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여름 백령도 하늬해변에 설치된 군사시설물인 용치에 강화 소창 천으로 감싸주는 설치미술전(무뎌진 기억; 새김 展)을 했던 한희선 작가와 해변에서 어업을 하는 백령도 주민들. 한 작가는 뒤엉킴 속에 질서와 조화, 일상의 평화가 담긴 이 사진이 자신이 추구하는 작품세계와 일치한다고 말했다.
한희선
기사에 넣을 작가 사진을 한 장 골라 달라고 했을 때 한희선 작가는 2022년 여름 백령도 하늬해변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해안가에 설치한 용치에 감았던 강화 소창 천을 거둬서 들고나오는 장면이었다. 용치는 1970~80년대에 적의 수륙양용정 같은 함정이 상륙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건데 지금은 녹슨 채 방치된 군사시설물이라고 한다.
"이 사진에는 좌우에 해산물, 다시마 채취하는 여성과 잠수복 입은 남성이 있고, 급히 용치를 감았던 소창을 거둬서 나오던 내가 찍혔어요. 바닷물 들어오기 전에 서둘러 하느라 사진이 찍히는지도 몰랐죠. 나중에 이 사진 보고 감동받았어요. 그동안 내가 추구한 작품세계가 잘 담겨 있는 사진이죠.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자기 몫을 해내는 풍경, 뒤엉킴 속에 질서와 조화, 일상의 평화가 담긴 사진이에요."
- 일상적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나는 뭔가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백령도 태극기에 접근했어요. 처음엔 호기심을 안고 시작했는데, 백령도에서 40개의 태극기를 구하며 느낀 건 그들에겐 일상적인 물건이라는 거였죠. 국경일이나 기념일 같은 때 사용하는 특별한 물품이 아닌 거예요. 접경 지역 바다에서 주민들을 지켜주는 부적, 안전을 보장하는 상징 같은 것이기도 해요.
주민에게 받은 태극기 중에 제일 인상적인 것은 장천 포구에 정박한 어선에 걸렸던 태극기예요. 비바람에 다 헤지고 3분의 1만 남은 낡은 태극기를 보면서 일상적인 태극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백령도에선 관공서가 아니더라도 태극기를 365일 걸어놓는 것이라 일상적이고, 그래서 찢어지고 헤져도 그냥 익숙한 깃발인 것이죠."
평화는 존중에서 오는 자유
- 백령도 해변의 용치에 흰 천을 거는 설치미술을 기획한 의도는 무엇이었나요?
"녹은 산화와 희생의 산물이 아닌가 싶어요. 2018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오르기도 했죠. 아버지가 땅속에 묻히고 흙이 덮이는 기억이 두고두고 떠올랐는데 '인간은 결국 흙으로 돌아가지만 어떤 존재로든 다시 태어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모든 존재는 죽고, 산화하지만,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로 환원하고 환생할 거라는 믿음이 생겼어요. 그 뒤로 녹에 관해 관심이 생겼고, 제 작업의 주요한 소재가 되었죠. 인간의 죽음 역시 끝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백령도 해변 진흙 뻘밭에 설치된 수백 개의 용치(용의 이빨을 닮았다 하여 생긴 말)를 보는 순간 작가는 아버지가 떠올랐고, 또 퇴역한 군인이 생각났다고 한다. 용치의 녹에서 그들이 흘린 피와 땀, 고통과 희생이 연상됐다.
그래서 용치를 강화의 하얀 소창으로 감싸주는 설치미술을 구상했고 분단으로 인해 생긴 그 희생과 상처를 치유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한 작가는 2021년 여름 강화 석모도 어류정항 포구에서 녹슨 닻을 소창으로 휘감는 설치미술전(사이흔적-멈추어 바라보다)을 한 적도 있다.
"녹슨 용치를 흰색 소창 천이 감싸는 건 상처를 치유하는 의미가 있어요. 용치가 아버지라면 소창 천은 어머니를 의미해요. 소창 천은 한국인에겐 매우 친숙한 천이었죠. 실제로 내가 결혼할 때 함을 묶었던 천, 기저귀 감으로 쓰던 천도 소창 천이었고요. 연약해 보이지만 무엇이든 부드럽게 감쌀 수 있는 소창 천은 어머니의 마음과도 같으며, 용치의 녹과 그것이 상징하는 상처를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어요."
최전방의 바닷가에 설치된 군사시설물 용치에서 퇴역한 군인을 떠올리고, 해변 개흙에 서 있는 용치의 녹이 그들의 상처이고, 피눈물의 흔적으로 느껴졌다는 한희선 작가. 분단의 상징물이기도 한 용치의 고통과 상처를 하얀 강화 소창으로 감아서 보듬어주는 설치미술전(무뎌진 기억; 새김展)을 했던 그에게 평화는 무엇일까. 탈북자가 날리는 전단과 북에서 보낸 오물 풍선이 남북의 하늘을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시국에 평화는 사치스러운 단어로 느껴지기도 한다.
"평화는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함에서 오는 자유 아닐까요? 제가 하늬해변에서 목격한 어지럽게 보이지만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삶을 의연하게 살아가는 모습, 즉 조화로운 뒤엉킴이 제가 작품 속에 담고 싶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모습이었어요. 태극기에는 음양의 조화, 균형과 상생, 평화의 철학이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지금 태극기는 우리 사회에서 분열, 대립의 상징물이 된 측면도 있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해요."

▲ 한희선 작가의 ‘사이흔적-이것으로 말미암아(緣起)’ 설치미술전에 전시된 작품의 주 소재는 백령도의 태극기와 백령도 해변의 군사시설물 용치를 감았던 강화도의 소창 천이다.
한희선
한희선 작가는 정치하는 분들이 오다가다 이 전시를 보면서 "태극기의 참 정신인 조화와 균형의 원리, 하나 됨의 이치를 가슴에 담았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피력했다. 그것이 이곳 의원회관 아트갤러리에서 전시하는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광화문의 태극기와 백령도의 태극기 그리고 여의도의 태극기는 어떤 의미일까.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 필자는 광화문이나 시청 앞에서 휘날리는 수천, 수만 장의 태극기를 보며 '이 시대 태극기의 정체'에 대한 책을 기획해보고 싶었다. 대립과 분열을 넘어 평화을 통일로 가는 길, 파랑과 빨강이 공존하면서 순환하는 길은 무엇일까. 이런 물음을 안고 철학자, 소설가, 현장 기자 등 여러 명의 전문가를 만나서 의견도 들어봤으나 수년째 아직 그 방향성을 찾지 못했다.
음양의 조화가 깃든 태극기에서 남북의 평화를 찾는 한희선 작가의 작품 속에서 어떤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조화로운 뒤엉킴' 속에서 평화를 발견했다는 한 작가는 백령도에서 수집한 낡은 태극기를 여의도 의원회관에 전시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음양 조화의 상징인 태극기의 참 의미가 분열과 갈등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데도 적절한 철학임을 전하고 싶어요. 이번 전시를 통해 태극기의 부정적 기억은 무뎌지고, 이를 통하여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소극적 평화뿐 아니라 정치적, 구조적 폭력까지 없는 적극적 평화가 확대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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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는 채식과 마라톤, 지금은 달마와 곤충이 핵심 단어. 2006년에 <뼈로 누운 신화>라는 시집을 자비로 펴냈는데, 10년 후에 또 한 권의 시집을 펴낼만한 꿈이 남아있기 바란다. 자비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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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 태극기 40장이 국회 의원회관으로 간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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