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중일기> 임진년(1592) 1월 14일자 일기(빨간 네모 안). "出東軒公事後射帿(출동헌공사후사후: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활을 쏘았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한국고전종합DB
얼핏 '생각보다 활을 자주 쏘지는 않았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출동 기간에는 일기를 거의 쓰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누락된 날짜에도 습사를 진행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전투와 공무 등으로 정신없이 바빴을 장군의 일과를 생각하면, 거꾸로 그 바쁜 와중에도 습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순신은 보통 한 번에 10순(50발) 정도 활을 쏘았다. 그러나 습사량은 그때그때 달랐다. 적게는 3순(15발)을 쏜 적도 있고 많게는 30순(150발)까지도 습사를 한 기록이 보인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시기에는 활쏘기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몸의 컨디션에 따라 습사량도 천차만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하루에 30순까지 쐈다는 기록은 놀랍다. 보통 건장한 성인 남성도 8~9순 내외로 습사를 하고 나면, 아무리 쉬엄쉬엄 쏜다고 해도 슬슬 팔힘도 빠지고 집중력도 떨어져서 시수를 유지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깨 등에 무리가 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30순이라니. 더군다나 조선시대 장수들이 썼던 군용 활은 지금 현대인들이 쓰는 취미용 활과 달리 장력이 훨씬 센 강궁이었다고 하니, 이순신 장군은 체력도 범상치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억기의 활쏘기, 형편없어 우습다"... 자신감 있던 이순신
이순신의 활 솜씨는 어땠을까.
임진년(1592년) 3월 28일자 일기에 "활 10순을 쏘았는데 5순은 모조리 맞고, 2순은 네 번 맞고, 3순은 세 번 맞았다"(射帿十廵, 則五廵連中, 二廵四中, 三廵三中)는 기록이 있어 그의 활 솜씨를 짐작해볼 수 있다.
1순에 5발, 요컨대 이순신은 50발 중 42발을 맞힌 셈이니 신궁(神弓)으로 역사에 기록된 태조 이성계나 정조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어도, 명궁(名弓)이라 불려도 손색 없을 솜씨를 갖추고 있었다.
이순신은 자신의 활 솜씨에 자부심도 있었던 것 같다. 평소 동료 장수들과 습사를 즐겼던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습사 후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활을 쏘았다. 그의 모양이 형편없으니 우습다."(與右水伯射帿, 不成模樣, 可笑) - 계사년(1593) 3월 17일
이억기 역시 무과급제자 출신으로 이순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수군 최고지휘관이었다. 전장에서 밥 먹듯이 활을 쐈을 이억기의 활쏘기를 형편 없다고 비웃을 정도라면 이순신의 활 솜씨는 당대 장수들과 견줘서도 상당히 출중했음을 짐작케 한다.
재밌는 것은 경상우수사 원균에 대한 기록이다.
"경상수사(원균)가 활 쏘는 군관들을 거느리고 우수사(이억기)가 있는 곳에 갔다가 크게 지고 돌아갔다고 한다."(慶尙水伯, 領射官到右水伯處, 大負而歸云) - 갑오년(1594년) 6월 14일
앞서 이순신은 이억기의 활 솜씨가 형편없다고 비웃었는데, 원균은 그 이억기에게조차 지고 돌아왔으니 얼마나 솜씨가 형편 없었던 걸까. 이를 뒷받침하는 이순신과 원균의 '습사 대결'이 3개월 뒤에 벌어진다.
"활쏘기를 하였는데 원 수사가 9분(점)을 지고 술에 취해서 갔다." (射帿元負九分, 乘醉而去) - 갑오년(1594년) 9월 4일
요컨대 이순신은 조선수군 연합함대를 구성하고 있던 전라좌수영·전라우수영·경상우수영의 지휘관들 중 가장 활 솜씨가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그의 활 솜씨는 <난중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시피, 전란 중에도 쉼 없이 습사를 하며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덕분일 것이다.

▲ 한산도 제승당에 위치한 활터 '한산정(閑山亭)'. 한산정이라는 이름은 후대에 붙인 것이라 한다.
김경준
조선수군을 이끈 리더십의 원천, 활쏘기
활쏘기에 진심이었던 이순신은, 자식들의 활쏘기도 직접 지도했단다. <난중일기> 병신년(1596) 8월 21일자 일기에는 "식후 활터에 가서 아들들에게 활 쏘는 연습을 시키고 말 달리며 활 쏘는 것도 시켰다"(食後, 坐射亭, 令豚輩射習, 且馳射)는 기록이 등장한다.
군의 지휘관으로서 당연히 휘하 장졸들에게도 습사를 독려했다. 이순신은 장졸들을 대상으로 한산도 활터에서 편사(활쏘기 대결)를 열곤 했는데, 내기에 진 편이 술과 떡을 준비하여 모두가 배불리 먹었다고 한다.
군사들로 하여금 활쏘기를 지루하고 괴로운 훈련이 아니라, 흥미와 사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유희로 인식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순신의 탁월한 리더십을 엿볼 수 있다.

▲ 한산도 제승당 '한산정(閑山亭)' 사대에서 바라본 과녁. 이순신 장군이 부하들과 함께 활쏘기를 연마하던 곳이라 전해진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145m 건너편에 과녁이 세워져 있는데, 밀물과 썰물의 차이를 이용해 해전에 필요한 실전 적응 훈련을 하기 위해 일부러 이렇게 조성했다는 설이 있다.
김경준
적극적인 활쏘기 훈련 덕분에 다른 부대들과의 편사가 열리면 이순신 휘하의 장수들이 이겼다는 기록이 종종 등장한다. "명장 밑에 약졸 없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최고지휘관이 활을 잘 쏘니 부하들도 자연히 분발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이순신의 뛰어난 활 솜씨는 부하들을 이끄는 강력한 리더십의 원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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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空港亭)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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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발 중 42발, 이순신의 놀라운 활쏘기 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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