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일 오후 폭설이 내리는 서울 광화문광장을 시민들이 걸어가고 있다.
권우성
3년 전 겨울 어느 날, 눈이 엄청 내렸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눈발이 점점 굵어져 앞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조심스럽게 걸어 주차장에 도착해 시동을 걸었다.
하필이면 그날 내렸던 눈은 기습적인 폭설이었다. 예상치 못한 눈이었기에 안타깝게도 제설 작업이 제때 이뤄지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도로는 더 엉망이 되어갔다.
그래도 곧 괜찮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조심조심 도로에 합류했다. 이때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에게 다가오는 엄청난 일을.
도로 위에 있는 차들은 푸른 신호에도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날씨에 맞춰 얼음땡 놀이라도 하는 듯 모두가 그대로 멈춰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10분, 20분이 지나도 내 차는 꿈쩍도 하지 못했다. 분명 주차장을 벗어났는데 또다시 주차장에 들어간 기분이랄까.
당시 나의 퇴근길은 용산의 동부이촌동 쪽에서 한강대교 방면으로 가는 코스였다. 해당 코스는 평상시에도 자주 막히는 구간이고 폭설까지 오고 있으니 나름의 각오는 하고 출발을 했다.
한강대교 진입로까지 가는데 아무리 밀려도 30분 이상 걸린 적은 없다. 길어봐야 40~50분 걸리겠지 싶었는데 나는 그날 무려 두 시간 동안 이촌동조차 빠져나오지 못했다.
속 타는 운전자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이 쏟아진다. 안 막히고 신호 잘 잘 받으면 10분 만에도 주파할 수 있는 거리다. 꼬박 2시간이 넘는 고생 끝에 겨우 한강대교 교차로에 도착했다.
이제부터가 문제의 시작이었다. 앞에 사거리를 유심히 살폈다. 네 방향의 차들이 마치 쓰러진 도미노 블재택으록 마냥 멈춰 있다. 큰 버스 세 대 정도가 사거리 한가운데를 떡 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이건 당장 북한군이 내려와도 못 뚫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기다리면 한강대교 진입하는데 최소 한 시간은 더 걸릴 듯했다. 이미 저녁 8시를 훌쩍 넘어가고 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겼다. 하필 이럴 때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도로 위에서 두 시간 넘게 오도 가도 못하고 묶이게 될 줄 누가 알았나. 나는 결정해야만 했다. 도로를 지킬 것인가? 방광을 지킬 것인가?
재빨리 머릿속 회로를 돌려본다. 한강대교에 진입한다 해도 거기서부터 집까지는 또 얼마나 걸릴지 하나님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지금 행렬에서 이탈하는 순간 나는 집 가기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시 좌회전 차선에 합류하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나부터 구하기로 결정했다. 도로를 버리고 방광을 선택했다. 좌회전 차선이 세 개인데 내 차는 제일 우측에 서 있었다. 과감히 핸들을 꺾었다. 우회전하자마자 주유소가 보였다. 아, 하늘이 도왔다. 드리프트 하듯 미끄러지며 주유소로 들어갔다.
차 문을 열자마자 눈길을 번개처럼 달려 화장실로 향했다. 이 순간 중요한 건 스피드. 이미 찰 대로 찬 방광이므로 긴장 또한 늦춰서는 안 된다. 우사인 볼트 저리 가라 하는 속도로 화장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고, 다행히 내 방광을 무사히 지켜낼 수 있었다.
급한 불을 끄고 나니 배가 고파졌다. 거의 오후 9시가 다 되어가도록 차 안에 갇혀 있었으니 당연했다. 차에 탄 뒤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섰다. 한참을 기다려 한강대교에 진입하려니 답이 안 나온다. 사진 찍어 놓은 것 마냥 화장실 가기 전 모습과 지금의 도로 모습이 똑같았다.
반대편 차선을 보았다. 이촌동으로 들어가는 방향은 차량 소통이 원활하다. 나는 유턴하기로 마음먹었다. 도로에서 쫄쫄 굶으며 시간을 계속 보낼 수는 없기에. 차를 돌려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지금까지의 고생이 무색할 만큼 다시 회사 주차장에 차를 두고 사무실의 내 자리에 앉기까지 20분도 안 걸렸다.
허무함이 하늘에서 내리는 눈처럼 내 가슴에 가득 쌓였다. 탕비실을 뒤지니 컵라면이 한 개 있다. 뜨거운 물을 붓고 흡입하듯이 먹고 난 뒤 믹스 커피 한 잔을 들고 컴퓨터를 켰다. 이렇게 된 거 아예 늦게 출발하면 나을 거라는 생각에 난로를 켜고 눈을 붙여본다.
오후 10시가 넘은 시간. 이쯤이면 차가 어느 정도 빠졌으려니 하고 자리를 다시 정리했다. 주차장으로 걸어 가 차에 탑승했다. 주차장 출구를 지나 이촌동 도로에 들어서는데 아까보다 차가 훨씬 줄었다.
비교적 수월하게 한강대교에 다다랐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여전히 뒤엉켜 있는 모습이 아까와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거리 한가운데 버스가 서 있는 것마저 비슷하다. 물론, 아까 그 버스는 아니겠지만 중요한 건 여전히 집에 가는 길이 무척 험난해 보였다는 것이다.
인고의 시간 끝에 드디어 한강대교 위로 진입했다. 차가 가긴 가는 건가 의심이 들 때쯤 한 10센티미터쯤 움직였던 것 같다. 체감상 그랬다. 거기서부터 집까지 무려 세 시간이 더 걸려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참고로 회사에서 우리 집까지의 거리는 10km가 채 안 된다.
원래대로라면 1시간도 안 걸리는 거리를 무려 세 배가 넘는 시간이 걸려 버렸다. 그것도 한 번은 포기했다 재도전함으로써 성공했으니 사실상 거의 5시간을 쓴 셈이다.
집에 도착해 시간을 보니 새벽 1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하루가 지나 버렸다. 거짓말 좀 보태서 나의 퇴근길은 1박 2일 걸린 셈이다.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소파에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려 몸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다음 날, 뉴스에서는 제설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에 대해 엄청난 비판과 비난을 쏟아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폭설을 예고하는 재난 문자가 꼬박꼬박 오기 시작한 것이.

▲ 전역에 폭설이 내린 27일 하남시 상산곡동에서 눈길을 달리던 화물차가 전도된 모습
경기도소방재난본부 제공
어제부터 서울에 내린 눈은 11월 기준, 117년 만에 폭설이라고 한다. 근대적인 기상관측 이래 처음이라는데 어째 오늘은 겨울마저 평범하지가 않다. 첫눈은 원래 낭만인 법인데 이제 하늘은 우리랑 낭만적으로 지낼 마음이 없는 듯하다.
낭만은커녕 오히려 이 정도면 생존을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룻밤 사이 곳곳에서 각종 사고 소식이 들려온다. 이런 날 제일 안심할 수 있는 건 무조건 집에 있는 거다. 집 밖은 위험하니까.
3년 전의 폭설만큼 아니 그 이상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많은 눈이 왔다. 이런 날 '일해도' 되나 싶은 마음이 든다. 오늘 같은 날이야말로 긴급 임시 공휴일 좀 해주면 안 되려나. 아니면 하다못해 탄력적으로 늦게 출근한다거나 단축근무는 어떨까? 쉽지는 않겠지만 갈수록 늘어나는 기상 이변에 한 번쯤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다행히 3년 전 그때 이후로는, 서울시의 제설작업이 제법 신속해졌다. 조금만 눈이 올 기미가 보이면 어디선가 제설차가 나타나 열심히 활동한다. 눈을 치워주시는 분들의 노고에 새삼 감사함을 느낀다.
더불어 오늘도 쌓인 눈길 사이를 뚫고 각자의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향했을 모든 대한의 국민들에게도 심심한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출근길도 퇴근길도 모두 아무 일 없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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