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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얼굴 피투성이로 만든 원태근 지사

[오늘의 독립운동가 74] 11월 22일은 원태근 지사 의거일

등록 2024.11.22 11:10수정 2024.11.22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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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사늑약 직후 원태우 지사가 돌을 던져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에 큰 상처를 내었던 용인시 의거 현장(철길 옆)에 '의거 표석'이 세워져 있는 모습
을사늑약 직후 원태우 지사가 돌을 던져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에 큰 상처를 내었던 용인시 의거 현장(철길 옆)에 '의거 표석'이 세워져 있는 모습 정만진

1950년 6월 25일 원태근(元泰根) 지사가 세상을 떠났다. 1882년 3월 4일 경기도 과천군 하서면(현 안양시 안양동)에서 출생했으니 향년 68세였다. 지사는 흔히 원태우(元泰祐)로 알려져 있는데,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성명 원태근, 이명 원태우(元泰祐), 김태근(金泰根), 김태우(金泰祐)'로 소개되어 있다.

소개문 첫머리에서 두 가지 궁금증을 느낀다. 첫째는, 1950년 6월 25일에 타계하셨으면 이 분은 전사자인 듯한데 어째서 독립유공자로 등재되어 있을까 하는 점이다. 합리적 의심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원 지사의 타계일 6월 25일은 우연의 일치일 뿐 전사는 아니고 그냥 자연사이다.

유명 독립지사들, 동지 보호 위해 수많은 이명 사용

두 번째는, 본명이 원태근이고 원태우, 김태근, 김태우 등 이명이 여럿 있는 것이 의열단 창립 주역 이종암(李鍾巖) 지사가 이종암(李鍾岩), 이종순(李鍾淳), 양건호(梁健浩), 양건호(梁建浩), 양달호(梁達浩), 권택건(權宅建), 이집중(李集中), 양주평(梁洲平), 양근호(梁根浩), 양주평(梁朱平) 등 수많은 이명을 사용한 것과 같은 의미의 일인가 하는 점이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아니다'이다. 이종암 지사는 다른 독립지사들에게조차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거사를 추진해야 할 일이 많은 까닭에 불가피하게 많은 이명을 사용했다. 거사 중 불행하게도 누군가가 피체되었을 때 그렇게 이명만 알려져 있어야 다른 동지들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태근 지사는 그런 경우가 아니다. 비격진천뢰 발명으로 경주읍성 탈환 전투를 성공시켜 임진왜란 전세에 큰 전환점을 만들어낸 이장손의 사례와 같다. 이장손은 크나 큰 업적을 이루었지만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이름 이장손(李長孫)도 그렇다. 어느 이씨 집안의 '장손'이라는 이야기다. 즉 이장손은 성명 그 자체가 아니다. 신분사회에서 미천한 집안 출신이라는 이유로 대단한 공을 세웠는데도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수준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원태근 지사도 돌을 깎아 무엇인가를 만드는 석공이었다. 을사늑약 체결 뒤 수원으로 유람여행 온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돌로 쳐 피투성이를 만든 의거로 피체되어 고문을 당했다. 송상도 <기려수필>을 읽어본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고 김태근(원태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지 못했으니 안중근과 김태근 중 누가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성공 여부로 보면 안중근이 김태근보다 더 훌륭한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토 히로부미가 비록 안중근의 총탄에 죽었지만 그 조짐은 이미 김태근이 던진 돌에서 비롯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태근인지 원태우인지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성까지 바꾸어 김태근인지 김태우인지 모른다. 이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동일인물을 놓고 각각 '박제상'과 '김제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원태근 지사는 근대사의 인물이다. 지금이라도 그는 성명이라도 분명하게 확인되어 마땅할 독립지사이다.


을사늑약 체결에 분개, 이토 저격 계획

을사늑약 강제 체결에 격분한 지사는 일제 침략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을 응징해 한국인의 항일의지를 만천하에 알리기로 마음먹었다. 앞에 언급한 대로 그는 돌을 가공해 석조품을 만드는 것이 직업이었다. 돌을 사용해 거사를 벌이기로 했다.

삼엄한 경비대가 호위하는 이토 바로 옆까지 일반 조선인이 접근할 수는 없다. 하지만 멀리서 그 자를 지켜볼 수는 있다. '멀리서 돌을 던져 이토 놈의 머리를 부셔버릴 것이야!'라고 결심했다.

 원태우 지사 의거지' 표석에 새겨져 있는 의사의 투석 장면 부조
원태우 지사 의거지' 표석에 새겨져 있는 의사의 투석 장면 부조 정만진

1905년 11월 22일, 을사늑약 체결 기념 자축 행사로 이토 히로부미는 수원 팔달산에서 사냥을 했다. 6시 30분 안양발 열차로 귀경길에 오른다는 정보를 입수한 원 지사는 기차가 천천히 갈 수밖에 없는 서리재에서 기다렸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이토가 탑승한 기차가 느린 속도로 올라왔다.

때를 기다리던 원 지사는 길게 호흡을 참은 뒤 이윽고 직접 만든 돌멩이를 들어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향해 힘차게 던졌다. 돌멩이는 차창을 돌파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돌멩이는 두꺼운 유리창의 저항에 부딪혀 이토의 얼굴을 직접 가격하지는 못한 채 그의 좌석에 떨어졌다.

혹독한 고문, 지독한 탄압, 지난한 삶

하지만 조각조각 부서진 유리 파면이 튀면서 이토의 얼굴에는 피가 낭자하게 흘렀다. 왼쪽 볼 3곳, 그리고 왼쪽 눈과 귀 아래에서도 피가 솟았다. 이토는 피를 흘리면서 서울로 달아났고, 원 지사는 그 자리에서 피체되었다. 4년 뒤 안중근 지사가 그랬듯이 원 지사는 "나는 항일투쟁으로 이토를 응징한 것!"이라고 당당히 밝혔다.

거사는 일본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각종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인명사전에 따르면 일본 박문관 발행 <일로전쟁화보> 제29권(1905년 12월 8일)은 '어리석은 조선인의 폭행'이라는 제목 아래 기록화와 사건 내용을 소개했다.

원 지사는 혹독한 고문을 당해 자녀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후로도 일제의 엄중한 감시와 탄압으로 제대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게 살았다. 그러던 중 독립이 되었지만 그를 돌보아주는 나라는 아직 못 되었고 , 설상가상으로 전쟁이 터졌다. 동족상잔의 포성이 3.8선 하늘을 가득 메운 바로 그날 원 지사는 세상을 떠났다.

"이토 히로부미가 비록 안중근의 총탄에 죽었지만 그 조짐은 이미 김태근이 던진 돌에서 비롯한 것"으로 평가받는 원 지사의 1905년 11월 22일 거사를 여러분들께 소개한다. 이 글이 원 지사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의 이름을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내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덧붙이는 글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 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원태우 #원태근 #이등박문 #을사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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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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