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 아들이 편지에 동봉한 엄마 그림
이혁진
둘째 아들은 할아버지 생신을 축하하는 편지에서 선물을 준비하지 못해 미안하다면서도 용돈을 더 달라고 당돌하게 요청한다. 이어 용돈을 저금해 할아버지 온열치료기를 사드리겠다고 해서 웃음이 터졌다.
사실 이러한 표현들은 철없는 그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구체적으로 용건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입장을 담은 솔직함이 부럽다.
편지 중에 가끔 나도 등장하는데, 아이들은 나를 '고생하는 아빠'로 묘사했다. 큰 아들은 중학교 1학년 어버이날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특히 아빠는 요즘에 더욱 힘든 것 같아요. 그 IMF가 뭔지 월급도 깎이고 피곤해 들어오시는 아빠를 보면 미안함과 죄송함으로 아빠에게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엄마는 아빠의 깎인 월급 때문에 반찬도 제대로 못해준다고 하는데 그러지 마세요. 나는 반찬이 없어도 밥 잘 먹을 수 있어요. 내일이라도 김치 하나만으로도 밥을 먹어도 좋아요."
꾹꾹 눌러 쓴 손글씨에는 아이들 특유의 순수한 동심과 기특함이 스며 있다. 나는 아이들 편지를 다시 읽으며 눈물이 찔끔 났다. 그 시기 썼던 아이들 소망이 지금은 어느 만큼 이뤄졌는지 나름 가늠해 보기도 했다.
애들이 군에 갔을 때 주고받은 편지도 꽤 많았다. 군사 우편은 어린 시절 편지와 달리 미래와 친구 등 인생의 과제와 고뇌가 엿보인다.
특히 나는 애들의 군복무 시절 열심히 답장을 보냈다. 나는 편지에서 고된 훈련보다도 조직 생활과 친화력의 중요성을 누차 강조했다. 사실 애들은 이 부분에 소홀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지금 회고해 보면 아이들에게 편지에서 시시콜콜 아버지 걱정을 늘어놓고 넋두리도 많았던 것 같다.

▲ 경주 여행 가족사진, 애들 초등학교 시절 유일한 가족사진
이혁진
장성한 애들에게 자신들이 쓴 옛 편지들을 촬영해 보내주었더니, 아무래도 감흥이 적은 듯했다. 되레 내가 너무 감상적 아니냐는 반응도 보인다. 난 애들이 아직은 추억을 반추할 정도의 나이가 아니라고 짐작했다.
나는 아이들이 언젠가 이러한 추억들을 반드시 소환할 것이라 예상한다. 내 경우 편지나 글로 위로 받았을 때의 기억은 유독 인상 깊게 남아 평생을 함께하는 것 같다. 애들도 언젠가 어려울 때, 자기 어린 시절 편지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장차 이 편지들의 소중한 의미를 새길 때를 대비해, 나는 작은 방에 수납장을 별도로 만들어 애들의 편지함을 보관했다. 여기엔 애들의 졸업장, 상장, 기념 사진 등 어릴 적 추억거리도 있다.
이와 함께 결혼 후 내가 사용하던 '손지갑'도 버리지 않았다. 아내가 사 준 가죽지갑 3개는 색깔이 바래고 헐어도 추억으로 남겼다. 지난해 관람한 '피천득기념관'에 전시된 유품들도 대부분 이처럼 평범한 물건들이었던 기억이 났다.
잊고 있던 저금통 발견... 손에 돈 때가 묻어 까매졌다

▲ 고 피천득 선생 전시 유품
이혁진

▲ 돼지저금통
이혁진
한편 짐을 정리하다 돼지 저금통도 장롱 뒤에서 찾았다. 집 수리를 하지 않았으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을 터. 저금통은 얼추 20년 정도 됐다.
저금통 크기는 실제로 큰 돼지 얼굴만 하다. 조그만 저금통이 번거로워 큰 것을 찾다 고른 기억이 생생하다. 한푼 두푼 동전이 언젠가 목돈 되리라는 야무진 꿈으로 시작했는데, 바쁠 때 장롱 뒤에 놔두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저금통을 찾고 보니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아내도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내는 벌써 돼지 속에 들어있는 금액을 계산하고 있었다.
저금통 무게도 상당했다. 10Kg이 넘었다. 아내와 내가 힘을 합쳐 들기에도 낑낑 맬 정도다. 아내는 거들면서 젖 먹던 힘까지 내는 거 같았다.
아내와 '돼지 잡는 날'을 잡았다. 신문으로 자리를 깔고 배를 열어 보니 동전 특유의 냄새가 풍겼다. 천 원, 오천 원, 만 원짜리 수십 여 장의 지폐가 섞여 있었다.
우리는 돼지에서 나온 동전과 지폐들 앞에서 부자가 된 듯했다. 즉석에서 아내와 내기를 했다. 저금통에 얼마가 들어있는지 근사치를 맞추는 사람에게 3만 원 주기로 했다. 나는 저금통 금액을 55만원, 아내는 50만원을 예상했다.
동전을 단위 별로 구분하고 나는 동전을 세고 아내는 봉지에 담는 데에만 한 시간 이상 걸렸다. 손은 돈 때가 묻어 까매졌다. 오래 쭈그리고 앉은 탓인지 허리가 아팠다.

▲ 돼지 저금통에서 꺼낸 동전들
이혁진
저금통 총 금액은 지폐를 포함해 60만 원이 조금 넘었다. 틈만 나면 동전을 집어넣은 정성과 오랫동안 저금한 기간에 비하면, 금액이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동전 쓰는 일만 남았다. 알아보니 은행에서 동전은 찬밥 신세다. 지정된 날과 시간에 동전을 구분해 가져가야만 환전해 준다는 것이다.
아내도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동전으로 지불하면 귀찮아한다고 귀띔했다. 이쯤 되면 '돼지 저금통 추억'도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 환전을 하고 나니 왠지 허탈했다. 계좌에 입금하고 손에 쥐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돼지저금통 돈을 아내에게 선물했다. 무척 고맙다고 할 줄 기대했는데, 아내가 사뭇 냉정한 투로 말했다. "이 돈은 나 혼자를 위해서보다는 우리 가족을 위해 사용하겠다"라고.
결국, 내가 제시한 55만 원이 실제 액수인 60만 원 근사치에 보다 가까워 3만 원을 벌었다. 집 수리하면서 그간 계속 돈을 쓰기만 했는데, 내가 수입으로 챙긴 것은 이 3만 원이 전부였다. 하지만 대신해 건진 추억들은 어떤 돈으로도 계산할 수 없는 것들, 돈을 줘도 살 수 없는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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