할 이야기들이 여기선 '동의 혹은 반대'인 흑백 논리가 된다"며 회의감을 드러냈다.

해당 테스트는 '실제 존재하는 여러 사회적 입장에 대한 응답자의 동의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므로, 일부 차별적이거나 과격하다고 느껴지는 문항이 있다'는 안내 문구를 제시하였다. 그럼에도 차별적이거나 사실과 다른 문항을 사회적 입장의 일부로 일축 시켜도 되는가에 대해선 충분한 해명이 되지 못했다.

특히 프로그램은 출연진이 발언할 때마다 그의 사상을 키워드로 함께 보여준다. 이러한 연출이 개인의 생각을 단편적으로 일축하며 오히려 상대에 대한 이해를 저해한다는 의견도 있다. 시청자 C씨는 "출연진이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점점 그의 사상을 알아가는 게 아니라 거꾸로 사상이 적힌 키워드를 보고 그를 판단하게 된다"며 "출연진이 사람이 아니라 NPC(플레이어가 아닌 게임 속 캐릭터)처럼 느껴진다"고 고백했다.
 
페미니즘의 반대말은 이퀄리즘?
 

웨이브 오리지널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의 한 장면. ⓒ 웨이브

 
<사상검증구역>의 뜨거운 감자는 페미니즘. 실상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프로그램은 페미니즘의 반대 성향을 '이퀄리즘'이라 규정하지만, 이는 학술적 용어가 아닌 누구나 자유롭게 작성과 수정이 가능한 '나무위키'에서 2016년 8월 등장한 허구적 개념이다. 작성자는 실제로 존재하거나 활용된 적 없는 가상의 '이퀄리즘'을 서구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등장한 개념처럼 주장하였고 인터넷 상에서 정설인 양 빠르게 퍼졌다.

작성자가 주장한 이퀄리즘은 "페미니즘보다 역차별 논란에서 자유롭다"며 여성의 인권이 상대적으로 낮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차별과 여성 억압은 숫자와 증거로 엄격히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이자 명백한 현실이다. 나무위키 측은 2017년 1월 '젠더 이퀄리즘'을 '나무위키 성평등주의 날조사건'으로 수정하며 원글 작성자의 접근을 차단하였고 이를 "안티 페미니즘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만든 허위 문서"라고 명시하였다.

페미니즘은 성별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견해이자 젠더에 얽힌 모든 사람의 차별을 대변하는 사상이다. 여성이 겪는 차별을 없애고 모든 이들이 젠더에 대한 고정관념과 차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상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결코 평등주의를 가장한 이퀄리즘이 아니다.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의 반(反)은 차별의 존재를 삭제하고 불평등한 사회 논리를 반복하는 '차별주의'이다.

하지만 <사상검증구역>은 허구적 개념이자 안티 페미니즘을 기반으로 한 이퀄리즘을 수많은 학술적 논쟁과 사회적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 여타 사상처럼 범주화하였다. 또한 사상 검증 테스트에서는 "임금의 성별 격차는 근거 없는 믿음이다", "여성이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을 호소할 때는 엄살인 경우가 많다" 등 이미 공론장에서 증명된 사실을 마치 논쟁거리처럼 제시하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경제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기준 한국은 평균 11.9%의 3배에 가까운 31.1%의 임금 격차를 보였고 1996년 가입 이후 성별 임금 격차 1위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여성 우울증 역시 마찬가지다. 2022년 여성 우울증 환자는 67만 4555명, 이는 남성 32만 6189명보다 2배 이상 많은 수치다. 최근 5년간(2018~2022) 가장 가파르게 우울증 환자가 증가한 집단은 20대 여성이었다.
 
<사상검증구역>은 어떠한 공론장을 보여줄까

<사상검증구역>은 일종의 사회 실험을 표방하며 현실과 비슷한 장치를 설계하였다. 투표에 따라 리더를 결정하고 세금을 내는 게임 규칙이나 의도적으로 출연진 간의 혼란을 일으키는 플레이어 '불순분자' 등 다양한 설정을 통해 현실 속 사회를 환기시킨다. 프로그램은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진 출연진들이 갈등과 토론을 거쳐 합리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을지 주목한다는 점에서 대안 정치를 모색한다.

합리적인 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해선 프로그램의 논리처럼 갈등과 토론이 필요하다. 하지만 갈등과 토론의 여지가 없는 누군가의 삶과 정체성, 직면한 차별에 대해 논한다면 그 공론장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어긋난 정반합도 어쨌든, 합(合)이라 생각하는 공론장이 모두에게 메가폰을 쥐여줄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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