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님 K의 수고로 집 옆이 깔끔해졌다.
남희한
형님 H의 진두지휘 아래 오전 작업을 마친 우리는 둘러앉아 아내가 내온 점심을 함께 먹었다. 메인은 돼지고기를 잔뜩 넣은 김치찌개. 이런 자리에 반주가 빠질 수 없다. 각 일병을 위한 소주 두 병과 무알콜 맥주 하나가 자리했다. 무알콜 맥주에 인상을 찌푸리는 두 형님을 못 본체하며 꿀꺽. 감기 기운이 있음에도 일하느라 몸에 제법 열이 났는지 기분 좋게 시원했다.
시장이 반찬이라더니 몸을 쓰고 나니 모든 게 맛있었다. 음식이 맛있다고 칭찬하며 허겁지겁 밥을 반쯤 먹었을 때, 형님들이 본격적으로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시작했다. 강원도 사투리로 오가는 대화. 그냥 하는 말들이 뭐가 이렇게 정겨운지.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근래 있었던 일까지 즐거운 대화가 이어졌다.
"그때 이 형이랑 친구 하나하고, 세 명이서 다 같이 해병대가기로 했드랬어. 그런데 엄마가 절대 안 된다고 반대하는 바람에 못 갔잖어. 쩝."
무척이나 아쉬워하는 형님 H의 말에 형님 K도 덩달아 아쉬워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랬었지. 그래가지고~ 덕분에 나 혼자 갔잖어, 해병대. 정신 차리고 보니 거기서 나 혼자 욕먹고 있더라고."
네? 다같이 안 간 게 아니고요? 같이 가기로 했던 다른 친구도 집에서 반대해서 못 갔다고 말하며 멋쩍어하는 형님 H와 허탈하게 웃고 있는 형님 K. 같이 가기로 한 군대를, 그것도 해병대를 결국 혼자 다녀왔다니. 갑자기 묘한 포인트에서 웃음이 터져 한참을 깔깔거렸다. 내심 억울했겠다 싶은 생각이 드는데 형님 K가 말했다.
"그래도 얻은 게 많아. 덕분에 웬만한 일엔 놀라지도 않어. 꿈쩍도 안하지."
아무렇지 않게 툭 뱉어내는 말에 다시 한번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배를 잡고 웃는 와중에도 통찰이 그득하게 담긴 멘트에 심히 공감했다.
그 황당했을 순간을 삶의 거름으로 삼았다는 형님 K는 서글서글한 모습과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과거 잘 나가던 한 때, 갑자기 건강이 나빠져 시골로 돌아왔지만 형님 K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럴 수 있는 것'을 지나 '그 덕분에 얻은 것'도 있음을 거듭 되뇌었다.
"그 덕분에 내가 얻은 게 많지."
형님은 말하는 중간중간 "그럼, 즐겁게 살아야지.", "괜찮아. 즐기면 돼~"라며 괜찮지 않은 일을 괜찮은 일로 만들어버리곤 했다. 그 혼잣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본받고 싶은 자세였다.
긍정코드를 온몸에 휘감고 있는 형님 K 덕분에 장모님 집은 몰라보게 예뻐졌고, 덕분에 내 마음도 조금이나마 예뻐졌다. 요즘 일이 없는 '덕분에' 주말에 즉흥적으로 거제도로 낚시하러 가기로 했다고 하셨는데, 부디 월척을 낚으셨길 바란다.
가족이 많은 덕분에, 직장인인 덕분에

▲ 페인트칠이 끝난 벽과 맞은 편에 아이들이 그린 그림
남희한
우리 집은 외벌이에 아이가 넷이다. 본디 계획은 셋이었으나, 계획성 없는 아내와 내가 함께 사고를 쳤다. 다시 생각하면 셋을 가진다는 발상 자체가 참으로 치기 어렸다고 볼 수 있으나, 그 덕분에 삶에 긴장감이 한가득이다. 지루할 틈이 없다.
더 나은 생활을 바라지만, 당장 바꿀 수 없는 현실 덕분에 자기합리화 능력이 제법 출중해졌다. 나름 안분지족의 자세를 갖추게 된 것인데, 그 덕분에 가끔 휘청거리기는 해도 무릎 꿇는 일은 없다.
안 그래도 사교육에 대한 경계심이 있었는데 아이가 넷이다보니 x4를 해야 하는 상황 '덕분에' 큰 고민 없이 교육관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것(?)은 생각하지 못한 큰 수확이다.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철마다 격주로 병원에서 링거를 달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제발 아프지만 말고 건강히 커라'는 양육관이 저절로 생겨났다.
요즘엔 우아한 자세를 유지하며 물밑으론 필사적으로 발을 젓는 오리의 태연한 근면성을 연습하고 있다. 아니라고 해도 대가족인 덕분엔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어 게으른 천성을 꾸역꾸역 이겨내고 있는 중이다. 자유롭지 못한 직장인인 덕분에 천성을 이겨내고 있어 직장을 구속이 아닌 시스템으로 탈바꿈시켰다.
'덕분에' 한 단어 덕분에 모든 상황이 다행으로 보인다. 모든 것이 "덕분"이면 나쁠 것이 없을 것만 같다. 그런데 진짜 그렇다. 덕분이면 아무리 최악인 상황도 순식간에 반전되고 만다. 사람만이 발휘할 수 있는 신묘한 능력이다.
"덕분에 엄마 집이 훤해졌어. 수고했어. 고마워."
"아닙니다. 덕분에 형님들 얼굴도 보고 좋았습니다."
"팔 아픈 건 괜찮아?"
"아뇨, 그래도 덕분에 전완근이 약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날의 통증 '덕분에' 요즘 출퇴근 길 내 주머니엔 악력기가 들어 있다. 와, 내 악력이 이렇게 약할 수가 있나, 겨울인데 땀이 다 나다니 싶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요즘은 출퇴근길이 지루하지 않고 따뜻해졌다. 이 글도 '덕분에'가 20번 쓰였으니 덕분에 덕분이다. 뭐가 됐든, 덕분이고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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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나는 글렀지만 넌 또 모르잖아"라는 생각으로 내일의 나에게 글을 남깁니다.
풍족하지 않아도 우아하게 살아가 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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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덕분에... 별 말 아닌데 상황을 바꾸는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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