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빵칼이 필요한 순간은 있지 않을까

청예 <오렌지와 빵칼>을 읽고

등록 2024.12.12 13:57수정 2024.12.12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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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렌지와 빵칼
오렌지와 빵칼허블

청예 작가는 천재다. 이런 작가를 이제서야 알게 되다니 아쉬울 따름이다. 청예 작가는 제9회 교보문고 스토리 공모전 단편 우수상, 제4회 컴투스 글로벌 콘텐츠 문학상 최우수상, K-스토리 공모전 최우수상(제1회, 제2회)을 연달아 수상하고 제6회 한국 과학 문학상 장편 대상을 받았다. 다수의 영상화 계약을 체결했으며 예스24 '2024 한국 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 12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앞으로 문학계의 판도를 바꿀 엄청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산뜻한 색감의 표지와 얇은 두께감에 살짝 방심했었다. 소설을 많이 읽는다고 자부하지만 이런 스토리의 소설은 본 적이 없다. 신선하면서도 충격적인 소재의 소설이다. 생각지도 못한 반전 때문에 소설의 말미에서 할 말을 잃었다.

소설은 27세 유치원 교사인 오영아라는 인물의 심리적 변화를 다루고 있다. 잘 웃고 남을 잘 배려하는 성격의 오영아는 담당하고 있는 반의 원아인 은우(마일로)의 언어적, 육체적 폭력을 견뎌내면서 바뀌기 시작한다. 점점 우울증과 무기력증이 심각해지고, 은우의 엄마가 추천해 준 상담 센터에서 뇌에 실험용 시술을 받게 된다.


그 시술의 효과는 '본래의 자신의 모습을 찾게 해주는 것'이다. 시술 후 오영아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그동안은 생각만 하고 입 밖으로 내놓지 못했던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내게 된다. 오영아는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시작한다. 본인 스스로 나쁜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고 느낀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환희와 쾌감과 자유를 느낀다.

그 시술의 효과는 딱 한 달이다. 오영아는 평생 맛보지 못했던 쾌락을 계속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인지 혼란스럽다. 결국 오영아의 진심은 원래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끔찍했다. 맛본 기쁨을 평생 그리워만 하면서 살 거라니. 침이 쏟아져 나올 만큼 쾌락을 선사한 배덕의 맛을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그 상태를 다시 경험하길 갈망할 것이다. 과거의 나는 선한 남자를 억지로 사랑하고, 환경을 끔찍이 아끼고, 두려운 짐승에게도 손을 내밀고, 불편한 친구를 곁에 두고, 아동을 사랑하는 체하는 여자였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다시는 일탈을 시도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때의 나는 부서지지 않기 위해 끝까지 조각상에 붙어 조화를 완성하려 했던 하나의 팔이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나라는 존재는 곧 사회이고, 곧 전체였다.(162쪽)

강화길 작가가 추천사에 썼듯이, 소설의 첫 페이지를 연 독자들은 끝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갈 것이라고 장담한다. 통쾌하면서 시원한 쾌감과 소름 끼치는 전율을 느끼면서 말이다. 소설의 말미에서 맞닥뜨린 충격적인 장면은 독자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든다. 남자친구의 목을 그었던 뭉뚝한 빵칼은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영아는 "해냈구나"라는 해방감을 느낀다.

많은 독자들이 오영아를 통해 느낀 감각은 '내 이야기다. 나도 네! 가 아닌 아니오!를 외치고 싶을 때가 있다'는 사실이다. 오영아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직업을 가진 어른이 되면서 절제하고 양보하는 훈련을 필연적으로 하게 된다. 웃고 싶지 않은 순간에 가식적으로 입꼬리를 올려야 할 때도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사회적 가면을 쓰고 가면 뒤에 숨어 진짜 자신의 모습을 지우며살아가곤 한다. 그러나 때로는 '체'라는 가면을 벗어 버리고 시원하게 질러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오영아가 해방감을 느꼈던 것처럼 딱 한 번만이라도 내 안의 경계를 허물어 보고 싶은 욕망이 꿈틀댈 때가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빵칼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오렌지를 썰 수는 없지만 푹~찔러 흔적은 남길 수 있는 빵칼 말이다. 소설의 상황이 조금은 과장된 설정이라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섬뜩한 방법으로 큰 위로를 주는 소설은 처음이었다. 도파민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려 주는 소설을 찾고 있는 독자라면 주저하지 말고 이 책을 펼치기를 바란다.

오렌지와 빵칼

청예 (지은이),
허블, 2024


#오렌지와빵칼 #청예 #허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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