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본문듣기

단종은 왜 비운의 소년군주가 되어야 했나

[리뷰]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24.04.04 15:22최종업데이트24.04.04 15:22
원고료로 응원
단종(端宗) 이홍위(李弘暐, 1441-1457)는 조선의 6대 국왕으로, 불과 12살에 즉위하여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숙부 세조의 쿠데타로 왕위를 빼앗기고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해야했던 비운의 소년 군주다. 날때부터 왕이 될 운명을 지고 태어났고 조선 역사상 손꼽힐만큼 누구보다 완벽한 정통성을 물려받았음에도, 정작 가장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해야 했던 단종의 아이러니한 인생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며 동정과 연민을 자아냈다.

조선 역사상 가장 비극적 임금이었던 단종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관련 이미지. ⓒ tvN

 
4월 3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102회에서는 '단종은 정말 삼촌 세조에게 죽음을 당했나'편을 통하여 조선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임금이었던 단종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단종은 조선 건국 이래 유례없었던 '역대급 정통성을 지닌 왕'으로 평가받는다. 단종 이전의 조선 국왕들을 살펴보면 태조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했고, 그 아들 태종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복형제들을 제거하고 잠시 형 정종을 거쳐 왕위에 올랐다. 태종의 아들 세종 역시 맏아들이었던 양녕대군을 제치고 뒤늦게 세자가 됐다.
 
유학의 나라였던 조선에서는 적장자 상속(嫡長子 相續)을 중시했고, 왕의 정통성이란 곧 강력한 왕권의 기반이 됐다. 세종의 아들 문종과 손자인 단종은 모두 외아들이었다. 이들은 조선 역사상 적장자와 적장손으로 2대에 걸쳐 왕위를 계승한 최초의 사례였다. 후대의 조선 국왕들까지 아울러도 단종만큼 탄탄한 정통성을 지닌 인물은 손에 꼽을 정도다.
 
하지만 단종의 불운은 그를 지켜줄 수 있는 왕실의 보호막 부재에서 시작됐다. 1450년 할아버지 세종이 사망하고 불과 2년뒤에는 아버지 문종마저 36세의 젊은 나이에 일찍 요절하면서며 12세의 아들 단종이 왕위를 물려받아야 했다.
 
조선의 정치제도상, 군주의 나이가 어린 경우에는 모계인 대비들이 후견인인 섭정 역할을 맡아서 임시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하지만 단종의 경우에는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문종의 정비)가 바로 단종을 낳고 하루만에 산후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할머니 소헌왕후마저 일찍 세상을 떠난 뒤라 단종을 보호해줄만한 권위있는 왕실의 어른이 전무한 상태였다. 오늘날로 치면 초등학생의 아이가 부모와 조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가 된 격이었다.
 
1452년 5월 18일, 단종은 문종이 세상을 떠나고 불과 5일만에 왕위에 올랐다. 조선 역사상 최초로 10대에 왕위에 오른 군주다. 문종은 세상을 떠나기 전, 의지할 곳이 없는 아들을 걱정하여 고명대신(顧命大臣, 군주의 퇴임이나 임종시 마지막 당부 및 유언을 받드는 대신)들을 지정하여 황보인, 김종서, 정분 등에게 "내 아들을 잘 보살펴주게"라는 유언을 남기고 단종의 보호를 맡겼다.
 
고명대신중에서도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단연 김종서(金宗瑞, 1383-1453)였다. 그는 태종 시대부터 단종까지 총 4명의 임금을 섬겼고, 특히 세종 시절에는 북방에서 4군 6진을 개척하는데 앞장서며 큰 공을 세운 문무겸비의 명신이었다. 단종 역시 김종서를 좋아했고 갑작스럽게 왕위를 물려받은 상황에서 불안한 어린 군주에게 선왕의 충신이었던 김종서는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어른이었다.
 
단종은 즉위 초기에는 국정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대신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으로 황표정사(黃票政事)는 국왕에게 인사를 요청하는 문서를 올릴때 김종서와 대신들이 미리 낙점한 인물의 이름에 표식(황표)를 붙여놓음으로서 사실상 왕은 도장만 찍도록 만든 제도다.

이는 선왕 문종이 어린 단종의 경험 부족을 걱정하여 임시로 만든 제도였다. 하지만 이는 당연히 조선의 통치구조상 명분에 어긋나는 기형적인 제도였고, 신하가 군주를 허수아비로 만들어서 사실상 왕권을 휘두른다는 프레임에 휘말리기 쉬운 불안정한 체제였다.

하지만 단종은 세간의 이미지처럼 마냥 어리고 유약한 임금만은 결코 아니었다. 단종은 세손-세자 시절을 거치며 정식으로 후계자 수업을 받았고 일찍부터 왕이 될 운명을 체화해온 인물이었다.
 
단종은 즉위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궁궐내에 있는 불당을 허물자는 신하들의 요구에 "상왕(세종)이 설치하신 것이니 폐지할수 없다"며 단호하게 일축하기도 했다. 학계에서는 단종이 몇 년만 더 왕위를 이어가서 성인이 되었더라면 평균 이상의 업적을 쌓은 군주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시간은 단종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하필 단종에게는 왕위를 노리는 야심만만한 숙부가 있었다는 것이 비극이었다. 수양대군(훗날의 세조)는 세종의 차남으로 정치적 야심이 큰 인물이었다.
 
문종 사후 수양대군은 왕실 종친을 대표하는 위치에 올랐고, 단종의 즉위를 명나라 황실에 알리는 고명사은사(誥命謝恩使) 역할을 자청하며 왕실과 조정에서 자신의 권위를 확보했다. 또한 수양대군은 아직 문종의 삼년상을 치르고 있던 단종에게 국혼을 제안하며 배우자를 맞이할 것을 청하기도 했다.
 
이때만 해도 수양대군은 겉으로는 종친으로서 누구보다 조카 단종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보필하는 역할에 충실한 것처럼 보였다. 단종도 수양대군의 야심을 어렴풋이 눈치채고는 있었지만, 항상 자신을 위하여 앞장서는 숙부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한동안 경계심을 풀었다.
 
1453년 10월 10일, 단종의 운명과 조선의 역사를 바꾸게 되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이 발발한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낸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고명대신 김종서, 황보인 등을 암살하고 권력을 장악한 것. 궁궐로 쳐들어온 수양대군은 단종에게 오히려 신하들이 모반을 일으켰다고 주장하고 왕명을 인증하는 명패를 요구했다. 하루아침에 믿고 의지하던 신하들을 모두 잃은 단종은 "숙부, 저 좀 살려주세요"라고 두려움에 떨며 수양대군의 요구를 모두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계유정난으로부터 3개월이 지난 1454년 1월, 수양대군은 다시 단종을 찾아 국혼을 요청한다. 이번에는 제안이 아닌 강요였다. 수양대군은 단종의 허가 없이 왕비 간택령을 내렸고, 단종은 결혼조차도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수양대군의 행동은, 국혼을 차라리 자신이 직접 주도하여 외부로는 자신이 '단종의 보호자'라는 정치적 상징성을 내세우고, 한편으로는 훗날 단종의 지지기반이 될 수도 있는 외척세력의 출현을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렇게 단종의 정비로 간택된 것은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였다. 그녀의 부친 송현수는 바로 수양대군의 어린 시절 친구였다. 이미 본인이 왕위를 노리고 있으면서도 비극적인 운명이 예정된 단종의 왕비로 굳이 친구의 딸을 선택했다는 것은, 권력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수양대군의 비정한 면모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강요에 의한 결혼이기는 했지만 의외로 단종과 정순왕후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가까운 부모와 신하들을 잃고 외롭게 지내던 단종에게 처음 생긴 아내의 존재는, 서로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의지할수 있는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수양대군이 왕위를 노린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기 시작한다. 이에 단종은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수양대군에 관한 포고문을 발표한다. 그런더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의미심장하다. 겉으로는 숙부 수양대군의 충성과 공훈을 칭찬하며 외부에서 이간질을 하지말라고 경고하는 내용이었지만, 눈에 띄는 부분은 중국의 고사에서 주공(周公)의 일화를 언급하여 수양대군과 비교한 대목이다.
 
주공은 주나라 문왕의 동생이자 성왕의 숙부로, 어린 성왕이 즉위하자 섭정을 맡아 잘 보필했고 조카가 장성하자 스스로 권력을 내놓고 물러난 인물이다. 단종이 수양대군을 주공에 비유하며 칭찬한 것은, 곧 수양대군에게 왕위까지는 탐하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하지만 냉혹한 현실은 이미 단종의 의지만으로는 되돌릴수 없는 흐름이었다. 수양대군은 이번엔은 종친중 근왕파이던 동생 금성대군, 단종을 친아들처럼 키워준 혜빈 양씨, 단종의 매부 정종 등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혐의를 씌워서 한꺼번에 제거하려고 했다. 압박에 시달리던 단종은 측근들의 숙청을 막기 위하여 결국 숙부 수양대군에게 선위하고 물러나겠다고 선언한다.
 
마침내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조선 7대 국왕 세조(世祖)다. 단종은 상왕이 되어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겨 조용히 지냈다. 하지만 세조는 단종과의 약속을 어기고 단종의 측근들을 모조리 유배시키는 정치보복을 가했다. 그럼에도 세조는 겉으로는 단종을 상왕으로 예우하며 수시로 연회를 베풀고 조카를 챙기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단종으로서는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었을 것이다.

단종 운명에 치명타 날린 사건들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관련 이미지. ⓒ tvN

 
위태롭게 지탱하던 단종의 운명에 치명타를 날리는 사건들이 연이어 터진다. 1456년 6월,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응부, 유성원 등 여섯 신하가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 복위를 도모하려던 역 쿠데타가 발각돼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체포된 후 심문을 받은 성삼문이 "창덕궁의 상왕(단종)께서 대도자(大刀子)를 내려주셨다"면서 단종도 이미 복위계획을 사전에 알고 동의했다고 자백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단종이 역쿠데타를 사주했다'는 주장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고 평가한다. 역모사건을 빌미로 단종까지 제거하려던 세조 세력의 조작이거나 모진 고문 끝에 나온 거짓 자백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철저히 정권의 입장에서 쓰여진 <세조실록>의 기록들은 그 진위가 의심가는 내용들이 많다는 평가다.
 
또한 1년뒤에는 세조의 친구이자 단종의 장인이던 송현수가 지방수령이던 권완과 결탁하여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체포된다. 즉시 조사를 명령한 세조는, 단종에게 역모에 가담한 정황이 있다는 죄목을 씌워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시키고 영월로 유배를 보냈다.
 
단종은 유배지로 떠나며 사랑하던 아내 정순왕후와도 강제로 헤어져 생이별을 해야했다. 떠나는 단종을 정순왕후가 배웅하며 두 부부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장소였던 다리에는 훗날 영도교(永尾橋, 영원히 건널 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이름처럼 부부는 이 다리를 건너는 순간을 마지막으로, 안타깝게도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하루아침에 국모의 자리에서 쫓겨난 궁핍한 생활을 해야했던 정순왕후는 생계를 위하여 옷을 염색하는 일까지 해야했다. 정순왕후가 염료로 옷에 물을 들이느라 자주색이 되었던 샘물은 훗날 자주동천(紫芝洞泉)으로 불리기도 했다. 동네의 아낙들은 정순왕후의 처지를 불쌍하게 여겨서 몰래 음식을 놓고가거나, 정순왕후만을 위한 여인시장을 따로 만들기도 했다.
 
한편 단종은 강원 영월의 청령포(淸泠浦))에 유배되었다. 이곳은 지형상 강과 산으로 막혀 외부로 탈출가는 것이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고립된 단종은 소나무 하나를 벗삼아 나무기둥에 앉아서 아내와 가족들을 그리며 혼잣말을 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단종이 유일한 벗이 되어준 소나무는, 단종의 오열하는 소리를 들은 나무라는 의미에서 관음송(觀音松)으로 불리게 된다.
 
유배 두달만에 홍수가 발생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기면서 단종은 영월 관아에 있는 관풍헌(觀風軒)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단종은 이 시기에 자전적인 심경을 담은 자규시(子規詩)를 지었는데 '나는 한 마리 궁궐을 쫓겨난 원통한 새, 네가 슬피 울어 듣는 나도 괴롭구나, 네가 울지 않으면 내 시름도 없으련만, 보시오 세상 근심 많은 이들이여, 부디 춘삼월엔 두견이 우는 누대에 오르지 말게나'라며 구슬피 우는 소쩍새의 울음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한 대목이 듣는 이들의 심금을 올린다.
 
1457년 11월 16일(세조 3년), 단종은 유배지인 영월에서 끝내 숨을 거두며 한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공식적으로 <세조실록>에는 측근인 숙부 금성대군과 장인 송현수가 역모 혐의로 사형이 확정되자, 단종은 영월에서 이 소식을 듣고 자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훗날에는 같은 조선왕조실록 임에도 이와 모순되는 기록들이 연어어 등장한다. 후대의 <선조실록>에는 '(단종이 있는) 영월에 (세조가) 사약을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숙종실록>에는 '하인이 단종을 죽였다'는 기록까지 등장한다. 세조의 명을 받고 온 금부도사가 차마 단종을 죽일 수 없어서 머뭇거리자, 하인이 대신 나서서 단종에게 사약을 먹여서 죽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야사인 <연려실기술>에는 단종을 모시던 시종 하나가 단종의 부탁으로 고통을 줄여주기 위하여 끈으로 목졸라 죽였다는 충격적인 기록도 나온다. 정확한 진실은 미스터리로 남아있으나, 오늘날 학계에서는 사실상 단종이 '타살'되었으며 그 배후가 세조의 의지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로 굳어졌다.
 
정순왕후는 남편 단종의 사후에도 60년 가까이 삶을 이어갔고, 중종 16년인 1521년, 81세의 나이까지 장수했다. 정순왕후는 현재 청룡사 자리인 정업원(淨業院, 현재의 청룡사)에서 같이 지냈는데, 매일 조석으로 산에 올라 동쪽 영월을 바라보며 단종을 그리워하며 명복을 빌었기에 동망봉(東望峯)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처럼 단종의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소문과 일화들이 후대까지 계속된 이유는, 그만큼 시대를 막론하고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어린 왕에 대한 동정여론이 컸기 때문이었다. 숙종 시대에 이르러서야 단종과 사육신이 정식으로 복권되면서 사후에나마 왕으로서의 명예를 회복한다.

또한 오늘날 단종 부부가 영원히 헤어져야했던 영도교가 있는 종로구에서는 매년 두 사람의 이별을 기리는 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어쩌면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어린 왕의 한을 어떻게든 달래주고 싶었던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염원이 모여서 이루어진 결실은 아니었을까.
벌거벗은한국사 단종 정순왕후송씨 세조 계유정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