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07 07:05최종 업데이트 24.03.07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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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 '오마이뉴스 기자 박정훈'과 '라이더유니온 조직국장 박정훈',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연대를 모색해 나갑니다. [편집자말]
'이건 내 거 아닌데...'

얼마 전에 출판사에서 메일이 하나 왔습니다. 제가 쓴 책의 2023년 전자책 판매량과 인세를 안내해 주는 PDF 파일이 첨부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쓰지 않은 <플랫폼은 안전을 배달하지 않는다>의 판매량 내역도 포함돼 있더군요. 이 책은 '<오마이뉴스> 기자' 박정훈의 책이 아니라, '라이더유니온 조직국장' 박정훈이 쓴 책인데 말이죠. 하지만 이런 일이 가끔 있으니 놀랍지는 않습니다.


저희 둘을 헷갈리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제 결혼을 축하해준다고 정훈님에게 꽃을 들고 간 분들이 있었죠. 또 편집기자로 일하면서 이렇다 할 글을 쓰지 않고 있던 제게 "요즘 글 잘 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던 분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저희 둘은 80년대생의 남자이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으로 교류하거나 만나는 사람이 겹치는 경우도 있고, 둘 다 안경을 썼으니 실제로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비슷한 느낌일 것 같긴 합니다.

혹자는 제 글을 보고 '박정훈 조직국장'을 욕하고, 정훈님의 글을 보고, '박정훈 기자'를 욕하기도 하죠. 그래서 더 부끄럽지 않게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실수나 부덕함으로 억울하게 정훈님이 비난받거나 SNS 뒷담화의 대상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요. 이렇게 만나지 않아도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서로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기도 합니다.

2012년 제가 한 독립매체에서 일할 때 정훈님을 인터뷰했고, 그 이후 12년 동안 알고 지냈네요. 당시 인터뷰 기사의 부제가 '박정훈이 박정훈을 만나다'이고, 지금 시작하는 서간문의 연재명은 '박정훈이 박정훈에게'입니다. 식사한 적도 몇 번 없고, 사적인 대화를 나누지도 않는 사이끼리 무슨 내용의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을지 민망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기회에 정훈님과 우정을 잘 쌓아봤으면 좋겠어요. 그 방식이 좀 남다를지라도 말입니다.

세 명의 박정훈들
 

채 상병 순직사건을 조사했던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대령)이 2월 21일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에서 열린 제5회 노회찬상 시상식에 참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저는 가끔 제 이름을 포털 사이트에 검색합니다. 매우 나르시시즘적인 행위인데요, 그래서 요즘 어떤 박정훈이 언론에, 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2024년의 박정훈'이, '윤석열 시대의 박정훈'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미약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는 것이지요. 최근에는 세 명의 박정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난해 가장 유명했던 박정훈은 단연 해병대 전 수사단장 박정훈 대령일 겁니다. 박정훈 대령은 채 상병 순직 관련 조사 자료를 경찰에 넘기지 말라는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의 지시를 어겼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군검찰은 박 대령을 '항명 및 상관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했고, 그는 보직이 박탈된 채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박 대령은 한 병사의 죽음에 대해 진상규명을 하고, 그 책임 역시 공명정대하게 묻고자 했습니다. 그 일에 대통령실과 국방부가 개입했다는 의혹이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얼마 전 그는 '제5회 노회찬상 특별상'을 수상한 뒤 "한 병사의 목숨의 가치는 지구의 무게만큼이나 무겁다.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채 상병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싸움을 멈추지 않겠다"(<한겨레> 보도)라고 말했습니다. '지구의 무게', 마음에 새기게 되는 멋진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모든 것을 건다'는 말에 씁쓸했습니다.

매일 아침 그는 '해병대사령부'로 출근하지만, 업무를 부여받지 못하고 별도의 건물에서 대기하고 있다고 합니다. 세상은 그를 윤석열 정권의 부당함에 저항한 참군인이라고 말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지만, 일상에는 공허함과 비참함이 깃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명의 또 다른 박정훈으로서, 그의 손을 꼭 잡아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더군요. "저도 박정훈입니다"라고 말하면 한 번쯤 빙긋 웃기도 하시겠네요.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와 4·16연대 등 293개 단체가 2월 22일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KBS는 10년 전의 일을 잊었는가, 세월호 참사를 정쟁으로 만들지 말라! 세월호 참사 10주기 다큐 불방 규탄 및 방영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복건우

 
채상병 죽음의 책임을 끝까지 묻겠다는 박정훈 대령을 보며, 또 한 명의 박정훈이 떠올랐습니다. 단원고 2학년 4반 박정훈. 세월호 희생자입니다. 살아있었다면 스물여덟이네요.

"정훈아" "박정훈" 모니터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불러봤습니다. 그리고 박정훈 학생이 17년 동안 어떤 삶을 살았을지도 떠올려봤습니다. 정훈님은 세월호 참사를 다룬 조현철 감독의 <너와 나>를 혹시 보셨는지요. 특별하지 않은, 친구와 투닥거리고 부모님과 밥 먹는 주인공들의 일상이 박정훈 학생과 겹쳐 보였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참사의 희생자들을 우리는 흔히 '숫자'로 부르잖아요. 1명, 2명, 10명, 100명 등으로요. 그런데 사실은 고유하고 유일했던 한 명 한 명의 세계가 저물었고, 감히 숫자로는 그 슬픔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요.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고, 기억하면서 '304개의 지구'를 누가 사라지게 했는지 묻고 또 반성하는 것이 세월호 10주기를 맞아 우리 사회가 할 일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좀 기이합니다. KBS 사측은 총선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서 '세월호 참사 10주기 다큐멘터리'에 대해 방영 연기를 결정하고 제작 중단을 통보했습니다. 저는 2학년 4반 박정훈이, 그리고 수많은 희생자들의 이름이 지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대체 저는 언제쯤 2학년 4반 박정훈 학생의 이름을 조금 덜 미안한 마음으로 부를 수 있게 될까요. 언제쯤이면 세월호 희생자 추모가 정치 논리와 무관한 일이 될 수 있을까요.
 

박정훈 국민의힘 송파갑 예비후보 ⓒ 네이버 인물정보

 
마지막으로, 또 한 명의 박정훈은 총선을 맞아 눈에 자주 띄는 분입니다. 박정훈 국민의힘 송파갑 예비후보입니다. 송파갑 현역인 김웅 국민의힘 의원이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하자, 국민의힘은 박 예비후보를 이 지역에 단수 공천했습니다. 그는 총선 출마 선언 직전까지 TV 조선(TV CHOSUN) 보도본부 시사제작국장으로 <박정훈의 정치다>라는 뉴스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언론계에 있다가 바로 정치권에 직행하는 이런 분들을 '폴리널리스트'(politician+ journalist)라고 합니다. '이해충돌'의 가능성이 있는 데다가, 언론인의 신뢰성·공정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폴리널리스트들의 행보는 꾸준히 문제시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요즘은 이들에 대한 비판마저도 사그라든듯합니다.

언론인은 선거에 출마할 경우 공직선거법상 선거일 90일 전(지역구 출마의 경우)까지 그 직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이는 언론인이 단순한 '사인'의 위치에 있지 않다는 점을, 나아가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특수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저는 박정훈 예비후보가 '불편부당'의 언론 윤리를 지켰던 언론인이었다고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가 출마를 선언하며 낸 책 <본질을 향한 여정>에 담긴 내용은 앵커 시절의 말과 기자 시절의 칼럼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글의 제목만 보더라도 그가 주로 야당을 비판해 왔음을 알 수 있었고요. 그 점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아 여당의 국회의원 후보가 된 것은 아닌지, 영 불편한 마음이 듭니다.

제아무리 박 예비후보가 그때는 맞는 이야기를 했다고 해도, 지금 와서는 '다른 의도'가 있지는 않았는지 의심받을 수밖에 없게 된 겁니다. 또 이러한 상황이 언론계 전반의 신뢰성 하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것이고요. 정훈님은 폴리널리스트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 궁금하네요.

당신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사실 '호명되지 않는' 박정훈들도 많습니다. '야', '어이', '너'부터 시작해서 '박씨' '아저씨', '○○아빠' 등등... 따뜻하게 이름을 불리는 일은 누군가에겐 흔치 않은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시구처럼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누군가와 관계를 맺기 위한 최소한의 행위일 겁니다. 이름을 부르고, 불리면서 비로소 우리는 아무렇게나 대체되는 '부속품'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의 존재를 증명받는 것이겠죠.

그런데 요즘은 '이름을 부르는' 분위기가 아닌 모양입니다. 양극화는 날이 갈수록 심화되는데 정치나 사회운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은 사라지고, '능력주의'는 더욱 강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대하기보다는 일단 살아남기 위해 '각자도생'을 택한다는 느낌입니다. 인터넷 공간은 서로가 서로의 추락을 바라는 것 같아 종종 섬뜩합니다. 타인의 처지에 공감하며, 같이 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고 말을 하는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무력감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아마 '노동조합'을 만들고 이끄는 정훈님도 비슷한 마음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박정훈이 박정훈에게'는 사실 정훈님뿐만 아니라, 세상의 수많은 박정훈들에게 전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저는 그들 한 명 한 명의 삶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깊이 상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감히 한 걸음 더 다가가고 싶어집니다. "정훈아 힘내라." "정훈아 별일 없지?" "박정훈씨, 잘살고 있어요?" 그렇게 당신의 이름을 크게 불러주면서, 손을 잡겠다고 말입니다.

첫 편지가 참으로 장황했습니다. '서러운 시대'에도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을 정훈님과 함께 고민해 보고자 이 연재를 시작했는데요. 너무 제 이야기만 한 것 같아서 쑥스럽네요. 혹시 정훈님을 요즘 화나게 하는 일은 무엇인지, 또 평소에 어떤 고민을 갖고 사는지가 궁금합니다.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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