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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4.11.27 17:37수정 2024.11.27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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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가 보내온 첫눈 내린 모습 사진
김형남
오늘 '첫눈'이 내렸다. 첫눈이 보기엔 예쁘고 내심 반갑기도 하지만, 도시생활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해야 할 일'들이 바로 생각나기 때문이다.
친구가 새벽에 눈 내린 현장 사진을 보냈다. 고층 아파트에서 내려다본 이른 아침의 주택가와 건설현장 모습이다.
친구 사진을 보고 창문을 열어보니 우리 집 골목에도 눈이 제법 쌓였다. 더 쌓이면 안 될 것 같아, 일단 청소빗자루를 들고 나섰다.
30분 정도 힘을 쓰니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이 정도면 골목에 사는 사람들이 오가는데 애를 먹지는 않을 것 같았다.
더 이상도 할 수 있지만 계속 내리는 눈을 감당할 수 없었다. 눈 내리는 상황을 보고 또 치워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해 일단 빗자루질을 멈췄다.
골목길 눈을 항상 치우던 할아버지

▲ 첫눈을 맞은 조경수들
이혁진
사실 지지난해까지만 해도 옆집의 6.25 참전 용사 김아무개 어르신이 눈이 내리면 쓸었다. 새벽 눈 쓸어내는 소리에 잠을 깬 적도 했다. 내 기억으로, 어느 해 겨울에는 어르신은 새벽 3시경에도 일어나셔서 눈을 맞아가며 길가 바닥 눈을 쓸어내시곤 하셨다.
어찌나 부지런하시고 깔끔하신지, 당신 사는 골목에 휴지조각과 담배꽁초 하나만 있어도 이내 주워 치우는 분이었다. 그때마다 내가 한 일이라곤 수고 인사와 함께 간단한 음료를 드리는 것 정도가 다였다.
골목에 사는 사람들도 할아버지의 부지런함에 늘 고개를 숙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을 돕는 선행으로 경찰서 기관장 표창까지 받은 분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여름 할아버지가 갑자기 별세하셨다. 그 뒤 제설작업은 마치 자연스러운 듯이 내가 맡게 됐다. 골목길 사람들도 이제는 의당 내가 눈을 쓸어내는 것으로들 알고 있는 눈치다.

▲ 첫눈을 맞은 승용차
이혁진
골목을 조금 벗어나니 이면도로에는 벌써 눈 치우는 사람들이 작업하고 있었다. 자기 건물 앞 주인은 없고, 근처 주민센터나 봉사단체에서 급히 나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번 눈이 물을 많이 머금은, 이른바 '떡눈'이라 쓸기 힘들다는 얘길 나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능숙하게 눈을 쓸어내고 있었다.
그들은 "골목을 치워주는 분이 계시니 대단하다"라며 나를 치켜세웠다. 첫눈 내리는 날 젊은 사람들에게 덕담소리를 듣다니 기분 좋은 날이다.

▲ 첫눈을 맞은 나무
이혁진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젊을 때는 힘들게 눈 치우는 동네 어른들에게 인사도 제대로 할 줄을 몰랐다. 그저 나 바쁘다면서 까불며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한 마디로 '철부지'였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그런 철부지들을 위해 눈길을 쓸고 길을 내주는 노인이 됐다. 아마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더라도, 돌아가신 참전용사 어르신도 자신만의 이런 보람으로 골목길 눈을 깨끗히 치우셨을 것이다.
눈 내리면 고령 노인들 낙상 위험... 아버지 생각부터 난다
눈이 내리면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1930년생, 만 94세 고령이신 아버지 외출을 만류하는 것이다. 아버지 낙상 사고가 걱정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서울에 눈이 5cm가 내렸다"며 서설을 반기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아버지께 오늘만은 경로당에 가지 말고 나와 같이 지내고 식사를 드시면 어떻냐고 말했다. 오늘 하루는 같이 '방콕'하자는 제안이었다(관련 기사:
'딸 바보' 들어봤어도 '아버지 바보'는 못 들어보셨죠? https://omn.kr/2aftw ).
이렇게 폭설과 대설이 내린 날에, 눈길에 아버지를 내보내는 것은 아들로서 마음이 편치 않다. 노파심이지만 비가 내려도 나는 아버지 바깥출입을 가급적 자제 권고 드리고 있다.
고령의 나이가 되면 날씨 감각과 대처도 무뎌진다고 한다. 비나 눈이 오는 것도 모르고 외출을 감행했다가 낙상과 미끄럼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오늘은 아마 내내 눈이 계속 내릴 조짐이다. 혹시 고령의 부모님이 계신다면 당분간 외출을 삼가도록 주의하시라고 당부하는 것도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 지난 9월, 지팡이를 든 아버지가 경로당을 향해 걸어가시는 모습.
이혁진
수도권에는 '대설예비특보'가 내렸다. 폭설이 예상되는데, 나도 잠시 바깥일을 멈추거나 미뤄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골목길 눈 치우는 작업만은 계속할 작정이다. 골목길 안전을 지키던 참전용사 어르신을 따라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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