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에 올라가기 전, 이구영이 상투틀고 찍은 사진.
심지연
이구영이 항일운동의 대열에 서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구한말 의병운동에 앞장섰던 경험이 일정 부분 작용했다. 또한 사람을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아버지 이주승의 철학이 내림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구영은 어릴 때부터 "도련님" "서방님" 소리를 들으면서 컸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목에 가시가 걸린 듯했다. '왜 아버지뻘, 할아버지뻘 되는 이들이 내게 극존칭을 쓸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평생을 땀 흘려 일하는데 왜 항상 가난할까라는 의구심을 갖게 됐다.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그는 공부를 했다. 몽양 여운형 선생으로부터도 책을 빌려 읽었다. 그렇게 책이 왔다 갔다 하면서 '독서회 사건'이 터졌다. 이 일로 인해 이구영은 1944년 몇 달간의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본격적인 가시밭길이 시작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이구영은 고향을 오가며 최문용, 송원균, 김기한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목표로 '월악동지회'를 결성했다. 이전까지 이구영과 최문용이 책 속에서만 독립과 혁명을 꿈꿨다면, 현실 속에서 자그마한 실천을 도모해보자는 것이 이 모임의 취지였다.
월악동지회는 월악산을 중심으로 해서 제천 덕산, 한수면과 충주 살미면 신당리, 공이동의 뜻있는 청년들이 모여 비밀모임을 결성한 것이다. 이들은 책을 읽고, 정치교양을 하며, 징병이나 징용을 기피한 청년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주고, 주변 청년들에게 일제에 반대하는 선전전을 벌였다. 가시밭길을 맨발로 걷기 시작한 것이다(심지연, 위의 책).
배제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조선이 독립되면 '만인이 평등한 사회'를 쉽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이구영과 최문용의 생각은 해방 전후에 이러저러한 이유로 가로막혔다.
일제강점기 말에 최문용은 영등포로 달려갔다. 앞으로 사회를 변혁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를 조직해, 그들의 의식을 바꾸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동운동에 몰두하던 최문용은 현실의 벽에 부딪쳤다. 최문용은 명륜동에 굉장히 큰 집을 갖고 있었는데, 그 집의 지하실에 변재철과 함께 단파 장치를 설치해 놓고 방송을 듣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최문용이 협동단 사건으로 잡혔다. 이 일로 인해 영등포 일대에서 80여 명이 붙잡혔다. 일제강점기 말에 발생한 조직사건이었다.
해방 후에는 동지들에 의해 노동운동의 꿈이 좌절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직운동의 명수로 알려진 김삼룡에 의해서다. 조선공산당은 노동자 밀집 지역인 영등포를 직접 장악하겠다는 생각으로 김삼룡을 파견했다. 김삼룡은 기존 영등포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던 이들을 전국 각지로 분산시켰다. 이들의 빈 자리에 김삼룡이 직접 조직사업을 벌였다. 최문용은 노동운동이 정략적으로 이용되는 것에 분개해 조선공산당을 탈당했다.
자기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는 하지만 최문용은 혁명운동의 전선에서 동지들로부터 배제됐다. 최문용과 변재철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월북했다. 미군정의 탄압도 있었지만 영등포에서의 노동운동의 입지를 상실한 것이 주된 이유였다.

▲서울뉴스 조선공산당 경성시위원회 기관지 <서울뉴스>, 1946년경.
심지연
이구영과 최문용, 전사억이 심혈을 기울인 대중신문인 <서울뉴스>도 미군정의 탄압을 받아 발행이 중단됐다. <서울뉴스>는 통신사에 다니고 있던 최문용의 동생 최무용이 수집한 정보와 이구영이 독자적으로 수집한 정보를 종합해 엮은 대중신문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이구영은 서울에서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인민군은 서울을 포기하고 3.8선을 넘어야 했다. 그 대열에 이구영도 함께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두 청년 이구영, 최문용이 남조선(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과 대한민국에서 배제됐다.
두 청년 중 한 명은 한국전쟁기에 한반도에서 영원히 거세됐다. 정부수립 이전 월북한 최문용과 변재철은 북한에서 변호사와 검사가 됐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법과대학을 다녔던 이력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나자 그들은 북한(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사법상 이승엽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즉 유엔군에 의해 서울에 이어 평양이 함락된 시기에 인민군이 북쪽으로 후퇴할 때였다.
다른 이들에게는 당에서 차가 배정됐다. 하지만 최문용과 변재철에게는 차가 배정되지 않았다. 뿐만아니라 그들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이라는 질문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역사의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꾸준히 '만약 ~이라면' 이라는 가정을 세워야 한다. 조국의 해방과 더불어 사는 사회를 꿈꿨던 두 청년 이구영과 최문용의 삶에도 마찬가지다.
만약 미군정이 조선공산당과 남로당을 합법화했다면, 만약 좌우합작과 남북연합에 의한 통일국가가 만들어졌다면, 좌우정당이 극단적인 투쟁을 벌이지 않고 민주주의 룰에 기초해서 선의의 정책경쟁을 벌였다면 한반도는 어땠을까. 즉 배제의 정치가 아닌 타협과 관용의 정치가 이뤄졌다면 어떠했을까?
두 청년이 그들의 고향을 버리고 북한행을 선택했을까? 두 청년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월악산 인근의 청년들이 빨치산의 길을 걸었을까? 보다 거시적으로 이야기하면 '민족 최대의 비극 한국전쟁이 일어났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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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소리 듣던 부잣집 자제들, 가시밭길 걸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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