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풍에 쓰러진 야자수를 기다란 의자로 삼아 바다에서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는 모습.
박희정
그래도 하늘과 바다, 지상이 하나로 이어진 비치는 영감을 주기 충분했다. 태풍에 쓰러진 야자수를 기다란 의자로 삼아 바다에서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오래전 지었던 건물이 기둥만 남기고 사라져버려 맥수지탄을 느끼게 한다. 맨발로 이 바다 끝을 하염없이 가고 싶게 하는 바다였다.
호텔로 돌아오니 조식 시간이다. 과일도 많고 빵도 다양했다. 생선, 고기류도 풍부했다. 유리잔에 물을 채워주는 서비스도 과하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짐을 맡겨놓고 혼다 비치로 향했다. 도시를 떠나는 날은 이동에만 많은 시간을 보내기에 해변을 걷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수영복 준비도 없이 들어갔다. 코워리 섬까지 1000페소(2만5천원)이다.
얼마 머물지도 않을 텐데 배까지 타고 들어가야 하나 망설이다가 미국인을 만났다. 캘리포니아에서 왔다는 영어교사다. 배값을 같이 내고 들어가서 한적한 시간을 보냈다. 그림처럼 동그란 섬이다. 한 가운데 야자수가 몇 그루가 있고 그 아래 바와 타투가게, 마사지 가게가 조그맣게 있다. 우린 책도 읽고 글도 쓰고 모래성을 쌓았지만 그래도 시간이 남아 마사지를 받았다. 여행의 꿀맛이었다.
푸에르토 프린세사에 오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하루 정도는 이 섬에서 휴양을 보내길 추천한다. 돌아오는 길에 트라이시클을 못 만나 걱정했는데 지프니가 선다. 맘 좋아 보이는 운전수 아저씨는 생선가게에서 장도 보고, 사람들한테 차비도 받아 가면서 안전하게 운전한다. 우리는 한 사람당 500원의 차비를 내고 필리핀의 서민들을 밀착해서 관찰했다.
여행의 이유는 다양하다. 나는 왜 여행을 하는가? 나이는 훌쩍 50대 중반이다. 낯선 나라에서 사람들 속으로 녹아 들어가 느릿느릿 산책하면 쓸쓸하지만 그에 걸맞는 자유가 몸속에 가득 찬다. 삶을 관조할 수 있다. 평정심이다. 물론 손해를 보고 무시당할 때는 어렵게 얻은 관조의 그릇이 '탁' 하고 엎어진다. 그래도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회복한다.
여행지의 마법이다. 푸에르토 프린세사에서 나는 무엇을 얻었을까? 십수 년 전 치앙마이 아파트형 숙소에서 묵으면서 현지인의 삶 속으로 녹아 들어갔던 그 젊은 날의 '나'를 찾았다. 이제는 배낭여행에 지친 나머지 안락한 현실에서 소비를 즐기고 자본주의의 단맛을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쯤, 이곳에 와서 청춘을 되찾은 것이다.
가방 속에 책 한 권 넣고 선크림과 비치 타올, 그리고 갈아입을 옷가지를 넣은 채 스쿠터를 타고 정처 없이 다니고 싶다. 일주일쯤 머물 수 있는 에어 비앤비를 구해 거기에서 글 쓰고 사색하며 매 순간을 누리고 싶다. 그 생각만 해도 피가 뜨거워지고 심장이 쿵쾅댄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잃었던 젊은 날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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