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바 바라데로 해변
픽사베이
'또 다른 쿠바'는 바라데로였다. 바라데로는 멕시코 칸쿤처럼 대체로 외국인 전용 관광특구로 지정된 곳! 흔히 해외의 멋있는 여름 휴양지로 사진에서 보는, 뽀얀 백사장과 에메랄드빛의 맑은 바다, 아름다운 연인들, 바로 그 모습이 바라데로에 '실제' 있었다.
항공사와 호텔이 특별 계약을 맺어 만든 여행 상품으로 '올 인클루시브' 패키지가 있다. 이것은 한 번 돈을 내면 비행기부터 공항버스, 그리고 호텔 숙식이 모두 무료로 제공되는, 거의 천국 같은 프로그램이다. '돈의 힘'을 느끼게 하는 상품! 헤밍웨이가 즐겨 마셨다는 모히또나 다이끼리 같은 럼주 칵테일을 공짜(?)로 '무한정' 마실 수 있다. 호텔 영역 안에서 먹고 마시고 자고 또 해변에 나가 수영이나 운동을 하다가 다시 또 먹고 마실 수 있다.
해수욕을 하다 만난 오스트리아 일가족 관광객은 "유럽의 마요르카보다 여기가 훨씬 좋다"라 했고,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온 부부는 "휴가철이면 다른 어디보다 꼭 여기로 온다. 벌써 12번째"라 했다.
미국의 동남쪽인 플로리다, 그 가장 남쪽인 키웨스트와는 그리 멀지도 않은 거리에 쿠바가 있는데, 바라데로는 플로리다를 향해 삐죽 나온 반도 모양이다. 그 길이가 무려 28킬로나 된다. 약 100년 전에 미국의 듀퐁 자본이 바라데로를 개발했는데, 주로 미국인 부자들을 위한 휴양지다. 당시 듀퐁 가족이 살았던 '듀퐁 하우스'는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변신을 거듭해 현재 호텔과 식당으로 사용된다. 더 들어가면 마피아 두목으로 유명한 '알 카포네 하우스'도 있다.
그러면 바라데로 관광특구에서는 과연 '소는 누가 키울까'? 당연히 쿠바인들, 현지인들이 그 모든 일을 한다. 음식을 준비하는 일, 나르는 일, 청소하고 설거지 하는 일, 호텔 방을 정리정돈 하는 일, 심지어 해변에서 칵테일을 만들어 주는 일 등을 모두 현지인들이 한다. 현지인들은 대체로 혼혈 흑인이다. 이들의 얼굴 속에 수백 년 쿠바 식민지 역사가 깃들어 있다.
얼핏 생각하면 그들은 외국 관광객들의 하인 노릇을 하면서 속으로 빈부격차 내지 계급 불평등을 느껴 자괴감이나 거부감을 가질 듯하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을 보면 의외로 밝고 차분하다. 가식인가 싶어 유심히 관찰했지만, 그냥 자연스러웠다. 수십 년 전에 우리나라 시골에서 보던 그런 '촌사람' 표정처럼 순박하다.
물론, 이들은 원래 살던 선주민(타이노, 메티 등)의 후손이라기보다 스페인 사람과 아프리카 노예들이 섞인 '물라토'의 후손이 많아 대개 가무잡잡하다. 얼굴색으로 사람을 말하는 건 인종주의 냄새를 풍기기에 극도로 조심해야 했다. 그런 생각으로, 그저 같은 사람으로, 동등한 이름을 부르며 대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편견이나 어색함이 사라졌다. 그렇게 식당이나 카페에서 모히또나 다이끼리를 한 잔씩 하며 현지인들과 친해지다 보니 나 역시 마음이 편해졌다.
또 하나. 그곳 현지인들은 다른 곳에서보다 호텔에서 관광객들을 위해 일하는 게 대우가 훨씬 좋기에 오히려 좋아하는 기색이다. 따지고 보면 이들은 기본 영어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배운' 이들이다. 특히, 가끔 손님들이 건네주는 팁은 그들에게 '개꿀'이다. 대개는 모든 직원들이 팁을 모아 일과를 마칠 때 고루 나눠 가진다고 한다.
먹고 놀고 즐기다 든 죄책감
이렇게 '올 인클루시브' 패키지로 온 관광객들은 일(생계노동 및 가사노동)을 하나도 하지 않고 광고 카피('그동안 수고 했으니, 떠나라! 그리고 무한정 즐겨라!')처럼 즐기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 누가 술과 음식을 '무한정' 즐기겠나? 바로 이 인간적 한계가 '올 인클루시브' 패키지의 심리적 비밀이다. 게다가 터무니없이 '저렴한' 인건비와 물자는 그 사업모델의 경제적 비밀이 된다.
이런 조건 속에서 먹고 놀고 즐기다 보면, 은근히 죄책감이 느껴진다. 나 역시 처음엔 은근한 죄책감과 미안함에 시달렸지만, 현지인 직원들을 만날 때마다 '올라(Hola=안녕)!'하고 인사하며 하루 이틀 지내다 보니 금세 그들과 친해졌다. 일례로, 호텔 실외 수영장 옆에서 손님들에게 모히또를 만들어주던, 눈이 서글서글한 알레한드라는 내게 "현진 류를 아느냐?"고 물어서 내가 "야구보다 축구를 좋아한다" 하니 "흥민 손도 잘 안다"고 했다. 한국에 관심이 많아 나를 친근히 대했다. 마지막에 헤어질 땐 내가 먼저 살짝 울컥할 정도였다. 그러나 알레한드라, 세실요, 유스레이 등 현지인 직원들은 "다음에 또 와요!"라며 쿨~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물론, 쿠바 현지인들은 바라데로 인근에 거주하지만 관광특구와는 다른 구역에 산다. 들어와 살고 싶어도 비싸서 살기 어렵다. 물론, 허락도 되지 않겠지만.
이렇게 카리브해의 맑은 물과 눈부신 백사장, 해수욕과 스노클링 등에 안성맞춤인 잔잔한 물결 등 자연 풍광이 뛰어나고 하루 종일 음식이나 술을 즐길 수 있는 곳, 아마 보통사람들은 상상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아마 요즘은 신혼여행 때만 잠시 즐길 수 있고 그 다음엔 영원한 추억으로만 간직해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이곳에 온 사람들은 "천국이 따로 없다"고 한다. 이것이 아바나와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쿠바다.
물론, 흑백논리 식으로 바라데로를 천국, 아나바를 지옥이라 할 순 없다. 그러나 같은 나라 안에서, 더구나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이토록 '다른' 두 세상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 전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같은 나라 안에서도 수출자유지역이나 경제특구 같은 데서는 투자 기업들이 땅값을 거의 내지 않거나 세금도 오래 면제받지 않던가? 그 바깥으로 나가면 세상은 전혀 딴판인데 말이다.
쿠바 역시 관광객 유치와 외화벌이(미국 달러)를 위해 바라데로 같은 관광특구를 만들고 '올 인클루시브' 패키지 같은 상품의 대량 판매를 허용한지 오래다.
1990년대 소련 붕괴 이후 농산물 개인 판매나 공예품 등 소상품 판매를 부분 허용하기 시작했다. 이걸 1차 충격 완화 조치라 하자. 또, 코로나19 사태 직후인 2021년부터 화폐 통합(외국인용 쿡[CUC]과 쿠바인용 쿱[CUP]을 통일, 쿠바 페소만 사용)과 함께 100인 미만 중소기업 영리사업을 허용했다. 이제 자본만 있으면 웬만한 영리 사업을 하라는 것, 그리하여 미국 달러를 최대한 벌라는 것이다. 이걸 2차 조치라 하자.
이 1차, 2차 조치들을 통해 혁명 65주년이 된 2024년, 쿠바도 서서히 중국식으로 달려가는 것일까? 그렇다면 쿠바는 '사회주의-자본주의'라는 '두 세계'가 통일된 하나의 나라일까?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오마이뉴스와 함께 참된 언론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경제-노동-교육-환경 등 분야에 나름으로 열심히 써보도록 하지요.
공유하기
쿠바 혁명 65주년에 경험한 '두 개의 쿠바'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