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대교. 행담도 휴게소. 행담도 하면 주로 떠올리는 단어다. 하지만 고속도로와 휴게소가 들어서기 직전인 2000년까지 이 섬에 사람이 살았다. 우리 역사도 담겨 있다. 개발에 밀려 끊어진 행담도 사람들이 역사와 이야기를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당진시에서 최근 펴낸 <그 섬에 사람이 살았네>를 주로 참고하고, 추가 취재한 내용을 보탰다.[편집자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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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담도 앞바다는 항로표지가 없던 옛 시절에는 오가는 배의 항로를 가늠하게 하는 등대 역할을 했다. 실제 일제총독부는 1931년 행담도 서쪽 펄 위에 콘크리트로 큼지막한 등대를 세웠다. 이 등대는 2000년 철거됐다. 그 자리에는 2007년 철로 만든 새 등대가 설치됐다. ⓒ 당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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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9년 당시 당진군이 조사한 지명조사철에는 행담도 등대에 대해 '단기 4264년(1931년) 왜놈들이 세운 것이라고 함'이라고 기재했다. ⓒ 국토정보지리원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행담도'는 고산자 김정호가 발간한 '대동지지'(1864년, 고종 원년) 홍주 편에 있다.
행담도는 신북면(현 신평면) 동쪽 경계에 있는 작은 섬으로 그 아래에 대진(현 한진)이 있고 수원 첩로(수원 가는 지름길)로 바다 한가운데 영옹암(영웅암)이 있다(新北之東小島也下有大津水原捷路中令翁岩詳水原).
'수원 첩로'(水原㨗路, 수원 가는 지름길). 이 넉 자가 함축하는 의미는 크다. 행담도 앞바다가 예로부터 충청과 경기·서울을 잇는 교류의 중심 통로이자 해역이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충청-수도권 잇는 중심 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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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담도가 속한 아산만 유역을 표기한 여지도(국토지리정보원 고 4709-78-여지도 아국총도). 지도를 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 행담도 주변을 홍주(홍성)-면주(면천) 등 여러 읍으로 통하는 첩로(지름길)로 쓰고, 대동지지(1864년)에 행담도를 '수원 첩로'(水原捷路, 수원 가는 지름길)라고 기록했는지를 알 수 있다. ⓒ 국토지리정보원
이보다 300여 년 앞선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는 행담도 앞바다에 서 있는 영웅 바위와 함께 '첩로'(지름길)라는 표현이 나온다.
가운데에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친 영웅암이 우뚝 서 있는데 높이는 100척가량 된다. 만조 때에 배로 건너면 홍주(홍성)-면주(면천) 등 여러 읍으로 통하는 첩로(지름길)다.
행담도 앞바다가 서울 경기를 잇는 주 교통로일 뿐만 아니라 군사적 요충지고 해상 중심 시대 주 항로였음을 말해준다. 실제 행담도가 속한 아산만 일대는 삼국시대 때부터 군사적 요충지이자 문화 유입지였다. 서역으로 가는 주 항로로 교류의 중심 해역이었다. 신라와 백제, 고구려는 아산만을 차지하기 위해 여러 차례 충돌했다. 특히 무령왕(백제 25대 왕) 때는 백제의 전진기지이자 문화 유입지로 발전했다. 고려 때는 몽골군과 왜구가, 조선 때는 왜구의 침범이 빈번했다.
<세종실록지리지>(149권)에는 서산 해미로 충청병마도절제사가 옮겨오고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충남 서해안 일곱 곳 주둔했는데 이중 대진만호(大津萬戶)는 신평현 대진(大津)에 병선 13척과 함께 선군 794명이 있었다. 향토학자들은 대진(한진)만호 가 있던 곳을 영웅바위 인근인 송악읍 오곡리 전대리 주변으로 보고 있다.
고종 3년(1868) 때는 미국이 독일 상인 오페르트를 내세워 남연군묘(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이자 고종의 할아버지)를 도굴하기 위해 행담도에 정박했다. 당시 급박했던 상황이 '고종실록'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이달 18일 오시, 세 돛 짜리 이양선 1척이 서쪽으로부터 와서 홍주 행담도에 정박했습니다. 종선 1척은 돛이 없이도 다닐뿐더러 배 안에서는 연기가 나면서 빠르기가 번개 같았습니다. 얼마 후 본 군이 구만포에 도착해 육지에 내렸습니다. (중략) 러시아 군대라고 하는 병졸 100여 명이 군복을 입고 창, 칼, 총 등을 가지고 곧바로 관청으로 들이닥치더니 무기를 빼앗고 관청 건물을 파괴하였습니다. - 고종실록 5권
20일 진시에는 곧바로 홍주 행담도로 가서 큰 배와 함께 정박하였으며 썰물 때에는 수원 영웅암의 바다 밖으로 물러가서 정박하였고... - 고종실록 5권
남연군 묘 도굴 사건은 미국이 남연군의 유골을 미끼로 조선 정부와 통상 조약을 체결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도굴 사건은 미수에 그쳤지만 이를 계기로 조선에서는 서양인을 배척하려는 분위기가 더 커졌다. 흥선대원군도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이처럼 행담도는 서구 열강의 침략과 대응 역사 속 한복판에 서 있었다.
"왜군들은 달빛에 비친 바위를 조선 군사로 보고...", 영웅바위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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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담도 앞바다에 있는 영웅바위 모습. ⓒ 당진시
조선후기 문신 이유원은 1871년에 쓴 '임하필기'에서 물줄기 근원을 열거하면서 행담도를 언급했다. 행담도가 아산만 북쪽의 상징이 되는 섬이었음을 보여준다.
행담도 앞바다에 우뚝 서 있는 영웅암(영웅바위)은 <택당집> <지봉유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옛 문헌에 수시로 등장한다. 16세기 초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영옹암(令翁巖)'으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영공암(令公巖)', 중국 청나라 때 청국 군함이 정박했다는 기록에는 여흥암(礪興岩)으로 썼다. 18세기 광여도(廣輿圖)의 수원부에는 합옹암(合瓮巖)으로 돼 있다. 1872년 아산현 지도에는 영웅암(灵雄岩)이다. 고종실록에는 여흥암(汝雄巖)으로 기록했다.
'숙종실록'에는(숙종 27년 3월, 35권) "영공암(令公巖)이 이달 초 6일에 구름과 안개 속에서 갑자기 벼락으로 부서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로 미루어 벼락을 맞기 이전에는 훨씬 웅장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택당집>(저자 이식, 1584~1647)에는 '영웅암'을 주제로 쓴 한시가 있는데 "뱃사람들 공경하며 제사 올리며, 영공(令公)이라 이름 붙인 것도 당연하다, 오랑캐 평정하고 민생 안정시킬꼬"라고 노래했다. 이순신(李舜臣)을 '충무공'으로 높여 부르듯 영웅 바위를 '영공'(조선시대 '영공'은 지방수령을 일컫는 말이기도 했다)으로 높여 부르고 공경하며 제를 올렸다는 것이다.
영웅 바위가 '영공'으로 추앙받게 된 배경은 영웅바위 전설에 잘 담겨 있다
"앞바다에 커다란 바위가 오르고 그 둘레에 조그만 바위가 솟아올랐다. 훗날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배를 타고 몰래 오다가 이 바위 앞에 이르렀다. 왜군들은 달빛에 비친 바위를 조선 군사로 보고 달아났다. 왜적들을 지킨 바위라 하여 '영웅 바위'라고 불렀다. - 1966년 당시 대전대 국문과 교수인 한상수씨가 당진시 송악면 기지시리 이옥심으로부터 채록
행담도는 항로표지가 없던 옛 시절에는 오가는 배의 항로를 가늠하게 하는 등대 역할을 했다. 실제 조선총독부는 1931년 행담도 서쪽 펄 위에 큼지막한 콘크리트 등대를 세웠다. 이 등대는 2000년 철거됐다. 그 자리에는 2007년 철로 만든 새 등대가 설치됐다. 당진과 평택항을 오가는 선박이 많아지자 영웅바위 위에도 무인등대를 만들었다. 당진시에 설치된 등대는 이 두 곳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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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구만포 포구 모습. 남연군 묘 도굴사건 때 오페르크 상선의 상선(종선)이 정박했던 곳이다. 이보다 큰 본선은 행담도에 정박했다. ⓒ 충청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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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담도 포구(1980년). 고종(3년) 때는 미국이 독일 상인 오페르트를 내세워 남연군묘(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이자 고종의 할아버지)를 도굴하기 위해 행담도에 정박했다. 당시는 포구가 없어 행담도 앞바다에 정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당진시
을사늑약(1905)이 체결되자 일본에 저항하는 의병들이 총을 들고 오간 곳도 행담도 앞바다다.
천안에 있는 성환수비대에서 토벌대를 보내 7월 17일 행담도 부근 해상에서 적선과 맞닥뜨려 2명을 사로잡고 총 5자루를 노획했음. 적은 마침내 육상으로 도주함. 아병 1명이 부상함. - (1908년 7월 26일 일본군 참모장이 일본 정무국장에게 통지한 정보 문서
일본 수비대가 '적'으로 표현한 사람들은 전국에서 국권 회복을 위해 궐기한 의병들이다. 1908년 3월, 홍성경찰서가 의병 운동의 거점이었던 당진 소난지도를 기습공격해 의병대 41명이 전사하고 50여 명이 흩어졌다. 당시 관련 기록은 소난지도에서 큰 타격을 입은 뒤인 같은 해 7월에도 의병부대가 배를 타고 행담도 인근 경기지역을 오가며 활동을 벌였음을 보여준다.
소설 <상록수>의 저자 심훈의 유작은 시 <오오, 조선의 남아여>(1936)지만, 당진 필경사에서 당진을 소재로 쓴 유작은 <칠월의 바다>다. 행담도 사람의 삶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기도 하다. 심훈은 작고하기 1년 전 수필 <칠월의 바다>에 가치내(행담도)에서 처음엔 갓 태어난 어린아이를, 이듬해에는 돌 지난 아이를 보며 해방의 미래를 점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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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훈. 그는 1936년 작고하기 전인 1934년과 1935년 두 차례 행담도(가치내)를 방문한 후 수필 <칠원의 바다>(1935년)을 남겼다. ⓒ 오마이뉴스
외로운 섬 속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 속에서도 생명이 자라나고 있지 않은가? (중략) 우리의 등 뒤가 든든해지는 것 같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 어린 생명이 교목과 상록수와 같이 장성하는 것을 생각할 때, 한없이 쓸쓸한 우리의 등 뒤가 든든해지는 것 같이 느껴지지 않는가! - 심훈의 수필 <칠월의 바다> 중
심훈의 희망대로 행담도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가 열두 살 되던 해(1945)에 해방을 맞는다. 그 아이 또한 행담도에 정착해 대를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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