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씩씩한 김계월 활동가에게도 엄마가 된다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김계월
처음으로 엄마가 된다는 게 실감 나고 두려웠다. 출산 예정일을 하루 앞두고 양수가 터져 급히 산부인과를 갔는데 간호사가 "일요일이라 진료를 할 수가 없으니 더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동네의 김경옥 산부인과에 가서 입원했다.
1993년 2월 1일 딸을 12시 3분에 출산했다. 엄마가 된다는 게 축복일 수도 있지만 무거운 책임감이 뒤따르는 것도 있었다. 친정엄마와 시어머니가 산후조리를 해주셨는데, 나는 그때 산후우울증을 겪었다. 모유수유를 해야 아기가 건강하고 면역력이 좋다고 생각해서 모유수유를 하는데, 너무 힘들었다. 여성으로 태어나 엄마가 된다는 게 어려웠고, 옛날 우리 엄마는 어떻게 다섯 남매를 키우셨을까 생각하니 친정엄마가 존경스러웠다. 엄마로 살아가는 것, 엄마가 된다는 것, 참 어려운 일이었다. 책도 보고 경험자들에게 물어보고 시행착오를 거치며 아이와 함께 성장한다는 걸 또 한 번 깨달았다. 그래도 여전히 엄마로 산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다시 노동자가 되다
광주에서 20년을 살다가 다시 서울로 상경해야 하는 변곡점이 생겼다. 제2의 고향이 된 광주에서 이웃도 생기고 친구도 생겼지만 남편의 사업 실패와 딸의 대학생활을 위해 광주생활을 접어야 했다. 고민을 거듭하고 가족회의를 여러 번 한 끝에 남편과 떨어져 살기로 했다.
남편이 하고 있던 가게가 IMF로 위기가 왔다. 고가의 춘란 생산을 위해 남편 친구집 옥상에 난실을 짓고 관리하던 중 폭설과 한파로 인해 애지중지 하던 고가의 난들이 얼어 죽고 말았다. 신용보증기금에서 수 천만 원 대출을 받아 경매로 샀던 난초가 얼어 죽어서 경제적 위기가 닥쳐 왔다. 그 전부터 경제적 어려움이 서서히 가족을 위협했지만, 친정엄마와 큰언니의 도움으로 그런대로 유지해 온 것인데, 결국, 오래가지 못했다.
무등산에 오르고 종교생활에 몰두하기도 하고, 친구, 언니들과 재미나게 살았던 나는 제2의 고향 광주에서의 20여 년 삶을 접고 2014년 봄 서울로 올라왔다. 큰언니, 작은언니의 집 근처에 반전세를 얻고, 딸과 함께 다시 서울살이를 하게 됐다.
인천공항에 다니고 있던 친구의 도움으로 2014년 6월 5일 케이오에 입사했다. 내가 하는 일은 아시아나항공 기내청소였고 스페셜이라는 부서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곳은 오전 7시 출근, 오후 4시 퇴근이어서 처음부터 출퇴근을 감안해 스페셜조에 가기로 했다. 5호선 새벽 첫 차를 타고 김포공항에서 공항철도로 환승해 출근했다. 현장 일은 쉽지 않았다.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팠고, 퇴근해서 집에 오면 쓰러져 잤다. 그렇게 6개월을 간신히 버티니 몸이 적응되어 한결 일이 수월해졌다.
동료들과 친하게 지내며 청소 업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청소노동자들은 평균 나이 50세 정도이고 남성들은 여성들보다 젊은 노동자들이 많았다. 밀페된 공간, 폐쇄적 공항 활주로는 항공기가 쉴새 없이 뜨고 내리는 것처럼 노동자들도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장시간 일하는 노동자를 회사는 노예처럼 부려먹기 일쑤였다.
밥 먹는 시간도 매일 다르고 퇴근 시간도 지켜지지 않았다. 밥 시간 외에 쉴 틈 없이 항공기를 따라 이동하며 일했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기내를 청소하며 과자, 빵, 초콜릿을 먹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조리한 것들이 내 귀에, 눈에 들어 오기 시작했다. 동료들과 함께 불만을 얘기하며 서로의 생각을 좁혀가며 모임을 만들었다. 우리는 퇴근 후에 공항 내 휴식처에서 하루 일을 되돌아보며 중간 관리자 뒷담화도 까며 웃고 떠들고 맥주도 마시며 즐겁게 지냈다.
첫 월급을 받고 이상해서 동료들한테 월급과 수당을 물어보니 제대로 아는 동료가 없었다. 급기야 팀장한테 가서 월급의 의문점을 물어봤다. 시원찮은 대답에 나는 월급에 꼼수가 있다는 걸 알았다. 동료들에게 꼼수수당을 말하고, 우리가 일하는 스페셜과 시트조에서 받는 1만 5000원의 수당이 기본급에 포함되는 돈임을 증명해 냈다. 동료들은 그동안 회사로부터 속았다는 생각에 분노했고 누군가는 "노조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동료들은 조금씩 노조에 대한 인식을 가지기 시작했고, 나에 대한 신뢰를 보내기도 했다. 20대에 노조를 했던 나는 그래도 경험이 있어서 현장 팀장과 부딪히면서 바른 소리도 했고, 동료들은 이에 공감했다. 노조에 대한 동료들의 열의, 열망이 보여 다행이다 싶었다. 물론 노조에 대한 혐오, 무지함도 있지만 변화된 세상에 의식이 변화된 노동자도 있었다.
2015년 드디어 케이오노동조합이 설립됐다. 노동자가 주인임을 알리고, 노동자의 권리와 인권을 되찾는 일을 시작한 나는 회사와 자본과 싸우기로 결심했다. 민주노조를 만들어 활동하는 현실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사측이 벌인 동료들과의 이간질, 갈라치기 등 전형적인 노조 탄압 앞에 물러서지 않았다. 10여 년 케이오를 다닌 선배언니가 '민주노조가 제일 잘한 것은 캄캄한 항공기에서 일하지 않게 만든 것'이라고 엄지척을 해주었을 때 노조를 잘하고 있구나 생각했다.

▲ 아시아나케이오 동료들과 함께
김계월
그 뜨거운 여름도 한파가 몰아치는 추위에도 안전하게 일할 수 있었던 건 민주노조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016년 사측이 민주노조를 위협하는 복수노조를 만들자 동료들은 사측의 회유에 하나 둘 노조를 탈퇴하기 시작했다. 가장 힘들고 갈 길을 잃어버릴 것 같았던 시간이었다. 믿었던 동료들이 하나 둘씩 노조탈퇴서를 옷장에 넣어두고 미안하다고 했다. 탈퇴서가 옷장에서 떨어질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 어떻게 만든 민주노조인데… 노조를 만드는 것보다 노조를 지키는 것이 정말 어려웠다.
그래도 민주노조를 떠난 동료들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은 것은 언젠가는 민주노조가 노동자를 위한 노조였다는 것을 깨닫게 될 거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빼앗긴 임금을 되찾는 일, 부당한 일에 나서서 회사와 싸우는 나를 보며 돌아섰던 동료들이 다시 민주노조에 가입하기까지 시간은 걸렸지만 민주노조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냈다. 그렇게 다시 민주노조는 부활했다.
그러다 2020년 코로나19로 나는 5월 11일 해고됐다. 부당해고에 맞서 투쟁을 했고 800일 만에 다시 케이오에 복직을 했다. 삶을 이어온 시간들을 되돌아보니 여성으로서, 노동자로서 당당하고 자존심을 지키며 살았던 때가 바로 노동조합을 할 때였던 거 같다.
어느 날인가 딸과 나눈 대화이다.
"엄마한테 노조 얘기 열 번도 더 들었어."
"딸아! 누구에게나 빛나는 삶이 있을 거야. 그런데 엄마는 돌이켜보니 노동조합 했을 때가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시절이었던 거 같아."
"그럴 수도 있겠네, 엄마한테는."
딸이 엄마의 삶을 인정해주는 거 같아 마음이 뿌듯해졌다.

▲ 딸과 함께
김계월
고되고 힘든 일을 하셨던 친정엄마를 보면 나의 엄마이기도 하지만 당당한 여성으로 보였던 때가 있었다. 당당한 여성노동자로 살아가는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며 딸이 보내는 응원의 말 한마디가 떠오른다.
'1963년생 김계월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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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노조했을 때가 가장 빛났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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