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모임에서 함께 읽는 <작별하지 않는다>. 오른쪽은 큰글자도서.
김규영
한강 작가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한없이 가벼워 보이지만 실은 더없이 무거운 눈을 맞으며 시작한다. 함박눈이 우리를 고요한 침묵과 바다의 밑바닥 같은 어둠 속으로 끌고 내려간다. 답답한 우울감에 빠져들게 되니, <제주도우다>나 한강의 전작 <소년이 온다>보다 읽기가 더 힘들다.
소설 속 경하는 한강 작가처럼 1980년 광주의 참상을 쓴 작가다. 먹을 입힌 통나무 수백 개가 세워진 산에 바닷물이 들이치는 꿈을 꾸며 죽음의 경계에서 서성이던 어느 날, 오래된 친구 인선의 부탁으로 급하게 제주로 향한다. 손가락 절단 사고로 긴급히 서울로 호송된 인선이 집에 두고 온 새가 며칠 동안 물도 먹이도 없이 지낼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허벅지까지 쌓인 눈을 뚫고 중산간에 위치한 인선의 목공방에 가는 경하의 모습을 두고 잠시 우리 사이에 토론이 벌어진다. 최소한의 장비도 없이 길을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자기 새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가야 했는가? 무리한 설정이 아닌가? 마침내 도착했으나 핸드폰도 잃어버리고 단전, 단수로 고립된 경하에게 '서울에 있는' 인선이 와서 대화를 나누니 책모임 동료들은 당황한다.
하지만 꿈인지 현실인지, 경하가 죽은 것인지 인선이 죽은 것인지, 둘 다 죽은 것인지 둘 다 살아 있는 것인지, 문학에선 단정 짓지 않아도 된다. 문학 속에서 우리는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지금 내리는 눈은 그때 내렸던 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읽을수록 무겁게 가라앉지만... 결국 희망 말하는 이유
죽음의 참상을 활자로 목격하고 사진으로 읽은 작가들은 자신의 숨을 깎아 먹으며 기록한다. 증언이 소멸하지 않도록 제 몸을 전달의 도구로 쓴다.
광주를 기록하던 경하와 베트남전을 기록하던 인선은 과거를 돌아본 제 몸이 돌처럼 굳어가는 것을 알았다. 미래로 달려가지 않고 과거로 향한 벌이며,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참상을 여전히 껴안아 생긴 죄책감 탓이다. 기록자 자신의 삶은 어느새 과거와 죽음에 묶여있었다.
책모임 동료들은 기록자인 현기영 작가와 한강 작가의 안부를 염려했다. 밥은 잘 먹고 있는지, 잠은 잘 자고 있는지를. <제주도우다>의 기록을 그저 허구의 소설일 뿐이라고 치부하고 잊어버리고 싶을 만큼, 도저히 편한 자세로 읽을 수 없었던 <작별하지 않는다>의 처절함을 덮어버리고 싶을 만큼... 고작 책 두 권인데도 평안히 읽기 힘들어했던 우리는, 이를 기록해낸 기록자들의 삶을 걱정했다.
그러나 중산간 흰 어둠 속에서 죽어간 제주도민 같았던 새가 있었다. 경하와 인선은 작은 생명 하나를 매개로 서로가 있음을 기억했듯이 우리는 소설을 통해 작가를 만났다. 기록이 전하는 고통과 공포가 무섭고 힘들더라도, 피하지 않고 끝까지 읽어내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외면하지 않고 희생자의 단말마를, 생존자의 증언을, 기록자의 전달을 이어받는다.
과거의 우리가 저지른 참상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사회에도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지난 일이라고 모른 척하는 것은 곪은 부위가 썩어가게 만들 뿐이다.
현기영 작가는 희망을, 한강 작가는 사랑을 말한다. 이렇게 읽기 힘든 책이 그럼에도 희망과 사랑을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즉 독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끝까지 읽고,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기억하며 사회를 읽어내고 버텨내는 독자들의 연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