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표지
백산서당
저자 5명은 지난 1970~1980년대 고인과 함께 젊음을 바친 동지들이다. 5명의 동지들이 그의 삶, 민주화에 대한 공헌, 사회참여동기를 이룬 사상배경, 민주주의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이범영의 의미 등 크게 네 분야를 썼다. 1955~1994 한반도는 6·25전쟁 후 남북분단, 군사정권, 김영삼 정부 초기였다. 이때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삶은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공을 세웠지만 머물지 않음)였다.
1976년 서울대 12.8 유신반대 투쟁을 시작으로 그는 고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졸업을 불과 두 달 앞두고 구속되어 많은 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은 철벽의 군사정권 아래 질식하는 사회에 가뭄 속 한줄기 소나기로써 민주세력을 고무시키고, 학생운동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다.
1974년부터 1994년까지 20년 간 그는 3번의 수감과 3번의 수배생활을 했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의 쿠데타, 5.18 광주항쟁을 유혈진압하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에 의해 복학했던 서울대에서 제적당했다.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는 자료집과 유인물을 만들어 몰래 배포하는 활동을 한다. 이것은 훗날 민청련에서 제작한 광주자료집의 초안이 된다.
대학시절 마르크스에 심취했고 또 한계를 절감했다. "마르크스의 이론에는 삶과 죽음의 문제, 인생론이 없어. 그냥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잘못된 점과 그 잘못된 점을 뜯어고치는 인간의 노력밖에는. 또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잘못의 원인이 돈에 있다는 반쪽의 진실 밖에는. 그게 마르크스 이론의 근본 한계야."(죽음 직전 고인과 대화한 박승옥의 기록)
198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주화세력은 입장이 갈라졌다. 민청련 지도부 다수는 김대중 지지가 압도적, 민청련 지도부 정책실(이범영 포함)은 양김 후보단일화가 지배적이었다. 민청련 내부에서 대의원총회 투표로 김대중 지지로 최종입장을 결정했다. 이런 결정은 이범영의 의견과 달랐다. 하지만 그는 결정에 기꺼이 승복했다. 그리고 김대중 지지전술에 입각한 선거정책을 마련하고 그 일에 주력했다.
이범영은 단일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노태우에게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후보단일화 쪽에서 그에게 민청련에서 탈퇴해 함께 일하자는 제안도 했다. 그는 제안을 거부했다. 그리고 민청련의 결정에 깨끗이 승복하고 민청련 정책실 내에서 최선을 다해 지도부를 보필했다. 다수의견에 승복하는 자세를 몸으로 실천, 결국 민청련을 분열시키지 않고 발전시킨 힘이 되었다. 그의 이런 정신은 이후 다른 민주화운동단체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1987년 대선에서 야당이 패한 후 민청련의 집행부교체가 현안이 되었다. 새 집행부로는 학생운동의 흐름과 호흡이 맞는 인물이 적절하다는 의견들이 많았다. 창립에 관여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학생운동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젊은 학생운동 출신자들과 공감대를 넓게 가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때 떠오른 사람이 바로 이범영이었다. 민청련에는 80년대 학번들이 대거 진입해 있었고 그들은 민청련 지부활동을 통해 대중운동을 전개하는 젊은 세대였다. 이범영은 이들과 대중운동 정치투쟁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그가 차기 민청련 의장을 맡아 민청련 조직을 재정비하고 청년 대중운동단체로서 민청련을 확고하게 세워줄 것을 요청했다. 한홍구는 그가 "윗세대를 배척하지 않고 존중했고, 그들의 깊은 신뢰를 얻으면서 아랫세대들로부터도 지도자로 추대를 받았다"고 회상했다.
식민지 지배를 경험하고 한 세기가 넘게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현실에서 민족자주를 추구해야 한다는 80년대 학번 학생들의 문제제기를 선배 집단 중에서는 그가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한편 후배들이 북한방송내용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이는 미숙한 태도나 과격함을 일정하게 제어하려 노력했다. 김근태(1947-2011)로 대표되는 '청년운동 1세대'와 '전대협 세대'를 잇는 '청년운동 2세대'의 그는 대표주자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독립운동가, 민주화투사'였던 함석헌과 장준하의 모습이 끊임없이 겹쳐보였다. 함석헌은 젊은 시절 10년 동안 교사생활을 했고 장준하도 4년 동안 국회의원생활을 했으니 고인보다는 짧게나마 가장으로서 집안생계를 책임졌다.
책이 말하지 못한 것, '생활인'으로서 이범영 한계

▲ 이범영이 1986년 수배를 받아 쫓길 때 용문사에서 김설이와 두 딸을 만나 찍었다. 네 식구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김설이
'조국의 민주화'를 위한 전적인 공헌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에서 '희생양'이 된 이범영 가족들의 고난에 찬 삶에 대해 이 책이 말하지 못헤 많이 아쉬웠다. 그래서 고인의 아내 김설이와 인터뷰를 했다. 아내로서 또 두 딸의 엄마로서 이범영에 대한 생각이 궁금했다.
"남편의 장단점은 같지 않을까 싶다. 남편의 장점은 순진무구(철이 없다는 얘기)하다. 자기가 관심을 갖고 있는 사안에 대해선 완전몰입하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오로지 그 방향을 향해서 전력 질주하는 사람이다. 그가 대학에 입학했던 1973년, 20대 초반에는 박정희 유신정권을 몰아내고 제대로 된 민주화를 이루는 데에만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고 공부한 걸 실천하는데 몰두했다.
그 외 모든 일상적인 문제엔 남편은 관심조차 없었기에 일상생활은 이범영에게 늘 낯설고 엄두가 안 나고 자기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우리는 결혼생활 11년 동안(1982-1994) 절반인 5~6년은 떨어져 살았기에, 남편이 수배 또는 수감됐기에,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르기도 했겠다'는 생각을 요즘하고 있다. 활동가로서 남편의 장점은 생활인으로는 단점이기도 하겠다.
큰아이가 9개월, 작은아이는 뱃속에서 있는지도 모르고 집을 나간 남편은 아이들이 다섯 살, 세 살 때 비로소 수배자의 몸에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당시 아이들은 아빠를 처음보고 '아저씨'라고 불렀다. 아이들에겐... 글쎄 모르겠다. 워낙 아이들 상처가 깊어서. 아이들에겐 훌륭한 아버지보다 늘 곁에 있는 아버지가 더 필요했을 테니까. 흐르는 세월 굽이굽이마다 아이들은 부재중인 아버지가 얼마나 필요했을까? 또한 얼마나 많은 눈물을 가슴깊이 채웠을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졸업식 때 아이들 옆에 아버지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부모들이야 자신들의 선택으로 고단한 삶을 살았으나 내 아이들은 웬 날벼락일까?"
그래서 그런지 아내 김설이는 남편 이범영이 "내가 아닌 청년운동, 민주화운동과 결혼했다"고 담담하게 회고한다. 고인의 부모도 말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부친은 박정희 정권시절 농림부 공무원으로 영국 캠브리지대에 국비유학을 다녀온 인재였다.
하지만 1남 4녀 중 장남인 이범영에 대한 '연좌제'로 농림부 공무원이었던 김포공항 방역소장직에서 해고되었다. 또한 아들이 대학 4학년 때인 1976년부터 1992년까지 3번의 수감과 3번의 수배생활을 하는 동안 부모는 아들의 생사조차 몰라 늘 노심초사하며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야 했다.
1964년부터 1990년까지 약 27년간 백인정권에 의해 수감생활을 하면서 남아공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흑인의 희망이 되어왔던 넬슨 만델라는 모든 인간은 인생에 있어서 두 가지 의무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가족 부모에 대한 의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조국이나 인류공동체에 대한 의무다.
불의의 시대는 이범영에게 자식, 남편, 아버지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가차 없이 박탈했다. 지금 경기도 마석모란공원묘지에 생전 그가 존경했던 문익환, 김근태, 김병곤과 함께 영원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가 뿌린 씨앗과 분신들은 생생한 유산이 되어 지금도 우리사회 곳곳에 여전히 살아있다.
이범영 평전 - 이 강산의 키 큰 나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은이),
백산서당,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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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해외입양 그 이후],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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