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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만이 할 수 있는 기록, 나도 흑산도가 그리워진다

[서평] 이주빈의 <내 고향 흑산도 푸르다 지쳐 검은 섬>

등록 2024.11.22 17:50수정 2024.11.22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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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방에 도서가 없고, 바다가 하늘과 서로 맞닿아 아득히 넓고 끝이 없는 바다뿐’인 곳, 그곳이 흑산도였다.
‘사방에 도서가 없고, 바다가 하늘과 서로 맞닿아 아득히 넓고 끝이 없는 바다뿐’인 곳, 그곳이 흑산도였다.이주빈

더러운 섬놈 팔자 / 고립무원 서러움도 유전이 되고 / 원통할 섬놈의 피 / 씻어 내고 씻어 내도 짠 내는 가시지 않아 (아픈 것들은 모조리 파도가 되자)

시인은 섬에서 태어났다. "하도 멀어 섬 천 개는 / 징검다리 삼아 건너야 갈 수 있는 섬"이다. "천주쟁이 정약전, 왕의 도포를 훔친 상궁 / 가다 죽으라 보낸 유배지"란다. (내 고향은 흑산도)

서울·수도권에서 멀어질수록 인구가 가파르게 줄어드는 오늘, 이 섬은 벌써 늙고 야윈 지 오래다. 그곳은 "싱싱하고 비린 것들은 / 모두 서울로 가고 / 포구엔 온통 늙은것들뿐"인 섬이 다.(서해 노포(老鋪)에서)


시인은 그 섬이 밉다. 그리하여 "다음 생엔 이 소징한 섬에서는 / 절대로 나지 말아야지 / 그런 헛된 다짐이야 / 아비는 안 했을까 / 아비의 아비인들 안 했을까" 되뇐다. (아픈 것들은 모조리 파도가 되자. '소징하다'는 징하다, 징글징글하다는 뜻의 흑산도 말)

하지만 시인에게 흑산도는 그저 어릴 적 떠나온 고향이 아니다. 그곳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푸르던 그 어떤 시절이다.

 이주빈의 첫 시집 '내 고향 흑산도 푸르다 지쳐 검은 섬'
이주빈의 첫 시집 '내 고향 흑산도 푸르다 지쳐 검은 섬' 어른의시간

시집 <내 고향 흑산도 푸르다 지쳐 검은 섬>(이주빈, 2024)에 실린 시들을 읽으며 깨달았다. 시로도 한 시절을 기록할 수 있다는 걸, 손때 묻은 물건과 빛바랜 사진들을 모으는 일만으로는 다 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시가 할 수 있다는 것을.

갈파래가 짝지에 밭을 지으면 / 까맣게 반짝이는 아이들은 / 주르륵주르륵 미끄럼 놀이에 신났다 // 어른들은 먹지 못하고, 팔지도 못하는 / 갈파래 흉을 보며 / 여름 초저녁마다 걷어 내기 바빴다 (푸른 초저녁. '짝지(밭)'는 몽돌로 이뤄진 해변)

나 살던 옛집은 밤나무 숲에 있었지 / 서향으로 난 창으론 수수한 들녘 익어 가고 / 뒷산 자락엔 새벽마다 상고대 피었다 지곤했어 // 분칠 잘하던 옆집 새댁 야반도주하던 어느 봄 / 무수한 참꽃 서럽게 울어 대더군 / 칠성이가 농약 마신 것이 한 달쯤 되었던가 (흰꼬리수리 옛집)

한 삼백 년 산 팽나무 지나 / 선창가 끄트머리 집 보이제 / 거가 나 사는 데여 // 작년에 구신 된 영감이랑 같아 살어 / 둘이 맞담배질에 / 소주도 반 고뿌식 나누고 / 내 소리에 타당타당 장구바라지 / 얼마나 기막히게 했는지...... / 한 시절 좋았제 (당골래 도화(桃花). '당골래'는 전라도의 세습 무녀(무당)를 가리킨다)

그의 시를 읽으면 시간의 흐름에 밀려 저만치 흐릿해져 가는 아스라한 풍경들이 보인다. 그뿐인가. 지금은 그 어디에도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그와 함께 섬에서 살았던 이들의 마음이 읽힌다. 저 멀리 바다에서 불어온 짠내 머금은 바람이 살갗에 닿고, 정겹던 살냄새도 코끝을 스친다. 시가 아니고선 할 수 없는 일들이다.

새집 하나씨 다섯 식구 거느리고 / 맞바람 툭 밀고 들어오는 짝짓가에 / 초막 지었을 때 / 친모 잃은 어린 아비는 / 몽돌처럼 또르르 굴러가 / 작은엄니 마른 젖가슴에 파묻히곤 했다 // 아비가 맘씨 착하던 계모를 친모 옆에 묻고 / 저만한 나이로 짠 내를 몸에 배기 시작한 / 나를 끌고 섬 산봉우리에 올랐을 때 / 기막혀 서럽게 운 건 / 아비가 아니라 나였다 (아픈 것들은 모조리 파도가 되자. '하나씨'는 할아버지의 서남해 섬 지역 말)

흑산도 지피미 고향집 앞 / 까치발로 총총 여섯 걸음 걸으며 / 마당 같은 짝지밭 / 바다를 살짝 깨물고 / 수평선엔 뽀얀 아지랑이 / 그 속을 느리게 느리게 기어가는 배들 / (중략) / 섬마을 아이들 좁은 등에 / 차크르 소금 알갱이 / 안산 솔숲 성근 낙엽 밀고 다니는 / 미역 줄기 같은 바람이 닦아 주던 / 까맣게 흰 / 어린 동무들 살냄새 (향수(鄕愁))

쌓아 둔 추억만큼 / 파도는 일고 / 잊어야 할 이유만큼 / 물결은 멀어진다 / 더러 미련들 / 암초처럼 불쑥불쑥 솟아나 / 바다 한가운데 / 나를 잡아 세워도 / 돌아갈 수 없는 길은 / 돌아보지 않으리 (출항2)

시를 읽다 보니 나도 시인과 함께 짝지를 뛰놀다가 철들자 저 수평선 너머로 떠났던 섬놈이 된다. 내 어머니가 그 섬 어딘가에서 솥뚜껑 엎어 전 부치며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어느새 나도 흑산도가 몹시도 그리워진다.


한강 작가가 '변방'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로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지 어느덧 한 달이 되었다. 우리에겐 기억해야 할 변방의 이야기가 차고 넘친다. 그래서 시인의 말처럼 "바다에 주소를 둔" 이 작은 시집을 자꾸 들춰보게 된다. 산과 들과 강과 바다에 주소를 둔 더 많은 시들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시인 이주빈은 신안의 섬 흑산도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목포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왔다. 20년 동안 기자로 활동하다 지금은 섬문화 다양성과 태평양 기후 위기 대응 일을 하고 있다. <구럼비의 노래를 들어라>를 썼다.
#이주빈 #내고향흑산도푸르다지쳐검은섬 #흑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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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전북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 혁명>(2023),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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