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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같은 사이였는데... 이성계는 왜 최영을 배신해야 했나

[TV 리뷰]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

24.04.25 11:29최종업데이트24.04.25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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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최영(崔瑩)과 이성계(李成桂)는 한국사에서 여말선초(麗末鮮初)의 격동기를 이야기하는 데 모두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고려말 신흥무인세력의 중심으로 한때는 함께 고려를 여러 번 지켜냈던 구국의 명장이자 정치적 동지였던 두 사람은,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기점으로 엇갈린 운명을 마주하게 된다. 

한 사람은 끝까지 고려의 마지막 충신으로 남았고, 한 사람은 그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조선왕조를 건국한 창업군주가 됐다. 한때 누구보다 끈끈했던 두 사람은 왜 악연이 되어 갈라서야만 했으며, 이성계는 왜 최영을 끝내 자신의 손으로 처단할 수밖에 없었을까.

4월 24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한국사> 105회에서는 '위화도 회군, 조선 건국전 극한대립, 이성계는 왜 고려의 영웅 최영을 죽였나'편을 통하여 여말선초의 혼란기를 둘러싸고 전우에서 숙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성계와 최영, 두 사람의 악연을 조명했다.

최영은 1316년 아버지 최원직과 어머니 봉산 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최영의 가문은 동주 최씨(철원 최씨)로 고려의 개국공신이자 대대적 고위직 문신을 배출한 명문 귀족 가문이었다. 흔히 최영을 대표하는 어록으로 알려진 '견금여석(見金如石,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사실 그의 부친 최원직이 남긴 유훈으로, 부정부패가 만연한 당시 고려 말기 사회에서 아들 최영이 청렴하고 강직한 사람으로 자라기를 당부한 내용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최영은 용모가 건장하였고 완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다'고 묘사하며 그가 타고난 무인의 기질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최영은 16세에 아버지 최원직이 사망하면서 음서(蔭敍)로 관직에 나가는 것이 불투명해지자, 언제 합격할지 모르는 과거 시험(문신)보다 적성에 맞는 무신의 길을 택하기로 결심했다. 

최영이 19세이던 1335년, 고려의 동북면(현 함경남도 영흥)에서 이성계라는 또 한명의 걸출한 인물이 탄생한다. 이성계의 가문은 전주 이씨였지만 고조부인 이안사의 시기에 동북면 병마사로 파견되었다가 여몽전쟁이 터지면서 몽골(원나라)에 항복하여 관직까지 받았다. 

이후 이성계의 가문은 동북면에서 대대로 뿌리를 내리며 세력을 키웠고,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대에 이르러 원나라가 쇠퇴하자 1356년 다시 고려에 투항한다. 그 뒤를 이어 가문의 수장이 된 이성계는 고려 말기를 대표하는 무장으로 성장하며 두각을 나타낸다. 다만 최영이 대대로 고려의 정통 중앙 귀족 가문이었다면, 이때만 해도 이성계는 변방의 신흥 토호세력 가문의 일원에 불과하다는 분명한 위상 차이가 있었다.

고려 정통 중앙 귀족 가문의 최영

최영은 37세였던 1352년,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진압한 공로를 인정받아 공민왕(恭愍王)의 신임을 얻게 된다. 이후로 최영은 원나라의 요청으로 한족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파병된 고려군을 이끌고 무려 27번의 전투에서 전승이라는 놀라운 무공을 세우며 이름을 떨쳤다. 

당시 고려는 안으로는 친원파와 권문세족의 전횡, 밖으로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등으로 혼란하던 시기였다. 최영은 고려를 대표하는 무장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할때마다 앞장서서 전장에 달려가며 수많은 공훈을 세웠고, 공민왕이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장수가 됐다.

이처럼 고려말 당대 최고의 무장으로 함께 명성을 떨쳐가던 최영과 이성계가, 공식적으로 처음 함께 협력한 것으로 역사에 확인된 전투는 1362년 1월 18일 '홍건적의 2차침공' 시기에 벌어진 개경 탈환전이다. 당시 파죽지세로 내려온 홍건적(한족 반란군)은 고려의 수도 개경까지 함락한 상태였다. 이성계는 공민왕의 명을 받아 동북면의 가별초(家別抄)를 이끌고 최영의 고려군에 합류하여 개경 탈환작전에 동참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성계는 휘하 2천 명을 거느리고 용기를 내어 공격하여 먼저 성에 올라 적을 크게 격파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최선봉에 선 이성계와 그 휘하 사병들의 전투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성계와 최영의 합동작전은 대성공을 거두며 홍건적을 격파하고 수도 개경을 마침내 수복하기에 이른다. 최영은 이 당시 젊은 이성계의 남다른 용맹과 자질을 직접 확인하고 깊은 감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최영은 1363년에는 공민와의 측근인 김용이 일으킨 '흥왕사의 정변'을 진압하며 또 한 번 공민왕의 생명을 구해낸다. 믿었던 측근들에게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했던 공민왕으로서는 그때마자 자신을 구해준 최영을 더욱 신임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최영은 요직인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오늘날의 대통령 경호실장)을 거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임명되어 재상의 반열에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했다.

1374년 원나라의 영향력이 아직 남아있던 제주에서 말을 기르는 목호(원나라인들)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목호의 난(牧胡之亂)이 일어난다. 이번에도 공민왕은 가장 신임하는 최영을 파견하여 목호들을 진압했다. 그런데 최영이 하필 제주에 있던 사이에, 공민왕이 신임하던 측근인 홍륜(洪倫)에게 시해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최영은 자신의 능력을 알아보고 중용해준 공민왕의 최후에 큰 충격을 받고 대성통곡했다.

최영은 공민왕의 뒤를 이은 우왕(禑王)에게도 변함없는 충성을 바쳤다. 1376년(우왕 2년)에는 환갑을 넘긴 나이에 홍산대첩(鴻山大捷)을 통하여 왜구들의 침공을 격퇴하는 공로를 세웠다. 

최영을 누구보다 의지했던 우왕은 그에게 재상인 시중의 자리를 제안했지만, 최영은 '왜구를 몰살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관직마저 거절하고 노구에도 불구하고 전장터를 누볐다고 한다. 이러한 최영의 명성은 왜구에게도 널리 알려지며 <고려사>에는 "왜구들이 이야기하기를, 두려워할 사람은 오직 하얀 머리의 최만호(최영) 뿐이다"라고 하였다는 기록도 전해질 정도다.

최영의 전장 동지가 된 이성계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이처럼 '고려의 수호신'으로 오랜 세월을 홀로 고군분투하던 최영에게, 뒤늦게 전장에서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동지로 나타난 것이 이성계였다. 최영이 해풍군 전투에서 왜구의 집중적인 공세를 받아 위기에 몰리자, 때마침 이성계가 정예기병을 이끌고 달려와 적을 격파하고 최영을 구해내기도 했다. 

이성계 또한 당시 고려 각지에서 벌어진 전란마다 참전하여 떠오르는 무장으로 한창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특히 1380년에는 고려 말기 최대 규모의 왜구 침공이었던 황산대첩(荒山大捷, 현 전라북도 남원)에서 이성계가 왜구들을 대파하는 전공을 세운다. 이성계의 수많은 전공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전투이기도 하다.

이에 최영은 크게 기뻐하며 승전을 거두고 돌아온 이성계의 손을 잡고 "고려가 다시 일어난 것은 이번 전투의 승리 덕분일세, 공이 아니었다면 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는가(公乎公乎! 三韓再造, 在此一擧. 微公, 國將何恃)"라며 극찬했다고 한다.

사실 이성계는 당시만 해도 변방 출신이자 한때 원나라에 항복했던 배신자의 가문이라는 이유로 고려 조정에서는 아직 배척받던 상황이었다 본인의 무공과 더불어 최영이라는 든든한 후원자의 지지는, 이성계가 고려 중앙정계에 진출하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된 장면이기도 하다.
   
1388년, 최영과 이성계는 우왕의 지시를 받아 고려의 기득권 세력인 권문세족(權門勢族)을 대표하던 임견미, 염흥방, 이인임 등을 숙청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최영과 이성계는 이제 신흥무인세력을 넘어서 함께 고려 조정을 주도하는 정치적 거물로 자리잡았다. 

최영은 아끼는 후배이자 정치적 동지인 이성계에 대한 신뢰가 남달랐다. 하루는 한 인물이 우왕과 최영에게 "이성계는 속이 음흉한 인물이니 믿어서 안된다"고 험담하자 최영은 "이성계는 국가의 주석이다. 일조에 큰 일이 있으면 (이성계가 아닌) 누구를 시켜야 할 것이냐"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최영은 사석에서도 이성계를 자주 불러 술자리를 나누며 그 끈끈한 우애가 가족과 같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지만 최영과 이성계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정치적 지향점은 달랐다. 최영이 태어날때부터 고려의 충신으로 무너진 나라를 재건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강한 뼛속까지 '고려인'이었다면, 이성계는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신잔사대부 세력가 손을 잡고 고려를 넘어 새로운 질서를 세우겠다는 속내를 간직한 '야심가'였다. 

최영과 이성계의 운명을 가르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은 '요동정벌(遼東征伐)'이었다. 당시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대륙을 차지한 신흥강국 명나라의 태조 주원장(홍무제)은 고려를 경계했고, 한때 원나라에 점령 당했으나 고려의 영토였던 철령위(鐵嶺衛, 철령 이북)의 반환같은 무리한 외교적 요구를 거듭했다. 재상이었던 최영은 이에 분노하여 차라리 요동을 선제 공격하여 전쟁을 불사하고라도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강경한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최영의 일파로 여겨졌던 이성계는 사불가론(四不可論)를 내세우며 고려의 국력상 요동 정벌은 무리라고 강하게 반대했다. 이성계를 누구보다 신뢰했던 최영으로서는 큰 충격과 배신감을 느낄 만한 상황이었고, 자연히 두 사람의 사이는 멀어졌다. 고심하던 우왕은 결국 가장 신뢰하는 최영의 손을 들어주며 요동정벌을 결정했다. 최영은 총사령관인 8도도통사에, 이성계는 조민수와 함께 좌우군 도통사로 각각 임명됐다.

1388년 4월 18일, 약 5만의 요동정벌군이 개경을 떠나 요동을 향하여 출정한다. 사실상 고려의 정예병력이 모두 동원된 대군이었다. 하지만 출정을 앞두고 돌연 총사령관인 최영이 개경에 남게 되는 돌발 상황이 벌어진다. 과거 선왕인 공민왕이 시해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트라우마가 있었던 우왕이, 자신을 지켜줄 최영마저 떠나는 것을 극구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최영은 난감했지만 우왕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리고 이는 최영과 우왕에게 일생일대의 패착이 된다.

최영과 우왕, 일생일대의 패착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이성계가 이끄는 요동정벌군은 길목인 위화도에서 잠시 주둔하는 동안 장마철을 맞이하여 비가 쏟아지면서 사상자가 발생하고 탈영하는 병사들까지 속출하며 오도가도 못 하는 난감한 상황에 놓친다. 이성계가 가장 우려한 일이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고심하던 이성계는 조정에 서신을 올려 다시 회군을 요청했지만, 우왕과 최영은 이를 거부하고 이성계를 질타하며 진격을 독촉한다.

왕명을 거역하면 역적이 되고 요동으로 진격해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 이성계는 결국 고심 끝에 마침내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린다. 위화도에서 회군을 선언한 이성계는 "군사를 돌리길 청하였으나 왕은 살펴보지 않고 최영은 노쇠하여 듣지않으니, 왕 곁에 있는 악한 자를 제거하지 않겠는가"라고 덧붙인다. 

이미 회군을 결심한 상황에서 이성계는 자신이 '반역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한 명분이 필요했다. 결국 국왕의 곁에서 눈과 귀를 가리는 최영을 간신으로 규정하여 자신이 직접 처단하겠다는 선언이야말로, 당시로서 이성계가 내세울 수 있는 최선의 명분이었던 것이다.

최영은 그제야 이성계를 믿고 군권을 맡긴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운명은 돌이킬 수 없었다. 최영은 개경에 남은 소수의 병력으로 분전했지만 고려의 주력군이 모두 이성계에게 넘어간 상황에서 압도적인 전력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끝내 궁궐이 점령되면서 최영은 이성계에게 붙잡혔고 유배형을 선고받기에 이른다.

이성계는 최영을 마주하게 되자 "이러한 사변은 나의 본심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동을 공격하는 것은 대의만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태롭고 하고 민을 괴롭혀 원망이 하늘에 이르렀음으로 어쩔 수 없었습니다"고 변명하며 "잘 가십시오, 잘 가십시오"라고 작별인사를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 됐다.

이성계의 해명은, 위화도회군은 자신이 원한 것이 아니라 최영의 무리한 요동정벌이 초래한 결과라는 주장이다. 훗날의 역사를 아는 이들에게는, 바꿔 말하면 마치 최영에게 개인적 원한은 없으나 이성계 본인의 야심을 이루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처럼 들리기도 한다. 한편으로 이성계가 이미 승자가 된 상황에서 굳이 패자인 최영 앞에서 이러한 궁색한 이야기까지 늘어놓은 것은, 그래도 한때의 전우이자 은인이었던 최영에 대한 한 가닥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위화도회군이 성공하고 이성계가 고려조정을 장악한 지 6개월이 지난 1388년 12월, 최영은 유배지에서 끝내 처형 당한다. 이성계 개인이 과연 어떤 마음으로 전우였던 최영의 처형을 결정했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집권세력으로서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개선해야 했던 이성계 일파로서는, 가장 큰 걸림돌인 요동정벌 사건을 주도한 책임자인 최영을 처벌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또한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 건국을 꿈꾸고 있던 이성계 세력에게 최영은 어차피 언제든 제거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기도 했다.

평생 고려를 위하여 헌신했던 최영은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최영은 형이 집행되던 날에도 끝까지 담담하고 꿋꿋한 모습을 잃지 않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최영의 죽음을 지켜보고 슬퍼했다고 한다. 

또한 <연려실기술>에 기록한 야사에는 처형 당하기 직전 최영이 "나에게 한 번이라도 사사로운 탐욕이 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은 자라지 않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유언을 남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실제로 이후로 한동안 최영의 무덤에 정말 풀이 자라나지 않아 적분(赤墳)이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다. 최영이 세상을 떠나고 불과 4년 뒤, 이성계는 결국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朝鮮王朝)를 건국하여 태조(太祖)에 등극한다.
   
최영은 분명히 뛰어난 장군이자 충신이었지만, 정치인으로서의 족적은 평가가 엇갈린다. 최영 본인은 청렴했으나 권문세족의 일원으로서 고려의 시대적 과제와 모순을 해결하려는 개혁에는 무관심했다는 한계를 드러냈다. 현실을 무시한 독선적인 요동정벌 추진과 실패한 인사는, 결국 자신의 몰락과 함께 그토록 간절히 지키려고 했던 고려의 멸망이라는 아이러니한 결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은 역사의 승자인 이성계 못지않게 패자 최영의 일대기를 기억하며 한국사를 빛낸 위대한 영웅 중 하나로 추앙하고 있다. 평생 사사로운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나라를 위하여 강직하고 두려움 없이 살다간 '충신이자 명장'으로서 최영의 일대기가 전하는 진정성 때문이 아닐까. 
벌거벗은한국사 최영 이성계 위화도회군 견금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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