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돋이 딸아이가 그린 고성의 아침바다
원미영
올해 초등학교 4학년인 딸아이가 한참을 방에서 꼼지락거리다 손에 뭔가를 들고나왔다.
"엄마, 이거 내가 그린 거야! 어때?"
고사리손으로 연필을 굴리고, 고심해서 색을 골랐을 노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작년에 온 가족이 고성으로 여행을 갔을 때 함께 해돋이를 봤던 것을 표현했단다. 고슴도치 엄마의 눈에는 피카소가 부럽지 않았다.
매일매일 즐겁게 그리던 아이는 어디서 들었는지 '예중'을 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곳에 예중이 있을 리는 만무하고 청천벽력 같았다.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아이는 꽤 오랫동안 포기하지 않았다.
아이는 얼마 전까지 다니던 학교 앞 작은 미술학원을 관뒀다. 섬세하게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는 학원에서 자주 하는 '만들기'가 싫다고 했다. 막상 학원을 관두고 다른 학원으로 옮기려니 선택의 기회가 많지 않았다. 지금까지 다녔던 미술학원보다 더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학원이 대부분이었고 어떤 곳은 중학생부터 다닐 수 있다고 했다. 결국 갈만한 학원을 찾지 못했다. 국·영·수 교과 학원에 비해 예체능 학원은 더 제한적이었다. 시골에서 선택할 수 있는 학원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에 쓴웃음을 지었다.
미술을 전공하고 대치동에서 입시학원을 운영했던 지인에게 조언을 구했다. 지인은 나의 이런저런 고민을 듣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서울로 가는 게 맞아!"
서울에서 태어난 것 자체가 스펙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교육뿐만 아니라 주거, 교통, 일자리, 복지 모든 인프라가 수도권에 몰려 있다. 누군가는 큰맘을 먹어야 가능한 것을 서울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당연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지만, 타고난 환경 때문에 꿈을 포기하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다. 어쩌면 처음부터 불공정한 게임이었는지도 모른다. 억울하면 서울에 살지 그랬냐고 다그친다면야 뭐, 할 말이 없다.

▲한국 근현대미술 명작전 무슨 생각하니 딸아?
원미영
줄 수 있는 게 사랑밖에 없다
지인은 예중입시를 위해 주중엔 개인 교습을 받고, 주말을 이용해 이틀 동안 서울의 입시학원에서 수업받기를 권했다. 영어와 수학도 미술만큼이나 중요하다고 했다. 감당해야 하는 교육비는 상상을 초월했다.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애초에 이곳에 집을 짓고 아이를 키우기로 마음먹었던 그 시작점부터 단단히 잘못된 것 같았다.
아이들이 누릴 수 있는 무한한 교육의 기회를 내가 빼앗은 건 아닐까? 별생각이 다 들었다. 누군가는 내 한 몸 불살라 자식 교육을 위해 최고의 환경을 제공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부모의 역할이라고 했다. 어쩌면 이런 부모의 불안감과 죄책감이 대한민국 사교육 시장에 불을 지피는 동력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부부는 머리를 맞대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남편은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무리하더라도 서울로 가는 방향으로 고려해 보자고 했다. 나 또한 무조건 시골살이를 고집할 이유도, 꼭 여기여야만 하는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막상 이곳 생활을 정리하고 도시로 간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영 불편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억누르며 우리가 왜 이곳에 왔는지 첫 마음을 되짚어 보았다. 발칙하고 무모했지만 '행복하게 잘 살고 싶다', 그 일념 하나였다.
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아이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너의 예중 입시를 위해 투자할 만큼의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없다고. 그림을 계속 그리는 방법이 꼭 예중을 가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간절히 원하고 포기하지 않으면 계속할 수 있다고.
아이는 어렵지 않게 수긍했다. 여름 수국이 흐드러진 우리 집을 아끼고, 지금 다니는 학교와 친구들을 누구보다 사랑하기에.

▲수국맛집 해가 갈수록 더욱 풍성해지는 여름수국 라임라이트
원미영
아이는 현재 미술 학원에 다니지 않고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다. 얼마 전에는 스스로 알아본 대회에 지원하여 입상하는 작은 성과를 냈다. 학교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몇 가지 공모전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지난달부터 아이와 나는 지자체 예술 지원사업의 일환인 문화창작공간에서 무료로 어반스케치를 하고 있다. 퇴근 후 허겁지겁 밥을 먹고 딸아이와 함께 두 시간 동안 수업을 듣는다. 아이는 수강생 중에서 가장 어리다. 열한 살과 60대가 함께하는 수업이다.
어른들 사이에서 칭찬받는 것이 좋은지 아이는 빼놓지 않고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이론 수업을 들을 때마다 꾸벅꾸벅 조는 엄마의 저질 체력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달란트를 한껏 발휘 중이다.
남에게 보이는 것에 초점을 두기보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고 즐기는 사회, 그런 세상이 꿈속에서만 존재하지 않기를 꿈꾼다. 옳은지 그른지 답을 알 리는 없는 육아의 세계 속에서 흔들리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이번에도 우리만의 방식으로 이 위기를 잘 헤쳐 나갈 것이다.
지속가능한 가치로 아이들을 길러야 한다는 의미를 담아 육아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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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중' 가고 싶단 아이... 하지만 시골에 남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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