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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끼리 명절을 쇤 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지금까지 계산원으로 일했던 곳은 마트, 편의점, 놀이공원 기념품 점으로 모두 1년 365일 운영하는 곳이었다. 명절이 가까워지면 "명절에 어디 안 가지?" 비슷한 소리를 듣기 일쑤였다. 혹은 당연히 일하는 걸로 알고 "그날 잘 부탁해"라는 소리를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굳이 명절에 친척들을 만날 마음도 없었다. 계산원으로 일한다고 하면 "나중에 어쩌려고 그래"로 시작해서 누구는 공기업 취직했더라, 누구는 대기업 다니는 남자랑 결혼했더라, 등등 만나는 사람마다 기나긴 잔소리를 할 게 뻔했다. 아무리 맛있는 명절 음식이 눈앞에 있어도 어디 맘 편히 먹을 수나 있겠는가.
그래서 반은 떠밀려서 일했고 반은 자발적으로 일했다. 굳이 가족을 보지 않더라도 집에서 실컷 먹고 실컷 자고 실컷 영화 보면서 연휴를 보낼 수도 있었지만 안 그래도 빠듯한 월급에 쉬는 만큼 일당이 빠진다고 생각하니 다음 달 생활이 걱정이었다. 그때마다 '돈이나 벌자'는 생각에 남들이 못 나오는 날까지 대타로 나섰다.
이미 6년 전 일이지만 한가위만 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날이 있다. 아마 6년이 더 지나도 그날 내가 달에게 빈 소원은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6년 전, 추석 날의 난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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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년 365일 손님을 맞이하는 편의점(기사 내용과 무관함) ⓒ 김아영
아무리 명절의 의미가 빛바랬다고 해도 명절에 일하는 건 평소와 기분이 달랐다. 3대가 같이 편의점에 들어와 손주의 간식거리를 같이 고르는 모습을 보는데 괜히 내 신세가 서글퍼졌다.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아이가 고른 건 평소 내가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생각했던 장난감. 할머니 되시는 분은 고민 없이 그걸 계산했고 아이는 장난감을 받아들고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좋아했다. 가족 같은 거 필요 없다고, 평생 혼자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 거라고 큰소리 떵떵 치던 나지만 이런 장면을 보면 어쩔 수 없이 마음에 쓸쓸한 기운이 서렸다.
애써 담담하게 근무를 서는데 물류를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명절을 대비해서 잔뜩 발주를 넣은 점장님이 원망스럽지만 이럴 줄 몰랐던 것도 아닌데 누굴 탓하랴. 물류 기사님이 위로한다고 건넨 "명절인데 고생이 많네" 한 마디에 감사 인사를 건네면서도 혼자 있을 땐 침울한 표정을 감추기 어려웠다.
'어쩌면 내가 사서 고생하는 건 아닐까. 왜 일 년에 딱 두 번 있는 명절도 제대로 못 쉬는 걸까. 성실히 일하면 형편이 나아지긴 할까.'
단골손님들도 날 발견하고 놀라움과 반가움이 반씩 섞인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추석인데 어디 안 갔어? 부모님 안 보러 가?"
"네, 집이야 아무 때나 가면 되죠."
나는 씩씩하게 대답하면서도 어딘가 들뜬 분위기를 풍기는 손님들의 얼굴을 몰래 부러운 눈길로 훔쳐보았다. 아무리 명절이란 걸 인식하지 않고 덤덤하게 일하려고 해도 그날따라 유난히 시간이 더디게 가고 매 순간 피로가 배로 쌓이는 듯 했다. 나에게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매일이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을 뒤집어야 맞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가 평소만 같으면 했다.
자정이 지나니 슬슬 취객 손님이 많아졌다. 얼굴이 불콰한 손님들은 대부분 목청이 컸고 행동에 조심성이 없었다.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대화는 애초에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제법 경력이 쌓였을 때라 나름 대응 방법을 터득한 후였다.
밑도 끝도 없이 신세 한탄을 하는 분은 최대한 무미건조하게 "아, 네" 하고 대답한 뒤 바쁜 척하면 그만이었고, 반말에 삿대질을 하며 대뜸 고함을 치는 분은 '이 사람이 하는 말은 나랑 아무 상관도 없다. 나는 그냥 이 상황을 멀리서 지켜보는 사람일 뿐이다' 이렇게 자기 암시를 하며 손님이 제풀에 지쳐 나갈 때까지 버텼다. 아가씨 운운하며 농담조로 성희롱을 하는 손님은 경멸 어린 눈빛으로 똑바로 쳐다보면 대부분 무안해 하며 입을 다물었다.
새벽 세 시쯤 되었을까. 잠시 손님이 뜸해져서 한숨 돌릴 겸 휴대전화로 라디오를 들었다. 그러자 방심한 죄를 묻겠다는 듯 느닷없이 두 남자가 서로의 멱살을 움켜쥐고 편의점 안으로 들이닥치는 게 아닌가. 둘은 서로를 죽일 듯이 밀어붙이며 엎치락뒤치락 편의점 안에서 난투극을 펼쳤다.
아무 조짐도 없이 난데없이 펼쳐진 상황을 파악하는 사이, 두 남자는 매장을 한 바퀴 돌며 매대에 있는 물건을 닥치는 대로 상대방에게 집어던졌다. 그러다 한 남자가 다른 남자를 계산대 위로 때려눕혔고 밑에 깔린 남자가 버둥거리는 힘 때문에 포스기가 밀려서 떨어질 것 같았다. 나는 체중을 실어 포스기를 지켰고 두 남자의 주먹다짐은 더 격해지면서 계산대 앞 매대를 쓰러뜨렸다.
한쪽이 밀리는가 싶던 싸움은 밀리던 쪽의 반격으로 다시 격렬해졌다.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경찰에 신고를 한 다음 점장님에게 연락을 드렸다. 점장님은 위험하니 창고에 들어가 있으라고 하셨다.
팍! 쨍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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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 편의점 속 술 진열장 ⓒ 김아영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 남자가 와인을 집어 다른 사람에게 내리쳤고 이에 질세라 다른 사람도 깨진 병조각을 들고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이걸 막는다고 상대가 팔을 들어 올렸는데 병조각이 지나간 곳이 곧 붉은 피로 물들었다. 팔목에서 팔꿈치 부근까지 꽤 긴 상처였고 출혈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이미 술로 뒤덮인 바닥에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지고 그걸 또 몸싸움하면서 밟고 문대고 하는 사이 매장 안은 술 냄새와 피비린내로 뒤덮였다. 어느 새 출입문 바깥에는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두 싸움꾼은 한데 엉기며 편의점 밖으로 나갔고 고래고래 내지르는 욕설과 협박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다행히 둘이 시야에서 벗어나기 전 경찰이 도착했고 머지않아 점장님도 와서 경찰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셨다.
나는 넋이 나간 채 난장판이 된 매장을 둘러보았다. 정말 별 일이 다 있구나, 싶었다. 경찰과 CCTV를 확인하러 들어가기 전 점장님이 지갑에서 오만 원 권 지폐를 꺼내서 나에게 건넸다.
"오늘 많이 놀랐지. 택시 타고 이만 들어가 봐. 가는 길에 청심환이라도 사 먹고."
월급이 깎일까 걱정했던 그 시절
나는 얼떨결에 오만 원을 받아들고 편의점 밖으로 나왔다. 청심환을 사먹기에 내 심장은 너무도 평온했다. 구경꾼들은 어느새 흩어지고 없었고 밤하늘엔 보름달이 환했다.
번화가라 빈 택시가 골목마다 보였지만 나는 그저 걸었다. 오만 원을 헛되이 날리고 싶지 않았다. 당시 시급 기준으로 약 일곱 시간을 일해야 얻을 수 있는 소득이었다. 말이 일곱 시간이지 그만큼 일하고 얻는 피로에 비하면 늘 아쉬운 금액이었다. 하지만 맨입이면 얘기가 달랐다. 말 그대로 감지덕지였다.
편의점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 이십 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번화가에서 멀어질수록 길은 으슥해졌고 가끔씩 불쑥 나타나는 행인을 만나면 깜짝깜짝 놀라며 움찔거렸다.
새벽 퇴근길에 택시를 타는 건 절대 사치가 아닌데도, 밤길을 혼자 다니는 게 위험하단 걸 알면서도 나는 오만 원이라는 여윳돈이 주는 심리적 안정감을 좀 더 누리고 싶어서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애써 낙관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심지어 오늘 출근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더 나아가 소란을 피워준 두 취객이 고맙기까지 했다.
밤길이 좀 무서우면 어떠랴. 나는 오만 원으로 무엇을 할지, 정확히는 그동안 밀어둔 소비 중 무엇을 가장 먼저 실천할지 고민하며 집에 당도했다. 건물에 들어가기 전, 그래도 한가위인데 소원은 빌자는 마음으로 고개를 들어 달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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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만큼은 달빛이 아름답다기보다 창백해 보였다. ⓒ 김아영
그런데 환한 달빛이 편의점의 창백한 형광등 불빛처럼 보였다. 자연스러운 빛이 아니라 억지로 힘을 쥐어 짜내는 것 같았다. 저기도 누군가 밤샘 근무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착잡한 생각이 마음자락을 겹겹이 휘감았다.
저 달에 얼마나 많은 소원들이 들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다시 달을 보니 둥근 달이 풍요로워 보이는 게 아니라 곧 터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나는 내 소원을 내려놓고 달에게 응원의 말을 전했다.
'명절에 고생이 많으시네요.'
그 오만 원을 어떻게 썼는지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돈을 아끼자고 꼽꼽한 밤공기를 뚫고 집까지 걸어온 지친 발걸음이, 유혈 사태를 보고 퇴근하면서도 '일찍 퇴근하면 월급에서 그만큼 깎이는 건가?' 고민했던 소심한 청춘이 조금 안쓰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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