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나토 리파사 발폴리첼라 리파소 수페리오레 2018이탈리아 와인 특유의 신맛이 잘 살아 있는 데다가 보랏빛 잉크를 떠올리게 만드는 균일하고 예쁜 맛이 난다.
임승수
바로 옆에는 주문한 찐만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만두와 발폴리첼라 리파소의 조합은 맛뿐만 아니라 의미적으로도 잘 어울린다. 제갈량이 남만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풍랑이 심해서 강을 건널 수 없자 물의 신을 달래기 위해 인신공양 제사를 드리는데, 사람 대신 만두를 사용했다고 한다. 찌꺼기(발폴리첼라 리파소)와 대용품(만두)의 조합은 시작부터 B급 독립영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딸내미 주먹만 한 만두 하나를 집어 들어 반쯤 베어 물고 씹는다. 두툼하고 존득한 만두피를 찢고 들어가니 향긋한 부추와 두부, 돼지고기 등의 단백질이 어우러진 만두소가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반겨준다. 본격적으로 저작운동을 시작하면 덩그런 만두소가 해체되고 파쇄되는데, 그 과정에서 뿜어내는 다채로운 질감과 풍미의 향연은 만두를 만두이게 만드는 정체성의 요체다. 이 집 만두는 특히나 부추를 효과적으로 사용해서 느끼하지 않고 담백한 게 참으로 만족스럽다.
이 요란법석한 만두소 파티는 구강 내에 광란의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이때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러 와인이 등장한다. 우선 잔에 따라서 지긋이 향기를 맡았다. 고급 레드 와인에서 종종 감지되는 가죽 향이랄까 아무튼 그런 종류의 동물적 뉘앙스가 은은하게 깔려 있다.
한입 머금으니 이탈리아 와인 특유의 신맛이 잘 살아 있는 데다가 보랏빛 잉크를 떠올리게 만드는 균일하고 예쁜 맛이 난다. 풍미가 다채롭다거나 복합적이지는 않지만 단 하나의 색깔이더라도 곱디고와서 매우 인상적이다.
부추가 아무리 제 역할을 하더라도 두부나 고기에서 유발되는 잡내를 완벽히 잡아내기는 어려운데, 이 와인의 과실 향 가득 찬 풍성한 신맛은 마치 전문 청소팀과도 같아서 잡내뿐만 아니라 카오스 상태인 구강 내부를 말끔하고 상쾌하게 정돈한다. 찌꺼기와 대용품의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조화는 B급 독립영화관에서 간만에 명작을 찾아낸 것과도 같은 만족감을 선사한다.

▲만두와 발폴리첼라 리파소이 훌륭한 조화는 B급 독립영화관에서 간만에 명작을 찾아낸 것과도 같은 만족감을 선사한다.
임승수
사흘 간격으로 몸값이 50배 차이 나는 와인을 차례로 경험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비싼 와인이 맛있는 건 사실이지. 그동안 시음회에서 극소량을 영접한 값비싼 녀석들은 하나같이 끝내줬으니까.
하지만 나와 아내가 주방 식탁에서 두 시간에 걸쳐 도란도란 마시고 있는 이 한 병의 와인은 (시음회의 그 귀하신 와인보다) 우리와 훨씬 진중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가. 인간관계 또한 그러해서, 권력자나 명망가와의 스쳐 지나가는 만남보다는 가족, 동창생, 평범한 이웃과의 은근한 오랜 인연이 더욱 소중하기 마련이다.
길에서 연예인급 미모의 여성을 봤다고 갑자기 아내보다 더 사랑할 리는 없다. 남의 집 아이가 전교 1등 한다고 내 아이보다 예쁠 리 없다. 멋진 콘서트홀에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연주한다고 한들, 동네학원에서 고사리손으로 연습하는 딸아이의 서툰 피아노 연주만 하겠는가. 마찬가지다. 이 순간 우리 부부와 소중한 인연을 맺는 3만 원대 와인이 그림의 떡과 같은 값비싼 와인보다 심장에 남는 것은 당연지사다.
"작가님, 지금까지 마셔 본 와인 중에 제일 비싼 건 얼마짜리인가요?"
"음. 제가 모 시음회에서 말이죠. 백만 원이 훌쩍 넘는…"
이렇게 시작된 답변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깨닫게 된 소중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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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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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만 원대 와인 시음... 와인잔 대신 주둥이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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