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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시상식 휩쓴 크리스마스 영화, 세 가지 키워드

[리뷰] 영화 <바튼 아카데미>

24.02.28 15:06최종업데이트24.02.28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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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국 뉴잉글랜주의 고등학교 '바튼 아카데미'에서 역사 교사로 재직 중인 '폴'(폴 지아마티). 이렇다 할 가족도, 친구도 없는 그는 책과 자기 세상에 갇힌 채 살아간다. 그래서 그는 크리스마스 방학 동안 숙직을 맡아 기숙사에 남은 학생들을 지도해 달라는 교장의 제안도 큰 불평 없이 받아들인다. 어차피 그의 크리스마스는 달라질 게 없으니까.

하지만 크리스마스 방학 첫날부터 그의 예상은 어긋나기 시작한다.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던 '앵거스'(도미닉 세사)가 갑작스레 학교에 남았기 때문. 입이 튀어나온 앵거스는 교칙대로 공부를 강요하는 폴의 지도에 틈만 나면 반기를 든다. 거기에 아들과 사별한 기숙사 주방장 '메리'(데이바인 조이 랜돌프)까지 학교에 남으면서 무미건조할 예정이었던 폴의 크리스마스는 자꾸만 궤도를 벗어난다. 

알렉산데 페인이 크리스마스 영화를 변주하는 법
 

영화 <바튼 아카데미> 스틸컷 ⓒ 유니버설 픽쳐스

 
'크리스마스 영화'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가족과 떨어져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주인공. 그는 가족이 아닌 이들과 여러 모험을 겪는다. 가족의 의미와 소중함을 되새기며 그렇게 한 층 성장한다. <나 홀로 집에>나 <해리 포터> 시리즈 초반부가 대표주자다.

알렉산더 페인 감독, 폴 지아마티 주연의 코미디 드라마 <바튼 아카데미>도 마찬가지다. 비둘기 아줌마나 늑대인간은 없지만 큰 틀은 같다. 엄마와 새아빠의 신혼여행 때문에 학교에서 크리스마스 방학을 보내야 하는 앵거스. 불만 가득한 앵거스는 당직 교사 폴, 학생 식당 조리사 메리와 우여곡절을 겪으며 한결 성숙해진다.

이렇게 보면 특별할 게 없다. 잘 만들고 감동적인 크리스마스 영화. 그뿐이다. 그러나 정말 이뿐이라면 <바튼 아카데미>가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 남우주연, 여우연, 각본, 편집상까지 다섯 부문에 후보로 선정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칫 익숙해 보이는 크리스마스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세 가지 키워드로 압축할 수 있다. 가족, 교육, 그리고 1970년대다.

학교에서 새로운 가족을 찾다

폴과 앵거스는 단순한 학생과 교사 관계가 아니다. 앙숙이다. 규칙을 준수하는 교사와 자유분방한 청소년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이 친구가 아니기에 그들의 마음의 문을 여는 과정은 더 감동적이다. 특히 그 문을 여는 열쇠가 눈에 띈다. 그들은 가족과 관련해서 남몰래 간직한 아픔을 털어놓고, 서로 위로를 건넨다. 그 순간 그들의 크리스마스는 비로소 따뜻해진다. 옆에 있는 새 가족을 찾았기 때문이다.  

앵거스는 가족을 잃었다. 친아빠는 정신병원에서 치료 중이라 만날 수 없다. 친엄마는 계부와 신혼여행을 즐기느라 자기를 학교 기숙사에 처박아뒀다. 그래서 그는 유일한 가족사진에 유독 집착한다. 바튼 아카데미에 집착하는 폴은 괴짜로 유명하다. 교칙을 어기거나 공부를 안 하는 학생에게 유달리 엄격하다. 그런 그에게도 속사정이 있다. 어릴 적 엄마와 사별한 후, 그에게 집은 바튼 아카데미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앵거스와 폴은 그토록 바라던 가족과 집을 서로에게서 발견한다. 도저히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았던, 서로 마음에 안 들던 둘은 같이 병원을 가고, 저녁을 먹고, 서점을 가고, 볼링을 치면서 상대방의 고독함을 발견한다. 앵거스가 숨기고 있던 우울증 약도, 하버드에서 쫓겨나 바튼 아카데미로 돌아와야 했던 폴의 사연도 공유한다. 가장 비참한 순간을 보여주면서 그들은 누구보다도 끈끈한 사제 관계로 거듭난다. 

메리도 빼놓을 수 없다. 아들을 최근에 잃은 그녀는 후유증에 시달린다. 두 남자는 그녀 옆에서 같이 TV를 보고, 크리스마스 파티에 동행하며 외로운 시간을 채워준다. 메리도 앵거스와 폴이 싸울 때 은근슬쩍 앵거스의 손을 들어주고, 폴이 앵거스를 학생이 아니라 제자로 대하도록 충고를 건넨다. 그렇게 가족을 잃은 이들이 마침내 새 가족을 찾는다. 셋이 함께 칠면조를 먹는 순간이 그 어느 때보다 특별한 크리스마스인 이유다. 

학교에 저항하는 사제지간
 

영화 <바튼 아카데미> 스틸 ⓒ 유니버설 픽쳐스

 
그러면서도 <바튼 아카데미>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실제로 영화 곳곳의 힌트를 따라가면 앵거스와 폴을 매개로 삼아 암시하는 이야기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알렉산더 페인 감독다운 블랙 코미디와 찰진 대사를 쫓으면 <바튼 아카데미>의 진짜 풍미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셈이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바로 교육이다. 흥미롭게도 배경은 학교지만, 두 주인공은 학교에 썩 어울리지 않는다. 명령과 교칙을 준수하는 교사나 학생은 아니기 때문. 일례로 폴은 교장에게 뻗댄다. 부유한 집 아이에게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점수를 부여하라는 교장 지시를 단칼에 거절한다. 그 아이들이 바튼 아카데미라는 명문 학교에 입학한 것만으로 그들은 이미 특혜를 받았으니, 좋은 성적을 따는 것을 그들 몫이라면서. 

그뿐만이 아니다. 관례를 따르는 다른 교사들과 달리 폴은 방학 직전까지도 수업을 강행한다. 자연히 학생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을 리 없다. 이 점은 앵거스와 폴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유달리 입이 거친 앵거스는 다른 학생의 인신을 공격하는 데 도가 텄기 때문. 방학 첫날부터 주먹질을 유발할 정도다.  

진정한 학교와 교사를 만나다

그런데 <바튼 아카데미>는 오히려 그들의 비뚤어짐을 비난하지 않는다. 학교라는 시스템이 강제하는 일방향 규칙을 마음껏, 제대로 어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이라고 말한다. 일례로 폴이 앵거스에게 교칙을 지키라고 요구할 때 그들의 관계는 악화일로였다. 오히려 그들이 규칙을 깰 때 변곡점이 생겼다. 앵거스가 체육관에서 난동을 부릴 때. 그들이 교칙을 깨고 보스턴 여행을 떠났을 때. 비로소 그들은 서로를 이해했다.

이처럼 <바튼 아카데미>는 단순히 몇몇 개인 방학과 연휴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바튼이라는 학교가 대표하는 교육 시스템에 대한 저항, 규율에 대한 도전이 영화의 핵심이기 때문. 그보다는 삶의 축소판에 가깝다. 정해진 길을 알려주는 교육을 따르는 대신, 능동적으로 반응하며 필요하면 반항할 줄 아는 삶의 과정을 그려냈다.

시작과 끝 역시 주인공, 더 나아가 관객의 반항을 응원한다. 교장과 대면하는 첫 장면에서 폴은 키케로의 어록을 인용한다. '우리 중 누구도 홀로 태어나지 않는다(Non nobis solum nati sumus).' 마지막 순간, 그는 그 말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직접 증명해 보인다. 본인에게는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는 바튼 아카데미를 포기하려 한다. 이제는 아들과도 같아진 앵거스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래서 폴이 앵거스에게 슬며시 건네는 악수는 그 어떤 대사와 제스처보다도 감동적이다. 따뜻한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찾아온 추운 겨울날 같은 현실을 견딜 수 있을 만큼 따뜻하기도 하다. 마음의 흉터를 못 지웠거나 트라우마를 떨치지 못한 이들 간의 연대를 단 한 순간에 꾹꾹 눌러 담았으므로.  

70년대 터치 덕분에 더 감성적인
 

영화 <바튼 아카데미> 스틸컷 ⓒ 유니버설 픽쳐스

 
극 중 시대상이 1970년대임을 고려하면 <바튼 아카데미>는 더 의미심장해진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여파로 인한 히피 문화가 퍼지며 사회에 대한 저항이 꽃피우는 시대였으니까. 페인 감독은 시대적 환경을 절묘하게 활용하며 강압적인 제도에 맞설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에 힘을 더한다. 군사 학교에 가기를 두려워하는 앵거스를 비추면서 베트남 전쟁을 암시하는 식이다.

여러 기술적 접근에도 페인 감독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다소 과하게 느껴지는 줌 렌즈, 1.66:1의 화면비, 필름 스크래치, 디졸브 효과가 배경에 깔린 올드팝과 어우러지는 순간 스크린 위에는 1970년대가 되살아난다. 오래전에 사용된 영화사 로고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다소 평범한 듯한 각본도 의도된 것처럼 느껴진다. <바튼 아카데미>는 관객을 70년대로 초대함으로써 가족, 학교나 학생, 더 나아가 사회 분위기에 관해서 까지도 한 번 더 사색할 수 있는 시공간을 선사하는 영화이기 때문. 이 대목에서는 류승완 감독의 <밀수>가 떠오르기도 한다. 겉보기에는 투박한 <바튼 아카데미>가 '따뜻한 크리스마스 영화'라는 무미건조한 평가에 갇히면 안 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배우들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폴 지아마티와 데이바인 조이 랜돌프의 연기력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미 성과로 보여줬다. 아카데미 시상식에 후보로 올랐을 뿐만 아니라, 제81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각각 뮤지컬·코미디 부문 남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눈에 띄는 배우는 따로 있다. 고등학교 연극부 활동이 경력의 전부라는 도미닉 세사의 변화를 지켜보는 재미가 퍽 탁월하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potter1113)와 브런치(https://brunch.co.kr/@potter1113)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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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읽는 하루, KinoDAY의 공간입니다. 서울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정치경제철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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