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서 이항로 선생이 제자 최익현에게 준 글 '存心明理(존심명리)'
최창규
어머니가 1865년 9월에 돌아가시고 1868년에는 화서 선생이 운명하였다.
면암은 관직에 나간 직후부터 강직한 언행으로 명성을 남겼다. 그 가운데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면, 선조의 후궁 인빈김씨의 무덤인 순감원의 수봉관으로 재직할 때의 일이다. 어느 권세가가 불법으로 원소(園所)의 지경을 침범해서 장사를 지냈다.
면암은 즉시 이장할 것을 독촉하였다. 그러자 그 사람은 사건을 무마해달라는 예조판서의 서신을 가져와서 오히려 면암을 협박하였다. 이에 면암은 그 판서를 찾아가서 대의를 들어 그 불법성을 나무랐다.
그 판서는 매우 불쾌했지만 면암을 벌할 수는 없었다. 이에 면암은 원소를 지낸 사람을 투옥시켜 버렸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상주는 즉시 묘를 파내갔다. (주석 4)
면암은 관직에 나가면서 항상 스승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가 신창현감을 사직했다는 소식에 화서는 일신의 명리와 불의를 떨치고 현감직을 버린 제자의 행위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뒷날 화서의 신도비문을 지었다.(<면암집>, 민족문화추진회, 1982, 이후 <면암집> 표기)
아, 하늘이 이 세상을 염려하는 것이 지극하다고 말할 수 있다. 세상은 치세와 난세가 없을 수 없는데, 혼란하면 하늘은 반드시 한 사람의 대인 군자를 내어 시대를 참작하여 혼란을 중지하는 기본을 마련하게 하였다.
주(周)의 말기에 공자가 출생하고, 송·명의 말기에 주자와 송자가 태어난 것이 바로 그 징험이다. 그후 서교가 횡행하여 천하가 번복되고 생민이 어육이 되는 재앙이 있게 되니, 하늘은 우리 선생을 동방에 탄생시켜 저들을 물리치는 일을 살아 만세에 일치(一治)의 기초가 되게 하였으니, 아.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한 연구가는 면암의 1차 출사와 관련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면암은 23세 때 명경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였으며, 24세 때 이후 성균관 전적을 거쳐,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이조 정랑에 올랐다. 30세 때 신창현감으로 나갔을 때는 백성을 위해 상관인 충청감사에게 항의하다가 이듬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32세부터 다시 벼슬에 나가서 예조좌랑을 거쳐 34세(1866)에는 사헌부 지평으로 당시 대원군의 집정 초기에 훼철된 황조(만동묘)의 회복을 요구하였으며, 천주교가 성행하여 병인 교옥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서양의 요기를 제거할 것을 주장하는 등 여섯 가지 일을 건의하는 상소문을 지었으나 모친의 병환이 위중하여 올리지 못하였다. 이때 그는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에서 거상하였는데, 그 해에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한 병인양요가 발생하여 스승 화서는 강경한 척화의지를 천명하는 상소를 올렸다. (주석 5)
주석
1> 최창규, <면암 최익현 선생 해적이>, <나라사랑>, 제6집, 21~22쪽, 외솔회,1972.
2> 박민영, 앞의 책, 18쪽.
3> 앞의 책, 24쪽.
4> 앞의 책, 21쪽.
5> 금장태, 앞의 책, 2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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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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