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미유 위겔 게뷔르츠트라미너 클래식 2018 ‘파미유 위겔(Famille Hugel)’은 알자스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와이너리 중 하나다.
임승수
예전부터 이 와인 이름을 외우는 게 참 어려웠다. 화이트 와인인 게뷔르츠트라미너는 프랑스 알자스가 대표적인 산지다. 처음 만난 건 2020년 6월 12일이었다. 그때 마셨던 게뷔르츠트라미너는 제법 당도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향을 맡으면 풍선껌이 떠오르는데, 그 느낌이 총천연색 LED처럼 참으로 요란법석했다. 어린 두 딸이 돌아가며 향기를 맡고서는 젤리 과자 같다고 했을 정도다.
아쉽게도 이러한 특징이 내 취향과는 맞지 않아 그 후로 게뷔르츠트라미너를 마셨던 기억이 없다. 그런데 때마침 인공지능이 나한테 게뷔르츠트라미너를 덜컥 내민 것이다.
몇 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와인의 느낌을 되새겨보았다. 태국 음식이 대체로 향신료를 많이 사용하니 와인의 요란법석한 풍미와 제법 어울리지 않을까? 매콤한 아시아 음식이 대체로 살짝 당도가 있는 와인과 잘 어울리기도 하고. 하긴 그동안 선호하는 와인만 줄창 마셨는데, 이번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모험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망하면 뭐 인공지능 탓이라고 핑계 대면 되잖아.
일단 2020년의 그 와인 말고 다른 와이너리의 게뷔르츠트라미너를 시도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개인적으로 알자스의 와이너리 중에서 '파미유 위겔(Famille Hugel)'에 상당히 호감을 갖고 있다.
알자스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와이너리 중 하나인 데다가 여기서 만든 리슬링을 마시고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취향 저격을 당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 파미유 위겔의 게뷔르츠트라미너를 선택한다면 설사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후회는 없을 거야.
그렇게 '파미유 위겔 게뷔르츠트라미너 클래식 2018'를 구입하고 태국음식점에 갈 적절한 시기를 가늠하는데, 마침 초등학생 둘째가 피아노 콩쿠르에 참가하는 일요일이 눈에 들어왔다.
오전에 건국대학교 새천년관에서 콩쿠르 참가하고 바로 영등포 타임스퀘어에 있는 유명한 태국음식점으로 가서 거나하게 낮술을 하면 되겠구먼. 전화로 문의하니 콜키지 비용을 지불하면 와인을 가져올 수 있다고 한다. 좋았어!
끝내주게 어우러지는 맛
당일 아침이 됐다. 여전히 쌀쌀한지라 콩쿠르 참가하는 딸아이의 양손에 핫팩을 쥐여주었다. 살짝 미스 터치가 있었지만 안정적인 템포로 차분하게 연주를 마친 딸아이를 한껏 칭찬해 준 후 '진정한' 목적지인 태국음식점으로 이동했다. 텃만쿵, 푸팟퐁 커리, 나시고랭, 왕새우 팟타이가 포함된 세트 메뉴를 주문하고서는 가져온 와인의 코르크를 제거하고 잔에 따랐다.
윤슬이 보일 듯 반짝이는 투명한 연노랑 액체가 잔 속에서 일렁인다. 요란한 풍선껌 향을 예측하며 코를 대고 숨을 들이켜는데, 예상 밖으로 기품 있고 차분한 향기가 감지된다. 감귤 느낌의 신선한 과실 향에 은은한 연기 향이 피어오르는데 예전에 마시고 감탄했던 파미유 위겔의 리슬링이 슬며시 떠오른다. 역시 재배 방식과 양조방식에 따라 같은 품종이어도 스타일이 확연히 달라질 수 있음을 절감한다.
나는 왜 이렇게 연기 향을 좋아할까. 어린 시절 나뭇가지, 낙엽, 종이 등을 모아놓고 성냥으로 불을 붙여 친구들과 요란법석을 떨던 일이 문득 떠오른다. 그때 시커먼 그을음과 함께 매캐하게 올라오던 몽글몽글한 연기가 아련하다. 한 모금 머금으니 적당히 떫은 타닌과 연기 뉘앙스가 지속되는 가운데 은은한 단맛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다. 이거 기대 이상인 걸?

▲푸팟퐁 커리와 게뷔르츠트라미너 커리 특유의 향신료 향이 게뷔르츠트라미너의 개성 있는 타닌, 매캐한 연기 향, 은은한 단맛과 끝내주게 어우러진다.
임승수
와인과 만나 침이 가득 고인 구강이 어서 빨리 음식을 투척하라고 재촉한다. 마침 와인과 비슷한 색을 띤 푸팟퐁 커리가 눈앞에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다. 바삭바삭 아삭아삭 튀겨진 작은 게를 집어 들어서 연노랑 커리에 푹 담가 웅덩이 물처럼 고여 있는 침 위에 덩그러니 올려놓았다.
질감이 어떨지 궁금해 마음껏 씹어보았는데, 와우! 겉바속촉과는 정반대인 겉촉속바의 진수를 보여준다. 구강 내 상피세포가 하나도 손상되지 않을 수준의 부드러운 튀김옷 안에는 치아가 약한 어린 아이도 무리 없이 씹어댈 수준의 앙증맞은 바삭함이 숨어 있다.
커리 특유의 향신료 향이 게뷔르츠트라미너의 개성 있는 타닌, 매캐한 연기 향, 은은한 단맛과 끝내주게 어우러진다. 조속한 시일 안에 같은 와인을 들고 와서 똑같은 음식과 재차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옆에서 한참 식탐에 빠져있던 아내도 상당히 만족한 얼굴로 말을 건넨다.
"와인 정말 괜찮은데?"
"그렇네. 예전에 향이 요란했던 그 와인과는 또 다르네."
"샐러드처럼 단순한 음식보다는 양념이 강한 음식과 잘 어울리겠어."
"맞아. 푸팟퐁 커리랑 아주 제대로야."
많이 마시지 않았는데도 제법 취기가 오른다. 알코올 도수를 확인했더니 13.5%다. 이런 종류의 화이트 와인은 대체로 12% 정도인데 다소 높구나. 2018년에 알자스 날씨가 무더웠나? 빈티지 차트를 검색해서 알자스 기후 관련 내용을 살펴보니 역시 폭염이 왔다고 한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어질어질할까? 아하! 알코올 폭염 때문이구나. 그날 일찍 귀가해 온 가족이 대낮부터 꿀잠을 잔 것은 안 비밀.
멋진 와인에다가 맛난 음식을 곁들일 때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건만 그 황홀한 순간을 글로 표현하는 일은 비타협적 마감 시간과 함께 나의 어깨를 짓누른다. 도대체 글 팔아서 얼마나 나온다고 이 고생인지. 혹시 딸들이 작가 한다고 하면 나부터 나서서 말려야겠다. 한참을 투덜대며 글을 쓰는데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피아노 학원을 마친 둘째가 성큼 들어오더니 가방에서 상장, 트로피, 상금을 꺼내서 보여준다.
"아빠, 나 콩쿠르 대상 탔어."
"이야! 축하해!"
봉투에 든 상금 십만 원을 얼른 지갑에 옮겨 담았다. 장하구나. 내 딸아! 아빠가 열심히 글 써서 피아노 학원 계속 보내줄게.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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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팟퐁 커리에는 이 와인... "한 병 더"를 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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