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사진이 이메일이라면 필름 사진은 손편지 정도로 여기며 천천히 세상을 담습니다. 여정 후 느린 사진 작업은 또 한 번의 여행이 됩니다. 수평 조절 등 최소한의 보정만으로 여행 당시의 공기와 필름의 질감을 소박하게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사진 하단에 사진기와 필름의 종류를 적었습니다.[기자말] |
추석이 오면 시원해질 거라 생각했다. 서늘한 밤 공기를 마음껏 들이킬 생각에 미리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웬걸. 성묘를 하고 반가운 친척들을 만난 후에도 열대야는 계속됐다.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직장으로 복귀하니 중요한 공간에 에어컨이 말썽이었다. 서비스센터는 문의가 폭주중인지 도통 연결되지 않았다.
TV를 틀었더니 화려한 광고가 나온다. "눈부신 에너지로 더 밝은 미래를 불러오고, 내 손 위에 무한한 에너지가 솟아나고, 지구를 넘어 화성까지 에너지를 보낼 거예요!"라는 광고 문구가, 벅찬 듯한 목소리로 전달된다. 한수원(한국수력원자력)의 홍보 영상이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철없을지 모르는 탄식을 하게 된다. 우리는 굳이 더 잘 살아야 하는가. 자급자족을 훌쩍 넘어서는 성장과 생산, 좀 더 편리하기 위해 새롭게 만들어 내는 기계들, 이윤을 위해 계속 순환하게 만드는 유행과 패션. 이 모든 것이 과잉이고 한도 초과이지 않은가.
전 지구적인 욕심에 환멸을 느낀다. 10년 후는 기후적으로, 정세적으로 어떤 위기가 닥칠지 눈앞이 캄캄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관념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로만 느껴졌으나, 당장 역대급 최장 열대야를 겪고 나니 이제는 정말 손끝의 감각으로 생생하게 전해지는 실제적 과제가 되었다.
핸드폰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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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단골 자리 샘터, 모닥불 화로가 함께 있고 오토캠핑을 할 수 있는 자리 ⓒ 안사을
인제군 원대리의 어느 숲 속. 하늘내린터라는 이름에 걸맞게 자연 그대로의 농법을 고수하며 귀농, 귀촌의 노하우를 전달하는 사람이 있다. 장화에 목에 두른 수건까지 천상 농사꾼의 행색이지만, 깊고 맑은 옹달샘 같은 눈동자를 지닌 분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살지 않으면 절대 가질 수 없는.
하늘내린터와 인연을 맺은 것은 7년 전이었다. 무료로 야영할 수 있는 곳을 찾던 중이었는데, '팜핑'이라는 생소한 개념을 지닌 공간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아보니 소정의 금액을 지불하고 농산물 수확 체험 등을 하면서 야영을 하는 곳이었다. 하루 이용료라고 해봤자 채소와 장작을 사는 비용보다 적었으니 무료나 마찬가지였다.
재미있는 것은, 반드시 수확 체험을 해야만 한다는 조건이었다. 고추, 감자, 각종 쌈채소를 직접 따고 즐기는 활동을 필수적으로 수행해야 그곳에 머무는 자격이 생기는 것이었다. 자연 속에서 직접 건강한 수확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데 그것이 필수적인 조건이라니, 나에겐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인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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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확 중 저녁 찬거리가 될 각종 채소를 따고 있다. 딱 우리가 먹을 만큼만.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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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척 완료 야콘, 쌈추, 상추, 케일 등 다양하기도 하다. 당연히 모두 무농약, 무비료 ⓒ 안사을
해발 700미터 정도 되다 보니 한여름엔 피서도 되고, 한겨울엔 무시무시한 추위를 즐겨보는 경험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전파가 도달하지 않는 오지에서, 전기도 없이 각종 세제 등 오염 물질이 될 수 있는 것들을 사용하지 못하면서 지내야 했던 활동이 오히려 참 좋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본 원장과 자연에 대한 정신세계를 같이 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일종의 회원 자격을 얻게 되었다. 자연 속에서 푹 쉼을 얻고 그저 소박하게 놀았을 뿐인데 말이다. 전주에서 인제까지 제법 먼 거리지만 그곳에 다녀올 때마다 항상 몸과 마음이 깨끗해지는 경험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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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차 한 잔 맑은 공기 속에서 맞이하는 숲속의 아침 ⓒ 안사을
그야말로 유유자적이다. 해가 긴 여름, 6시면 잠이 깨어 텐트 밖트로 나와 지인이 준 귀한 보이차 한 잔을 끓여 마신다. 전파가 닿질 않으니 자연스럽게 핸드폰은 어디에 두었는지도 잘 모른다. 귓가에 들리는 것은 새 소리요,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은 맑은 찻물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손에 책을 든다.
두세 시간 정도 독서와 해찰을 반복하다 보면 슬슬 배가 고프다. 긴 여행을 출발하면서 사 두었던 누룽지를 물에 불려 끓여 먹는다. 오전 10시가 다 되어도 아직 공기가 서늘하다. 폭염이 계속되어도 열섬 현상이 없는 산속에선 에어컨은 물론이고 선풍기 없이도 오전까진 지낼 만하다.
그러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손에 잡힐 만큼만 얻고 벌면서 살면 좋지 않을까?', '전 세계 사람들이 모두 이런 마음으로 살면 환경 파괴와 전쟁, 기근과 인권 유린 같은 비극 없이 살 수 있지 않을까?' 등등 한없이 동화 같은 생각 말이다.
화성에 에너지를 보낼 수 있다고 자랑하는 모습이 퍽 재미있다. 지구가 더 이상 살기 힘든 곳이 될 때 살 곳을 마련하기 위해 우주로 눈을 돌려야 한단다. 이 얼마나 수 세기에 걸친 자작극인가. 탐욕으로 지구를 망쳐놓고, 살 곳이 막막하니 우주적 디아스포라를 위해 엄청난 비용과 자원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우리를 현혹하고 있다.
이제는 정말 속도를 늦춰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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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영지 바로 옆 골짜기를 타고 쉼 없이 흐르는 맑은 물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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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어버린 자작나무 원대리 자작나무숲의 현재 모습. 겨울철 기온이 높아져 눈이 슬러시처럼 달라붙는 바람에 나무가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휘었다고 한다. ⓒ 안사을
이제는 잠시 멈추고 속도를 늦춰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지구를 탈출할 계획을 세울 비용으로 지구의 환경을 살리는 데에 투자하는 편이 훨씬 더 효율적일 것 같다. 각종 개발을 위해 끝없이 공장을 돌리면서 탄소 절감을 외칠 것이 아니라, 그냥 줄이고 멈추는 것이 오히려 더 낫지 않을까.
실제로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여 우리가 멸망하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우주 진출을 위해 최첨단 기술을 더욱 발전시키고 자본과 자원을 반드시 투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낙원 같은 지구를 그저 감사함 속에서 만끽하며 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과학적인 활동 자체를 하지 말자는 것이 절대 아니다. 순수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우주에 대한 연구와, 미시세계를 향한 탐구는 그 자체로서 숭고하다.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데에 이바지한 측면이 당연히 크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연구와 탐구가 생태계의 선순환을 방해하는 수준의 자원 소비라면 이제는 점차 멈추었으면 한다. 미지의 세계는 언제나 남아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그동안 알아낸 모든 것을 동원하여 지속 가능한 지구 생태계를 보호하는 것이다.
여행기라고 해놓고 뚱딴지같은 말이 길었다. 하지만 결코 연관성 없는 궤변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마음껏 들이킬 수 있는 공기가 없다면, 숲 속을 졸졸 흐르는 맑은 물이 없다면, 탐욕스러운 전쟁으로 인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길이 없다면, 우리가 여행이라고 부를 수 있는 활동이 가당키나 할 것인가. 이젠 정말 코 앞에 닥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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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고 소중한 우리가 지켜야 할 우주는 오히려 이 작은 수박 안에 있지 않을까.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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