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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 따지면 돈 안 되는 일, 그런데 이리 기쁘다니요

글쓰기 수업 중 만난 어르신, 시민기자 데뷔 시킨 사연... 내 세상도 넓어졌습니다

등록 2024.11.24 14:26수정 2024.11.24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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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부터 주 1회 어르신들과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싣습니다.[기자말]
나는 <내 인생 풀면 책 한 권>이라는 이름으로 복지관 어르신들과 글쓰기 수업을 한다. 시니어 글쓰기 수업인데, 글로 만나는 어르신들의 삶은 소중하고 감동적이기도 하다. 이걸 연재 기사로도 쓰고 있다(관련 기사: 내 인생 풀면 책 한 권 https://omn.kr/27fc4 ).

그런데 어떤 복지관이든 어르신 글쓰기에는 비슷하게 큰 특징이 있다. 다른 글쓰기 수업과는 달리, 바로 퇴고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점이다.


지금이야 글 쓰는 판이 워낙 많은 시대지만 어르신들이 한참 활동할 때는 지금과 달랐다. 글쓰기는 '선택 받은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일이었다. 개인의 글쓰기는 기껏해야 일기에 그쳤다. 그마저도 꾸준히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써 온 글을 읽으시는 어르신 글쓰기 숙제를 제일 성실하게 해오시는 어르신의 뒷모습
▲써 온 글을 읽으시는 어르신 글쓰기 숙제를 제일 성실하게 해오시는 어르신의 뒷모습 최은영

아예 써보지 않았거나, 일기만 써 본 어르신들 입장에서는 고생스럽게 쓴 글을 또 고치는 일이 쉽지 않다. 시니어 글쓰기 수업은 누구에게 내보일 글을 쓴다기 보다는, 쓰는 경험과 즐거움을 드리기 위함이니 사실 일단 초고를 쓰신 것만으로도 '목적 달성'이긴 하다.

그랬어도 글쓰기에서 퇴고는 포기할 수 없는 혹은 포기해선 안 되는 과정이기에 나는 매 시간 말한다. 벽 보고 말하는 기분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게 지켜야 할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했다.

누워서 글 읽다가 벌떡 일어난 이유

수업 전날 밤, 숙제라면서 이메일이 왔다. 누워서 메일을 열었다가 글을 읽고는 벌떡 일어났다. 한 어르신이 전에 썼던 글을 '퇴고' 한 것, 즉 새로 쓴 글을 보내오셨는데, 이 글은 딱 봐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발행할 만한 '각'이 나오는 글이었다.


남의 퇴고에, 남의 기사 각에 내가 이렇게 흥분할 줄은 몰랐다. 몇 개의 문단 방향을 제안하고, 혹시 이렇게 하실 수 있으시겠냐고 다시 물었다. 어르신 수강생으로부터 기꺼이 하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글을 완성해서 송고 했다. 어르신이 보냈다는 말에, 내 기사를 송고했을 때보다 더 결과가 기다려졌다. 시간이 지나 기사가 발행됐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는 내 글이 기사가 됐을 때보다 더 신이 났다.


바로 67세, 주일순 시민기자의 이 기사다(관련기사 : 1958년생 백발인 저, 아침마다 니체와 싸웁니다 https://omn.kr/2ayok ).

정지우 작가님의 책 <돈 말고 무엇을 갖고 있는가>에서, 작가는 타인의 성장을 '생산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본다. 누구나 성장을 바라지만, 나만의 성장도 결국은 공허한 지점이 있기에 타인의 성장을 돕는 게 진짜 기쁨이라는 게 논지다.

퇴고는 귀찮아 퇴고를 싫어하시는 어르신들을 이해할 수도 있다
▲퇴고는 귀찮아 퇴고를 싫어하시는 어르신들을 이해할 수도 있다 픽사베이

과거 학생 때 했던 조교를 제외하고, 지금껏 내가 했던 경제활동은 늘 강사였다. 누군가를 가르치고 그 성장을 보는 게 일이었지만 그게 '기쁨'까지 갔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홀로 서울살이 하던 20대 시절의 강사는 그저 내겐 생존방식이었고, 전업주부가 된 지금은 그게 사회적 명함을 간신히 유지하는 수단이라서 그랬다.

생각해 보면, 수강생에게 시민기자를 제안한다고 해서 내게 돌아오는 혜택은 없다. 수업시간에 할 수 없으니 따로 시간 내서 하는 잔업이다. 시간당 페이를 받는 떠돌이 강사에게 가장 비효율적인 일이다.

효율성만을 따지며 일했던 강사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면서 기쁨을 느낀다는 건, 언뜻 보면 이율배반적일 수 있겠다. 그러나 그 기쁨은 숫자로 셈할 수 없는 관계의 본질에서 비롯된다.

'돈 말고 무엇을 갖고 있는가'란 질문에 드디어 대답할 말을 찾다

누군가의 성장에 손을 보태고, 그로 인해 그 사람의 세상이 조금 더 넓어졌다는 걸 목격하는 순간, 내 안에서도 무엇인가가 넓어지는 걸 느꼈다.

불후의 고전으로 꼽히는 책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거기서 슈워츠 교수는 "삶은 서로 당기는 힘의 연속입니다. 고무줄처럼 양극단 사이에서 당겨지며, 대부분의 사람은 그 중간 어딘가에 살아갑니다"라고 말한다.

강사로서 나는 늘 '시간과 효율'이라는 한 극단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수강생의 글을 퇴고하고, 시민 기자로 첫발을 내딛게 돕는 일은 나를 또 다른 극단으로 끌어당겼다.

그것은 '효율성'이라는 잣대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한 감각이었다. 타인의 성장은 내가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나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비춰준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돈도, 성취감도 아니었다.

그 자리에는 진심으로 연결된 관계와 서로를 북돋아 주는 손길이 깃들어 있었다. 효율성을 따지는 일은 잠시 내려놓고, 누군가의 성장을 돕는 그 순간만큼은 오롯이 인간다운 기쁨에 젖어 있을 수 있었다.

이렇듯 삶의 고무줄은 늘 한쪽 방향으로만 팽팽하지만은 않고, 그 반대편에서 나를 부드럽게 끌어당기기도 한다.

정지우 작가님이 말한 '나만 성장하다가 공허해지는' 경지까지 간 적이 없기에, 실은 책을 읽으면서 나는 타인의 성장까지 간섭하는 것은 어쩌면 오지랖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각 수준에서, 할 수 있는 한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제부터라도 한 번씩은 고무줄의 반대 끝까지 힘차게 달려가 비효율적인 일을 해보려 한다. 그 경험이 축적됐을 때 보일 새로운 기쁨을 더 많이 갖고 싶어졌다. '돈 말고 무엇을 갖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말이 그렇게 만들어진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차후 개인 sns에도 실립니다. 읽은 도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미치 앨봄), 돈 말고 무엇을 갖고 있는가(정지우)
#내인생풀면책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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