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안병무는 서북청년회 부위원장이 아니었다

<안병무, 서북청년회 부위원장에서 민중신학자로> 기사에 대한 반론

등록 2024.10.22 09:54수정 2024.10.22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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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선생님이 세상을 떠난 지 28주기를 맞았다. 28주기를 맞아 고인의 삶과 민중신학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다. 그러나 고인에게 뒤집어 씌워진 오명 역시 여전히 남아 있다. 고인이 과거 서북청년회 부위원장이었다는 해괴한 주장이다. 하지만 28년 전 세상을 떠난 고인은 해명할 수도 없다. 과거 문헌을 찾아보면 사실 여부가 밝혀질 것이다.

'안병무, 서북청년회 부위원장에서 민중신학자로- 안병무의 숨은 이력'(2014.10.04.)이란 제목의 기사는 안병무가 서북청년회의 부위원장이었다고 주장한다. 해당 기사는 안병무의 고향이 이북이고 월남했고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서북청년회 부위원장이었을 것이라면서 월간 <말>지의 기사 등을 토대로만 작성했다. 주장을 뒷받침할 다른 문헌 자료는 기사에 담겨 있지 않았다.

안병무가 서북청년회 부위원장이었다는 명확한 근거를 찾기 어려운 주장을 검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서북청년회 역대 임원들 명단을 확인하면 된다. 서북청년회는 1946년에 출범하여 1948년 12월에 해체하였다. 따라서 1946년, 1947년, 1948년 3년 동안의 임원 명단만 확인하면 된다.

결론을 먼저 밝히면 서북청년회가 활동한 3년 동안 임원 명단에 안병무(安炳茂)는 없었다. 송병무(宋秉武)라는 사람이 있었다. 송병무는 1947년과 1948년 2년에 걸쳐 부위원장과 상집위원을 맡고 있었다.

1. "'말'지"의 서청 2기 임원 명단

먼저, 오마이뉴스 정병진 기자는 월간 말(1992년 7월호)의 기사를 기초로 기사를 작성하였다. '말'지에는 서북청년단 2기 위원장 문봉제와 4명의 부위원장 명단을 소개하고 있다. 4명의 부위원장에 "안병무"라고 기록하였다.(사진1) '말'지의 이상기 기자는 47년 9월 재건한 서북청년회 2기 위원장과 부위원장들 명단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이상기, 서북청년회와 해방정국의 암살자들, 95쪽, 월간 말1992년 7월호).
'말'지, 1992년 7월호 기사 이상기, 서북청년회와 해방정국의 암살자들, 기사 촬영
▲'말'지, 1992년 7월호 기사 이상기, 서북청년회와 해방정국의 암살자들, 기사 촬영 박승렬

내분이 심화돼 결국 47년 9월 문봉제를 위원장으로 제2기 서청이 개막됐다. 당시 부위원장은 김성주를 비롯 안병무, 한제관, 홍성준 등이었으며 선우기성은 대동청년단장 비서실장으로 옮겼다.

명단의 마지막에 나오는 선우기성은 서북청년회의 초대위원장이었다. 그는 1947년 9월 21일, 서북청년회를 대동청년단으로 통합하기로 결정하고, 대동청년단장 비서실장으로 옮겨갔다. 선우기성이 합류를 결정하고 서청을 떠나자, 대동청년단으로 합류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1947년 9월 26일 서북청년회 재건총회를 개최하였다.

재건총회에서 2기 임원으로 위원장 문봉제와 4명의 부위원장을 선출하였다. 위원장이 된 문봉제는 이승만을 지지하는 노선을 더욱 명확하게 하였고, 후일 1956년, 이승만 정권에서 교통부장관까지 역임하였다. 부위원장인 김성주는 이북의 각 지역별 향우회와 청년회를 서북청년회로 통합할 때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서청을 기반으로 이승만에 저항했다가 한국전쟁 직후 1954년 원용덕 헌병사령관 관사에서 사살당했다.


'말'지의 이상기 기자는 서북청년회 2기 임원 명단을 기록했지만 출처를 밝히지는 않았다. 다만 기사 안에서 서북청년회의 초대위원장 선우기성의 책 "한국청년운동사"를 언급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그도 선우기성이 남긴 임원 명단을 알았을 것으로 보인다(이상기 기자에게 임원 명단의 근거를 요청하였으나 응답이 없다).

2. 선우기성 '한국청년운동사'의 서청 2기 임원 명단


선우기성은 서북청년회 초대 위원장이었다. 자신의 활동 경험을 기초로 당시 청년운동 역사를 "한국청년운동사"에 정리하였다. 그가 기록한 서북청년회 2기 임원들 명단은 다음과 같다(사진2, 선우기성, 한국청년운동사, 727쪽).

서청 2기 임원 명단 선우기성, 서청 2기 임원 명단
▲서청 2기 임원 명단 선우기성, 서청 2기 임원 명단 박승렬

再建西靑은 文鳳濟, 金聖柱가 主動이 되어 훗날 大韓靑年團으로 統合될 때에 有力한 단체로 參加하게 된다. 이때의 陣容은 다음과 같다.

委員長 文鳳濟, 부委員長 金聖柱, 宋秉武, 韓寬濟, 洪聖俊

위원장 문봉제, 부위원장 김성주, 송병무(宋秉武), 한관제, 홍성준 등으로 소개하고 있다. 선우기성은 송병무를 2기 부위원장으로 전하고 있다. 선우기성의 임원 명단과 '말'지 기사의 명단을 비교하면, 순서는 동일하다. 차이가 있다면 송병무(宋秉武)와 안병무, 한관제와 한제관의 차이다. 선우기성의 기록은 '말'지의 기사에 비해 발간 시기도 앞서고 당사자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게 검토해야 할 자료이다. 선우기성이 밝힌 서북청년회 1기 임원 명단에도 안병무는 없다.

중앙집행위원장 鮮于基聖(평북), 부위원장 張允弼(함북), 趙英珍(함남)

3. '대한민국건국청년운동사'의 서청 2기 임원

건국청년운동협의회총본부에서 발행한 '대한민국건국청년운동사'(1989년)에도 서청 2기 임원 명단이 존재한다. 해방 직후 다양한 청년 단체가 만들어졌고 서로 통합하거나 사라지기도 했다. 그 과정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모여서 '건국청년운동협의회총본부'를 결성하였다. 그들이 자신들의 활동을 정리한 것이 '대한민국건국청년운동사'이다.

위 책에는 서북청년회를 비롯한 여러 청년단체의 활동 상황과 주요 임원 명단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당시 우익 청년단체들이 자신들의 활동을 기록한 공훈록과 같은 책이다. 공훈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있어서 총본부와 편집위원회가 내용을 충분하게 교차 검증하고 있다. 여기에 기록된 서북청년단 임원은 다음과 같다(사진3, 건국청년운동협의회총본부, 대한민국건국청년운동사, 1309쪽).

서청 2기 임원 명단 대한민국건국청년운동사, 서청 2기 임원 명단 촬영
▲서청 2기 임원 명단 대한민국건국청년운동사, 서청 2기 임원 명단 촬영 박승렬

西靑의 中央組織 總本部 委員長 文鳳濟, 副委員長 宋秉武, 金聖柱, 洪聖俊

건국청년운동사에서도 위원장 문봉제, 부위원장 송병무(宋秉武), 김성주, 홍성준으로 밝히고 있다. 선우기성의 기록과 비교하면, 부위원장의 인원 수와 명단의 순서가 다르다. '한관제'가 없다. 인원과 순서는 달라도 송병무(宋秉武)가 부위원장이었음은 동일하다.

그리고 1년 뒤인, 1948년 9월 대의원 대회에서 개편된 부위원장 명단에도 송병무(宋秉武)가 있다. 아울러 상집위원 명단에도 송병무(宋秉武)로 기록되어 있다(대한민국건국청년운동사, 1310쪽).

1948년 9월 大韓民國 獨立을 萬邦에 宣布하고 主權回復이 이루어진 후에 西靑 一部를 代議員 大會에 依하여 改編하였다.

總本部 委員長 文鳳濟(留任) 〃副委員長 洪聖俊, 宋秉武, 韓寬濟

서북청년회 초대 위원장 선우기성과 당시 당사자들이 직접 남긴 자료에는 모두 송병무(宋秉武)를 부위원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안병무는 서북청년회 임원 명단 어디에도 없었다.

'말'지 이상기 기자는 송병무(宋秉武)를 안병무로 그리고 '한관제(韓寬濟')를 '한제관'으로 읽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정병진 기자는 '말'지에서 '안병무'를 발견하고는 민중신학자 안병무를 떠올렸다. '안병무'는 '월남한 청년'이고 '기독교인'이니까 당연히 '반공주의자'이고 서북청년회에 참여했다고 추론에 추론을 더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서북청년회 부위원장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참고로, '안병무'는 동명이인이 있다. 독립운동가 안병무(1912~1986)다. 즉 독립운동가 안병무와 민중신학자 안병무(1922-1996)가 있다. 우연찮게도 두 분 모두 평남 안주 출신이다. 안병무가 '민중신학자 안병무'라고 단정할 근거가 있는가?

4. 안병무는 1947년에 어떻게 살았는가?

안병무가 서북청년회 임원 명단에는 없다해도 서북청년회원으로 살지는 않았을까라고 질문할 수 있다. 안병무는 1945년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 특히 서북청년회의 임원을 맡았다고 오해받고 있는 1947년에 무엇을 하였을까? 그의 삶에서 서북청년회와 관련 있는 점은 없었는가 등을 검증할 필요도 있다. 그의 평전을 보면 그가 어떤 청년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1922년에 출생하였고, 만주에서 1945년 해방을 맞이하였다. 일본 대정대학 유학 중에 학도병 징집을 피해 만주 하얼빈 인근의 벽촌에서 숨어 지냈다. 그 후 용정에서 가까운 모아산 지역으로 옮겨와 교회 전도사로 지냈다. 1946년 만주에 중국공산당 군대가 들어올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김남일, 민중신학자 안병무 평전, 62쪽).

그는 1946년에 두만강을 건너 월남하였다. 날짜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시기는 추측할 수 있다. 그의 평전에는 소련군이 떠난 후에 진주한 공산당과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여인의 도움을 받아 간도를 떠났다고 하였다. 당시 소련군은 1946년 5월에 만주에서 철군하였다. 즉 안병무는 1946년 5월 이후 5-6월쯤에 간도를 떠난 것으로 보인다.

안병무 연보 민중신학자 안병무 평전의 연보 촬영
▲안병무 연보 민중신학자 안병무 평전의 연보 촬영 박승렬

서울에 도착한 안병무는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서울대에 입학하여 기독학생연합회를 결성하고 초대회장을 맡았다. 당시 미군정청이 1946년 8월 22일에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을 공포하자 소위 '국대안 파동'이 일어났다.

국대안 파동으로 학교 내에서도 좌우 갈등이 깊어지자 그는 학교를 떠나 김포 농업학교의 교사로 취직하였다. 그는 어머니와 동생을 책임져야하는 가장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1947년에 김포에서 교사로 살았다. 그리고 1년여 후 1948년, 경신고등학교의 영어교사가 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경신고 교사로 살면서 서울대학교에 복학하였다.

그는 학교에서 만난 기독학생회 동료들과 함께 '일신회'를 결성하고 성서읽기와 철야기도회에 열심이었다. 일신회는 한 신앙(一神), 한 몸(一身), 한 믿음(一信)으로 신앙생활을 하자는 의미였다. 일신회 회원들은 돌아가면서 서로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성서연구, 기도, 신앙 토론에 열중했다. 그의 동료는 그 시절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였다(안병무 평전, 73쪽).

웨슬리 형제가 옥스퍼드에서 시작한 신성클럽을 방불할 정도로 진지하고 뜨거웠다.

일신회 동료들과 진지한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던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그의 설교에 매료된 교인들이 찾아와 새로운 교회를 세우자고 제안한 것이다. 1948년과 1949년의 일이다. 그와 동료들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때 세워진 교회가 일신교회이다. 지금은 감리교에 속해 있으며 회현동에 건재해 있다. 일신교회 40년사에 안병무와 함께 교회를 개척하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1948년 서대문 교회에서 예배드리던 때에 초청하여 설교를 들었던 안병무 선생을 모시기로 한 후 그를 찾아가 신앙지도를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안병무 선생은 서울대학 학생으로 기독교 연구에 몰두하여 유학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중략) 안병무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면 좋습니다. 나도 사실은 마음이 뜨거워서 어디가서 증언을 하고 싶었는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인 줄로 믿고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교회를 설립하기로 하고 교회 명칭도 일신교회라고 부르게 되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일신교회, 일신교회 40년사, p 80-81)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안병무는 1946년 월남한 이후 1947년과 1948년 시기에 서울과 김포, 학교와 직장 그리고 교회 설립을 위해 매우 분주하게 살고 있었다. 그는 진지하면서도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가고자 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교인들이 찾아오고, 초청해서 모셔갈 정도로 감동적인 설교자이기도 했다. 성서 연구와 기도와 설교자로 살았던 삶과 서북청년회의 폭력적 활동 양상은 전혀 어울리지 않고 또한 연결되지도 않는다.

서북청년회는 1946년 11월 30일에 발족하였다. 안병무는 24세가 되는 1946년 여름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의 고향은 평안남도 안주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만주 간도 지역에서 살았고 청년기에는 학도병 징집을 피해 하얼빈 벽촌에 숨어 살았다. 그리고 월남하였다. 그가 평남 향우회나 서북청년회 임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무엇보다 1947년 9월, 서북청년회 2기 임원들이 출범했던 시기에 그는 김포에서 농업학교 교사로 살고 있었다. 당시에는 교통도 불편했는데 김포에서 교사로 살면서 1947년 9월에 서북청년회의 부위원장이 될 만큼 강력하게 활동할 수 있었을까? 그의 삶을 보거나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그가 서청의 부위원장으로서 활동을 했다는 객관적 증거는 찾을 수 없다.

5. 안병무는 서북청년회 부위원장이라는 주장은 허구이다.

민중신학자 안병무에게 서북청년회 부위원장이라는 숨은 이력이 있었다는 정병진의 주장은 검증하지 않은 추측일뿐이다. 안병무에게 숨겨진 이력이 있었다면 그가 청년 시절부터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노력을 다하는 전도사였다는 점과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나 성서연구를 매우 높이 평가하며 신뢰하는 유능한 설교자였다는 점이다. 그가 폭력 조직인 서북청년회에 참여할 동기도 없었고 시간도 없었다. '이북이 고향'이고, '월남'한 '기독 청년'은 모두 서북청년회 회원이었는가?

그리고 24세 젊은 안병무는 열심히 활동을 하지 않아도 부위원장을 맡을만한 특권이 있었는가? 1946년 서울에 도착한 이후 안병무는 기독 학생이자 시골학교의 교사로 살았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몸으로 살아낸 열렬한 신앙인이었고 설교자였다. 그는 반공을 외치며 폭력을 휘두르던 서북청년회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안병무는 결코 서북청년회 부위원장이 아니었다. 서북청년회 부위원장은 송병무(宋秉武)였다. 오독과 오해, 추측은 바로잡혀야 마땅하다.
#민중신학자 #안병무 #서북청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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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이며, 인권운동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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