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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을 가장한 만남, 정동길에서 재회한 옛 연인

[김성호의 씨네만세 712]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코리안시네마 <정동길>

24.05.07 10:07최종업데이트24.05.07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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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진 연인과의 재회, 한 번쯤 그런 일을 기대한 이가 없지는 않을 테다. 언제나 그러하듯 욕구가 있다면 실현되기도 한다. 헤어진 이와의 재회를, 용감한 누구는 실제로 시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흘러간 관계는 흘러간 대로 놓아두는 게 맞지 않느냐고 반문할 테다. 헤어짐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그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결과가 오늘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옛 연인을 한 번쯤 다시 만나 어떻게 지내느냐 물어보고자 한다. 그중 또 일부는 더 나아가서 옛 관계를 복원하거나 새 관계를 시작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인간사, 그중에서도 남녀상열지사를 누가 알겠느냐며. 미련과 열망 사이, 옛 연인과 재회하는 어느 커플의 이야기가 그렇게 또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져 관객 앞에 닿는다.
 

▲ 전주국제영화제 스틸컷 ⓒ JIFF

 
서울 대표적 산책로가 주인공이 된 영화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코리안시네마 단편2' 섹션에서 상영된 <정동길>은 도심 산책로로 유명한 정동길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15분짜리 짤막한 단편이다. 그저 배경이라고만 적기엔 아쉬운 부분이 있다. 영화의 제목으로 '정동길'을 빼어달았을 만큼, 그 길의 존재가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연인 두 배우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 이상으로. 그럼에 정동길은 배경을 남아 영화의 주역이기도 하다.
 
정동길이 어디인가. 서울 중구 덕수궁 돌담길로부터 시작하여 정동로터리와 정동교회, 국립정동극장을 지나 서울아트시네마에 이르는 고풍스런 길이다. 대한제국 말기 국권을 잃고 무너지던 조국의 상징으로써 옛 러시아 대사관 등 고풍스런 서양식 건물들이 자리한 곳이고, 그 이국적 정취 탓으로 연인들이 몰려들어 데이트를 나누는 낭만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연인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이니만큼 유래를 알 수 없는 온갖 이야기도 많다. 옛 서울가정법원 근처란 이유로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걷는 연인은 반드시 헤어진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이문세의 '광화문연가'에 등장하는 '눈 덮인 교회당'이 정동길에 위치한 정동교회란 이야기도 잘 알려져 있다. 무튼 <정동길>은 한국 연인의 상징 중 하나인 이 길을 함께 걸으며 대화하는 헤어진 연인의 이야기를 다룬다.
 

▲ 정동길 스틸컷 ⓒ JIFF

 
우리가 걸었던 그 길, 영화로 만난다
 
흑백화면으로 표현된 정제된 영상 가운데 정인(이수경 분)과 재훈(강길우 분)의 미묘한 대화가 러닝타임 내내 이어진다. 길 초입에서 정인을 기다리고 있던 재훈이 그녀를 보고 말을 붙인다. 정인은 그가 달갑지 않은 듯 하지만 딱히 밀어내지도 않고 그와 나란히 걷는다. 코트까지 빼입은 선남선녀가 서울에서도 예쁘기로 소문난 길을 함께 걷는 모습이 그저 지켜보는 것만도 멋스럽게 느껴진다.
 
영화는 필요 이상의 정보를 던져주지 않는다. 제법 나이차가 나는 남녀가 서로 만났다 헤어졌다는 사실, 여자가 직장을 다니며 힘들었던 이야기를 남자에게 토로하곤 했다는 이야기, 여느 연인처럼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아무렇지 않게 펼쳐질 뿐이다. 특별할 것 없는 대화는 그것이 흑백으로 연출됐으므로, 또 특별한 열기가 느껴지지 않기에, 마치 죽은 이들의 온기 없는 대화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무엇도 그를 확신케 하는 단서는 없으므로 관객은 이들의 뒤를 따르며 그들의 만남과 헤어짐을, 또 이 관계의 의미를 돌아볼 뿐이다.
 
15분짜리 짤막한 단편은 연인의 재회도, 그렇다고 완전한 이별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우연처럼 가장된 만남, 그로부터 이어진 한 토막 대화를 보여줄 뿐이다. 이전과 이후로부터 독립된 순간의 대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상상의 나래를 펼치도록 이끈다. 이전의 헤어짐과 이후 펼쳐질 미래 같은 것들이다. 둘은 서로의 손을 다시 잡게 될까. 아무렇지 않게 헤어져 다시는 보지 않게 될까. 둘 모두가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도리어 이 영화의 매력이라 해도 좋겠다.
 

▲ 정동길 스틸컷 ⓒ JIFF

 
우리 도시 구석구석 비추는 영화의 매력
 
한국영화가 전성기를 맞이한 오늘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한국영화 가운데 한국적인 것이 얼마나 담겨 있는지를 생각하면 아쉬움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장소들, 여러 도시와 길목들, 맛과 멋들이 영화 속에서 얼마만큼 비치고 있는가. 수많은 영화팬이 LA를, 뉴욕을, 홍콩을, 런던을, 파리를, 로마를, 후쿠오카를 동경하여 그곳으로 떠나고는 한다. 서울은 과연 그러한가.
 
영화팬에게 한국의 도시며 지역, 거리를 잘 비춘 영화를 묻는다면 어떤 답이 나올까. 김종관의 <최악의 하루>가 나오고서야 남산은 한국영화에서 제 존재감을 얻었다. 장률의 <경주>가 있고서야 수학여행지로만 기억되던 도시가 일상의 멋을 찾았다.

<8월의 크리스마스> 속 군산과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속 부산 40계단, 또 제주를 그린 여러 영화들이 있을 테다. 그리 많지만은 않은 공간을 품은 영화 사이로 단편 <정동길>이 이따금은 언급될 수 있길 기대한다.
 

▲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 JIFF

 
영화 뒤 펼쳐질 못다한 이야기들
 
영제로 'lover'라 한 이 영화의 한국 제목이 '정동길'로 붙은 것은 이 길이 한국의 적잖은 관객에게 그저 여느 장소에 그치지 않기 때문일 테다. 단 한 번이라도 이 길을 연인과 걸어본 사람이라면 정인과 재훈의 툭툭대는 대화로부터 제가 겪었을 어느 순간을 떠올려 추억해볼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정동길은 그저 길이 아니고, 한국 연인, 나아가 연애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마치 남산 자물쇠가 그러하듯이.
 
강길우와 이수경은 조금씩 얼굴을 알려가는 기대되는 두 배우다. 이들의 매력이 한껏 풍겨나는 로맨스 아닌 로맨스를 1986년생 윤서진 감독이 매끄러운 질감으로 찍어냈다. 어떤 영화는 대단한 서사가 없이도 분위기로 관객을 움직인다. <정동길>이 의도한 것도, 또 아주 약간은 해낸 것이 그와 같은 것일지 모를 일이다.
 
영화 속 재훈은 제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정인을 향해 온갖 이야기를 던진다. 그중에는 정동길과 얽힌 흔한 이야기, 앞서 언급한 덕수궁 돌담길과 서울가정법원의 관계도 빠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동길>을 본 관객에겐 적어도 한 가지 무기가 더 생긴 셈이다. 정동길을 배경으로 한 영화 한 편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헤어진 연인을 기다리던 남자는 제 선택을 후회했을까.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되었을까. 그에 대한 물음과 답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정동길이 짧게만 느껴질 테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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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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