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영국의 산
석파정 서울미술관
그림들은 대체로 유명한 작품들이라 익숙했는데, 유영국의 단순하고 강렬한 작품 앞에서 발걸음이 절로 멈춰졌다. 더욱이 작품 옆에 쓴 그의 첫 문장이 나의 전두엽을 강타했다.
"60세까지는 기초를 좀 해보고 자연으로 돌아가 보자는 생각으로 그림을 했었다."
국내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그가 60세까지 기초를 좀 해보려고 했다니… 그간 뭐 좀 해보려고 아등바등했던 마음에 한 방 맞은 느낌이었다. 기초를 좀 해보지도 않고 걸작을 쓰려고 욕심을 부렸던 건 아니었나. 거장의 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언젠가 전시에서 그가 했던 또 다른 말도 떠올랐다. 요약하면,
"그림이 안 팔리는 시대를 살았기에 팔린다는 생각에 구속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했다. 안 팔리니까 빨리 그릴 필요도 없었고 재료가 넉넉하지 않아 많이 그릴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드라마를 쓰면서 편성을 받기 위해 내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는 까맣게 잊은 채 남들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찾아 마구 달려왔다. 쫓아오는 사람도 없는데 쫓기는 심정으로 설익은 밥상을 마구 차려내며 설익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또 다른 밥상을 준비해 온 무수한 시간이 눈앞에 스쳤다. 그의 우직한 그림은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하고 마음만 급하게 안갯속을 헤매느라 지쳐버린 내게 보내는 위로 같았다.
전시의 마지막 주인공은 이중섭이다. 이중섭은 워낙 가난했던 까닭에 은지화나 편지화가 많다. 이번 전시에 최초로 공개하는 편지화가 있어서 기대하고 있던 참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이중섭은 가족들을 아내의 친정인 일본으로 보냈다. 금세 다시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영영 이별이 되어 버렸고, 이중섭은 40의 나이에 행려 환자로 혼자 쓸쓸히 죽음을 맞았다.
가족을 일본으로 보내고 이중섭은 통영으로 내려가 반짝 작품 활동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이때 이중섭의 친구 유강렬이 이중섭에게 양털 잠바를 선물했고, 이중섭은 이를 입은 모습을 편지에 그려 아들에게 보냈다(아래 그림 오른쪽 위, 양털 잠바를 입은 이중섭이 양털 잠바를 선물해 준 유강렬과 함께 포즈를 잡고 있다).

▲ 이중섭의 편지화
석파정 서울 미술관
"나의(아빠와 엄마) 태현군, 잘 지내니? 아빠는 건강하게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아빠가 있는 경성은 너희가 있는 미슈쿠보다 추운 곳입니다. 기차로 몇 시간이나 걸리는 곳에 있던 아빠의 잠바를 오늘 아빠의 친구가 가져다주어서 아빠는 매우 기뻐요. 이보다 더 추워도 아빠는 따뜻한 양피 잠바를 입고 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 괜찮습니다. (...)"
그림 속엔 이중섭이 양털 잠바를 입고 활기찬 모습으로 붓을 들고 있다. 혼자 남겨져 걱정하고 있을 가족들에게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그림이 정녕 슬픈 것은 진짜 잘 지내고 있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 이상 잘 지낸다는 말은 하얀 거짓말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공중전화기를 오염시켰던 그날처럼. 잘 지내지 못하면서 잘 지낸다는 역설이 처연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마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처럼.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 단풍이 든 석파정 풍경
문하연
뭉클해진 가슴을 안고 4층으로 올라와 석파정으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입구에 선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단풍도 더 버틸 수 없을 만큼 절정에 달해있었다. 숲속으로 들어가니 어떤 나무는 잎이 모두 떨어졌고 어떤 나무는 잎이 무성한 채 빨갛고 노란 물이 잔뜩 올라와 있다.
잎이 모두 진 나무도 한때 저런 절정의 시간을 보냈을까? 혹시 아무런 절정도 없이 잎이 져버린 건 아닐까? 그래도 나무는 괜찮을까? 내 걱정인지 나무 걱정인지 모를 생각을 하다가 부는 바람에 눈처럼 흩날리는 나뭇잎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남은 저 잎도 이제 곧 다 떨어질 테고 그러니 나무는 그냥 다 나무겠구나. 한때는 절정의 시간을 보냈든 아니든. 잘났든 못났든 나는 그냥 나인 것처럼. 불현듯 마음이 평온해졌다. 앞으로 더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이번엔 거짓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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