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2.12 18:53최종 업데이트 24.02.12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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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건설공사현장으로 출근하는 노동자들. ⓒ 나재필

 
눈이 내렸다. 눈물처럼 내렸다. 아침부터 기분이 묘했다. 눈발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인지, 마음이 흔들려 눈물이 맴돈 것인지는 모르겠다. 영하 15℃. 폐부를 찌르는 깊은 한기를 느끼며 충북 음성 궁벽에 위치한 건설 현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오전 막노동을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아버지의 부고가 날아들었다. 청천벽력이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청년처럼 웃으시며 생신상을 받으시던 분 아니던가. 나는 내 앞에 놓인 식판을 내팽개치고 현장 밖으로 뛰쳐나왔다. 버스도 없고 택시도 잡히지 않았다. 40㎞밖에 떨어져 계신 아버지의 주검을 생각하니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빙점에 얼어붙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십 리(4㎞)를 걸어서야 읍내에 도착했고 겨우 택시를 잡아 청주를 향했다.


싸늘히 식어버린 아버지를 보는 순간 말라 있던 눈물샘이 터졌다. 손을 잡았다. 활시위처럼 팽팽하던 검붉은 핏줄은 활동을 멎었고 손등은 금강사 사포를 만지는 듯 거칠었다. 평생을 노동에 헌신한 아버지의 슬픈 증표였다. 아버지의 지난한 노동은 결국 당신 스스로의 죽음을 통해 마침표를 찍었다. 어느 누구도 아버지의 노동을 끝내지 못했다. 아버지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일을 했고,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끝내려고 해도 끝낼 수 없었던 그 고통의 밥벌이가 계속됐던 것이다. 노동은 숙명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의 노동을 끝내드리지 못한 건 자식의 불찰이었다. 더구나 늦은 나이에 노동판에 뛰어든 나로서는 마치 업(業)을 잇기라도 하듯 고달픈 인생을 답습해 가고 있다.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이제 다시는 건설현장 막노동을 하지 않으련다. 그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일지도 모른다.'

나는 삼일장을 치르고 나서 현장에 복귀하지 않았다. 퇴사 수속을 간단하게 밟고 집에 틀어박혔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노동을 스스로 끝내지 못했지만 난 스스로 끊어내고 싶었다. 그리고 보름이 흘렀다. 일상은 회복됐고 마음도 진정을 찾아갔다. 그러는 사이, 다시는 노동판을 기웃거리지 않겠다고 다짐한 나의 결기는 곧 현실과 부딪쳤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밥벌이였다. 인간에게 노동은 순전히 돈벌이의 차원이 아니라, 삶을 지속하기 위한 최소한의 도구였다. 밥이 아니라 법 같이 느껴졌다. 몸에서 새싹이 돋듯 근질거렸다. 이튿날 나는 충북 청주의 한 건설현장에 또 다시 취업했다.

건설노동자로서 세 번째 겨울...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다

어머니는 평생 아버지의 노동을 부정하셨다. 하지만 막상 아버지의 부재가 현실화 되자 지난날의 원망을 후회하셨다. 그리고 설날 직전에 이사를 결행했다. 아버지의 흔적을 잊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그 흔적을 무시로 목도하는 것이 괴로워서였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 아무튼 가장의 부재는 명절의 풍경을 바꿔놓았다. 이삿짐에서 아버지의 온기는 없었다. 과거의 모든 정령들이 이미 버려졌고 모든 기억이 사라져있었다. 더욱이 노동자의 삶을 살아온 아버지를 상징할 수 있는 물건은 낡은 안전화(운동화) 한 켤레뿐이었다. 어머니는 남편의 유품 정리과정에서 아버지의 노동이 인두자국처럼 새겨진 그 신발만큼은 정리하기 싫었던 모양이다. 이제야 아버지를 이해하시는 것 같아 안도했다.

한때 아버지의 노동을 폄훼했었던 나는, 건설노동자로서 세 번째 겨울을 나고 있다. 소한, 대한을 거치면서 얼굴과 손에 경미하게 동상을 입었다. 한데서 삭풍을 맞으며 일을 한 결과다. 위아래로 내복 두 벌, 양말 두 켤레를 신었는데도 추웠다. 건설 현장에선 예보 온도보다 체감온도를 중시하는데 정말 손·발가락이 잘려 나가는 줄 알았다. 그때 아버지의 마지막 체온을 떠올렸다. 그건 노동자의 온도였다. 견뎌낼 힘이 생겼다.

막노동을 시작하고 맞이하는 세 번째 설은 특별하지도, 특별할 것도 없다. 일용직이어서 손에 쥐어지는 특별선물 또한 없다. 하지만 나는 나의 노동이 나의 안녕을 담보하길 바란다. 열심히 일했으니 쉬고 싶은 것이다. 설날은 나에게 주어진 겨울 특별휴가다.

'계륵' 같은 설날
 

폭설이 내린 도로에 찍힌 필자의 발자국 ⓒ 나재필

 
내가 속한 건설 현장엔 닷새간의 휴식이 주어졌다. 일명 셧다운(shutdown:정보·통신 전원 공급의 중단이나 사고, 기타 오류 따위의 이유로 컴퓨터 시스템의 작동이 중지되는 일)이다. 원하든 원치 않던 이 기간엔 공사 중지다.

노동자들은 명절을 맞기 일주일 전부터 들떠있었다.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이유는 다양했다. 설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도 달랐다. 고향으로 달려가는 부푼 꿈, 가족과 시간을 보낼 생각, 연인과의 여행을 준비한 사람, 온전한 휴식을 꿈꾸는 사람 등등...

하지만 적지 않은 노동자들은 설날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명절에 돈을 버는 게 낫다며 '잃어버린 닷새'라고 표현했다. 닷새의 시간은 100만 원 벌이가 왔다 갔다 하는 꽤 긴 시간이다. 돈을 벌어도 빚 갚기도 벅찬 사람, 일찍이 고향을 등져 갈 곳 잃은 사람, 가정사에 얽혀 가족을 만나도 반갑지 않은 사람, 연애할 시간보다 돈버는 데 시간을 쏟아 솔로인 청춘들. 이들은 고향과 가족보다는 차라리 일터가 편하다고 했다.

20대 노동자 A씨는 명절에 단기 아르바이트를 한다. 물류터미널서 택배 상하차를 하는 일이다. 한 푼이라도 더 벌자는 쪽이다. 또 다른 20대 청년과 40대 근로자는 집콕을 선택했다. 매일 오전 5시에 일어나 오후 7시까지 일하다보니 체력 방전을 절감했다. 잠도 절대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명절엔 아예 잠에 푹 빠져있을 생각이다.

50대 노동자 B씨는 낚시여행을 떠난다. 막노동이란 게 정신적 피로도가 상당하다. 때문에 마음을 정리할 겸 자신을 내려놓기로 했다. 30대 노동자 C씨는 그나마 가족주의자다. 가족과 휴양림에 간다고 했다.

건설노동자들에게 설날은 어쩌면 계륵 같은 것이다. 쉴 수 있어 행복하나, 벌이 또한 개점휴업이니 쉬는 것이 편치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명절만큼은 쉬어가길 권면한다. 가족과 도란도란 모여 맛있는 음식 나누고, 좋은 꿈 많이 꾸며 편안한 재충전의 시간이 되길 소망한다.

"노동자님이여, 수고 많으셨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덧붙이는 글
올해도 '떼인 돈'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적지 않은 듯하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침체기로 빠져든 건설업의 임금체불은 4000억 원에 달했다. 2022년보다도 50%가량 증가한 수치다. 임금체불은 경제적 요인 못지않게 임금을 경시하는 문화와 우리 사회에 깊숙이 퍼져 있는 체불 불감증에 기인한 구조적 문제다. 피땀 흘리며 근로를 제공한 노동자가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빈손'이라면 최악의 명절 아닌가. 제발 유노동 무임금의 병폐가 사라지길 바란다. 노동자의 임금은 그들의 피땀 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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