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리 임자면 광산리 사람들이 학살된 장소.
박만순
생활권이 무안군에 속해 있던 신안군 압해면 고이리는 4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 칠동마을은 전주 이씨 집성촌이었다. 6.25 전에 칠동마을에 화재가 있었는데, 이는 이씨와 K씨가 서로 방화한 것임은 후일 밝혀졌다. 그만큼 양 성씨 간에 갈등은 전쟁 전부터 내재해 있었다. 6.25가 나자 인공시절 마을의 권력을 쥔 이들은 6.25 전 마을의 소작농이었던 K씨들이었다.
인민군 점령기에 무안군 운남면의 좌익들이 완장을 차고 압해면 고이도로 들어와 칠동마을의 청년 10여 명을 배에 태워 끌고 나갔다. 끌려간 청년들은 운남면사무소 부근에서 좌익에 의해 구덩이에 매장되었다.
이때부터 고이도의 좌익들이 완장을 차고 마을을 돌아다녔다. 칠동마을 가옥에는 피묻은 죽창이 일렬로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당시 칠동마을 상황은 이아무개의 회고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고향 집에 가기 전에 대충 고향 동리 분위기를 알고 동리를 들어서니 동리는 완전히 빨갱이들 세상이 되어 간간이 인민가만 들려왔다. 고향 집에 들어가 보니 반동분자 집이라고 좌익들이 우리 집을 비롯하여 이씨 집은 물론 취객들 집까지 전부 문지방에 붉은 딱지를 붙여 놓고 출입을 금지시켰다."
1950년 8월 9일 아침 7시경 완장 찬 이들은 이아무개의 집으로 18세 이상의 이씨 남성들을 전부 모이게 했다. 칠동마을과 인근 지역에서 온 완장 찬 이들의 손에는 나무 방망이가 들려 있었다. 이씨들은 한 명씩 불려 나가 초주검이 됐다. 당시 경찰이었던 이〇〇, 교사였던 이〇〇, 학도호국단 간부였던 이〇〇의 소재를 대라는 것이었다.
6월 28일 수백 명의 좌익들이 칠동마을로 들이닥쳐 이씨 성의 남성 8명을 학살했다. 이후 국군 수복으로 후퇴하는 좌익들은 칠동마을 이씨 성의 남녀노소를 집단 학살했다.(진실화해위원회, 『전남 신안군 적대세력에 의한 사건 ⑶, 2023)
오리무중이 된 신안군 희생 규모
도대체 한국전쟁 당시에 전남 무안군(현재의 신안군 지역)에서 학살된 민간인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사실 그동안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 실태를 정확하게 조사한 적은 없었다.
그나마 임자면이 1953년부터 1955년까지 각 마을별 실태조사를 통해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자 992명의 명단을 작성했다. 이 명단은 수정·보완 작업을 통해 1962년에 최종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이 명단에도 당시 아기나 일부 노인들이 누락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더군다나 군경에 의한 희생자들은 한 번도 제대로 조사된 적이 없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2008년도에 신안군 피해실태 조사를 벌였지만 불과 105명을 찾아냈을 뿐이다.
임자면만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자 약 1300명에 군경에 의한 피해자 약 200명으로 1500명의 전쟁 피해자가 발생했다고 추정된다. 신안군은 이외에도 자은면과 암태면 순으로 피해가 컸다고 알려졌지만 그 수치는 추정조차 불가능하다.
그런데 6.25 당시 목포공업학교 교사였던 이상득(암태면 익금리 출신)의 자서전에 의하면 암태도보다 며칠 늦게 수복된 자은면에서 우익진영 인사 약 600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그나마 자은창고에 구금되었던 우익인사 100여 명은 백부대에 의해 구출되었다고 한다.(이상득, 『나의 자서전, 가르치며 배우며』, 1991)
신안군의 피해 전체 규모가 정확히 밝혀지고, 양쪽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들과 그 가족의 한이 풀리는 날은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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