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무 연보 민중신학자 안병무 평전의 연보 촬영
박승렬
서울에 도착한 안병무는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서울대에 입학하여 기독학생연합회를 결성하고 초대회장을 맡았다. 당시 미군정청이 1946년 8월 22일에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을 공포하자 소위 '국대안 파동'이 일어났다.
국대안 파동으로 학교 내에서도 좌우 갈등이 깊어지자 그는 학교를 떠나 김포 농업학교의 교사로 취직하였다. 그는 어머니와 동생을 책임져야하는 가장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1947년에 김포에서 교사로 살았다. 그리고 1년여 후 1948년, 경신고등학교의 영어교사가 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경신고 교사로 살면서 서울대학교에 복학하였다.
그는 학교에서 만난 기독학생회 동료들과 함께 '일신회'를 결성하고 성서읽기와 철야기도회에 열심이었다. 일신회는 한 신앙(一神), 한 몸(一身), 한 믿음(一信)으로 신앙생활을 하자는 의미였다. 일신회 회원들은 돌아가면서 서로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성서연구, 기도, 신앙 토론에 열중했다. 그의 동료는 그 시절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였다(안병무 평전, 73쪽).
웨슬리 형제가 옥스퍼드에서 시작한 신성클럽을 방불할 정도로 진지하고 뜨거웠다.
일신회 동료들과 진지한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던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그의 설교에 매료된 교인들이 찾아와 새로운 교회를 세우자고 제안한 것이다. 1948년과 1949년의 일이다. 그와 동료들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때 세워진 교회가 일신교회이다. 지금은 감리교에 속해 있으며 회현동에 건재해 있다. 일신교회 40년사에 안병무와 함께 교회를 개척하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1948년 서대문 교회에서 예배드리던 때에 초청하여 설교를 들었던 안병무 선생을 모시기로 한 후 그를 찾아가 신앙지도를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안병무 선생은 서울대학 학생으로 기독교 연구에 몰두하여 유학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중략) 안병무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면 좋습니다. 나도 사실은 마음이 뜨거워서 어디가서 증언을 하고 싶었는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인 줄로 믿고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교회를 설립하기로 하고 교회 명칭도 일신교회라고 부르게 되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일신교회, 일신교회 40년사, p 80-81)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안병무는 1946년 월남한 이후 1947년과 1948년 시기에 서울과 김포, 학교와 직장 그리고 교회 설립을 위해 매우 분주하게 살고 있었다. 그는 진지하면서도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가고자 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교인들이 찾아오고, 초청해서 모셔갈 정도로 감동적인 설교자이기도 했다. 성서 연구와 기도와 설교자로 살았던 삶과 서북청년회의 폭력적 활동 양상은 전혀 어울리지 않고 또한 연결되지도 않는다.
서북청년회는 1946년 11월 30일에 발족하였다. 안병무는 24세가 되는 1946년 여름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의 고향은 평안남도 안주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만주 간도 지역에서 살았고 청년기에는 학도병 징집을 피해 하얼빈 벽촌에 숨어 살았다. 그리고 월남하였다. 그가 평남 향우회나 서북청년회 임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무엇보다 1947년 9월, 서북청년회 2기 임원들이 출범했던 시기에 그는 김포에서 농업학교 교사로 살고 있었다. 당시에는 교통도 불편했는데 김포에서 교사로 살면서 1947년 9월에 서북청년회의 부위원장이 될 만큼 강력하게 활동할 수 있었을까? 그의 삶을 보거나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그가 서청의 부위원장으로서 활동을 했다는 객관적 증거는 찾을 수 없다.
5. 안병무는 서북청년회 부위원장이라는 주장은 허구이다.
민중신학자 안병무에게 서북청년회 부위원장이라는 숨은 이력이 있었다는 정병진의 주장은 검증하지 않은 추측일뿐이다. 안병무에게 숨겨진 이력이 있었다면 그가 청년 시절부터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노력을 다하는 전도사였다는 점과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나 성서연구를 매우 높이 평가하며 신뢰하는 유능한 설교자였다는 점이다. 그가 폭력 조직인 서북청년회에 참여할 동기도 없었고 시간도 없었다. '이북이 고향'이고, '월남'한 '기독 청년'은 모두 서북청년회 회원이었는가?
그리고 24세 젊은 안병무는 열심히 활동을 하지 않아도 부위원장을 맡을만한 특권이 있었는가? 1946년 서울에 도착한 이후 안병무는 기독 학생이자 시골학교의 교사로 살았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몸으로 살아낸 열렬한 신앙인이었고 설교자였다. 그는 반공을 외치며 폭력을 휘두르던 서북청년회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안병무는 결코 서북청년회 부위원장이 아니었다. 서북청년회 부위원장은 송병무(宋秉武)였다. 오독과 오해, 추측은 바로잡혀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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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안병무는 서북청년회 부위원장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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