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주의 교육장이 된 단식농성 현장. 가운데 안경 쓴 이는 문익환.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조광피혁과 청주공단 대공장에서는 시내 교회에 전화를 걸었다. "당신 교회에 근로자들을 보내지 않겠소." 회사 관리자들의 뜬금없는 소리에 교회 목사들은 황당했다. 알고 보니 청주도시산업선교회에서 신흥제분과 조광피혁 문제를 갖고 농성을 한다는 것이었다.
협박과 콧방귀
문제는 해당 사업장 기업주들만의 반발이 아니었다. 청주 기업주들이 모임을 갖고 공동대응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청주산선에 압력을 넣어 봐야 효과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일반교회에 무차별적으로 전화를 해 자기 기업의 노동자들을 교회에 보내지 않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1978년 3월 20일이었다. 이런 압력은 청주도시산업선교회와 그곳에서 단식농성을 하고 있던 노동자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경찰이 나섰다. 정진동에게 직접 협박의 칼날을 들이댔다. "당신 딸래미 구속시키겠어!" 정진동은 순간 당황했다. '저들이 무슨 약점을 잡아 저러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경찰의 이어진 말에 정진동은 코웃음을 쳤다.
경찰이 이야기한 것은 2년 전 일이었다. 즉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의 3.1절 기념 미사와 기도회에서 윤보선·김대중·함석헌 등을 중심으로 각계 인사들이 발표한 '민주 구국 선언'을 꼬투리 잡았다. 선언문은 유신체제를 비판하고 민주주의 회복을 촉구했다.
그런데 이 선언문을 충북 음성 출신의 이관복이 친구 정진동의 둘째 딸 혜영에게 타이핑을 부탁한 것이다. 아버지 친구의 부탁으로 정혜영은 타이핑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관복이 선언문을 복사해 갖고 다니다 불심검문에 걸렸다.
선언문의 출처를 역추적하던 경찰들은 정진동 목사와의 연계점을 억지로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단식농성 초기에 형사들이 찾아와 "정혜영 구속"을 운운한 것이다. 그런 협박이 정진동에게 통할 리 없다. 정진동은 농성자들과 함께 머리띠를 두르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마지막 메시지
"김병하를 복직시켜라" "퇴직금을 지급하라" "농성자를 협박하는 수사기관은 자폭하라" 힘껏 구호를 외친 이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자!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 물가 심어진 나무같이 / 흔들리지 않게~"
기업주들과 경찰의 농성자 흔들기 전술은 실패했다. 정진동 딸 정혜영 구속 발언으로 농성 대오를 흔들려는 작전이 실패하자, 경찰은 건물주를 부추겼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철문을 봉쇄하게 했다. 옥상 농성을 못 하게 치졸한 방법을 쓴 것이다.
탄압할수록 더욱 단단해진다던가. 농성자들은 기업주와 경찰들의 탄압과 꼼수에 적극적 대응을 했다. 3월 26일 청주 중앙공원에서 열린 부활절 기념 연합예배에 농성 상황을 알리는 홍보전을 했다.
그런데 그날 투박한 선전물 하나가 부활절 기념 연합예배에 참석한 기독교인들의 손에 쥐어졌다. "시민에게 보내는 메세지~"라는 제목으로 시작된 이 성명서는 청주산선의 단식농성 상황을 알리는 홍보문이었다. 성명서 마지막에는 글을 쓴 이가 사회에 바라는 점이 쓰였다.
법을 다루시는 여러분. 기업을 운영하시는 사장님. 수사를 맡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경찰관 여러분!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해줄 여러분께 우리 시민은 (중략) 네 이웃과 또 나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는데 올바르고 진정하게 판결하여 국민의 칭송을 듣는 사회가 되고 불평과 불만이 없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작은 힘이나마 서로가 기도해 주십시오. - 1978.3.25. 정진동 목사 장남 정법영
열아홉 살 청년 정법영(1959년생)이 청주시민께 드리는 호소문이었다. 당시 청주신학교 2학년생이었던 정법영은 아버지 정진동 목사의 도시산업선교회 활동을 보며 느낀 바가 많았다. 노동자와 민중을 향한 아버지의 뜨거운 마음을 존경했다. 그러던 차에 노동자, 농민들이 농성을 하는 모습을 보며 누구보다 그들의 처지에 공감했다.
그렇게 해서 성명서를 작성해 중앙공원에 배포한 것이다. 당시 운호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동생 정신영(1961년생)을 데리고 갔다. 그런데 그 성명서가 청년 정법영이 사회에 내던진 첫 발언이었다.
국회의원 민기식
문익환 목사가 농성장을 지지 방문한 날이었다. 농성장을 경계하던 경찰들의 경례 소리가 들렸다.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자 청주경찰서장이 에스코트해온 인물이 정진동에게 악수를 청했다. 국회의원 민기식이었다.
4성 장군 출신의 민기식은 국영기업체 '충주비료' 사장을 역임한 중진 정치인이었다. 제7~9대(1967년~1978년) 국회에서 내리 3선 의원을 했다. 공화당 소속의 그는 청주·청원 지역구 의원으로 국회 국방위원까지 역임해 실세 중의 실세였다.
농성자들은 양지만 쫓아다닌 그가 반가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민기식은 농성자들의 요구를 묵묵히 듣고 돌아갔다. 유신 정권의 노동자 탄압도 거셌지만 민원을 해결하는 방식도 '번갯불에 콩 볶아 먹기' 식이었다.
민기식이 3월 30일 오후 3시에 방문했는데, 신흥제분 노동자들의 퇴직금 문제가 해결됐다는 소식이 라디오 전파를 탄 것은 불과 몇 시간 만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광피혁 김병하가 복직된 것도 민기식이 농성장을 찾아온 지 불과 6일만인 4월 5일이었다.
신흥제분과 조광피혁 문제가 모두 민기식의 힘만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영향력은 미친 것만큼은 사실이다. 군인 출신 대통령 시대에나 있을 법한 속도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집권 여당 소속의 민기식이 노동자와 농민 문제에 특별한 애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그해 12월 12일 있었던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심을 얻기 위해 정치적 제스처를 취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1978년 연말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는 신민당 이민우에게 패해 낙선했다.
꿈을 비는 마음
1978년 6월 27일 전남대학교 교수들이 발표한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은 유신정권의 교육 이데올로기였던 국민교육헌장을 비판하고 학원 민주화와 민주교육 실시를 주장한 교육민주화운동이었다. 성내운 연세대학교 교수는 이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돼 교수직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 사건이 있기 두 달 전 성내운은 청주산선 농성장에 나타났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 청주산선 농성장을 지지 방문할 때였다. 성내운 교수는 이날의 본 강연 말미에 문익환 목사의 시 <꿈을 비는 마음>을 낭독했다.
벗들이여! / 이런 꿈은 어떻겠오? / 철들고 셈들었다는 것들은 다 죽고 / 동남동녀들만 남았다가 / 쌍쌍이 그 앞에 가서 화촉을 올리고 / 그렇지, 거기는 박달나무가 있어야지 / 그 박달나무 아래서 뜨겁게들 사랑하는 꿈(문익환, <꿈을 비는 마음>, 1973. 일부)
남북통일과 평화로운 대동 세상을 꿈꾸는 문익환의 시는 기업주와 권력가에게 할퀴어 상처 당한 농성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성내운 교수의 강연을 전후로 해 청주지역의 신·구교 성직자와 전국 각계 지식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강서교회 임신영 목사가 정진동을 위로했고, 청주시청 청소부 투쟁과 관련해 쫓겨났던 전 청주YMCA 총무 김원배 목사가 지지 방문을 왔다.

▲ 강연하는 문동환.
청주도시산업선교회
특히 천주교 청주교구 김광혁 신부는 단식농성 초기부터 마무리기까지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 이였다. 누구도 나서지 않던 농성단과 경찰·중앙정보부와의 중재자 역할을 자임했다. 결국 중재가 원만히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김광혁 신부의 순수함과 진정성은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지지 방문으로 고초를 겪은 이도 있다. 영등포산업교회 인명진 목사였다. 4월 20일 행한 그의 설교 내용이 문제였다.
"망할 것들! 권력이나 쥐었다고 자리에 들면 못된 일만 꾸몄다가 아침 밝기가 무섭게 해치우고 마는 이 악당들아, 탐나는 밭이 있으면 빼앗고 탐나는 집을 만나면 제 것으로 만들어 그 집과 함께 임자도 종으로 삼고 밭과 함께 밭 주인도 부려 먹는구나~" (미가서 2장 1~2절)
이 성경 구절을 토대로 설교한 인명진은 긴급조치위반으로 5월 1일 구속되었다.
문익환은 부추키고 함석헌은 말리고

▲ 경찰에 항의하는 장월룡의 아내(가운데 좌측)와 동생(가운데 상의를 벗은 이).
청주도시산업선교회
"밀착!" 선임자의 구령에 따라 전투경찰들은 좌·우측에서 더욱 비좁게 모였다. 도시산업선교회 입구와 청주고등학교 주변은 경찰 20여 명과 전투경찰들로 북적였다. 그렇잖아도 폭포수처럼 내린 비로 진흙탕 길이 된 거리는 더욱 어수선했다.
문익환 목사에 이어 함석헌 선생이 연단에 올랐다. 농성장에 모인 노동자와 농민, 도시산업선교회 회원, 학생들 사이에선 웅성거림이 적지 않았다.
<씨알의 소리> 대표 함석헌은 워낙 유명한 인물이기도 했지만, 백발의 흰머리와 턱수염이 마치 전설 속의 산신령 같았기 때문이다. 특히 함석헌은 1978년 청주 단식농성장에 다섯 번째 걸음을 했다. 말이 아니라 몸으로써 '씨알(백성) 사랑'을 표현한 이다.
물론 농성자들의 초미의 관심은 함석헌의 외모가 아니라 그의 말이었다. "씨알은 칼로 자르면 쉽게 죽을 줄 알지만 죽지 않는다. 죽이면 없어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들풀 같다." 그의 잔잔한 말은 농성자의 마음에 거대한 파도를 일으켰다.
강연이 끝난 후 고(故) 장월룡의 아내와 동생이 경찰들과 대치했다. 장월룡의 아내는 긴 막대기를 휘둘렀다. 형사들에게 막대기를 빼앗기자 돌과 진흙 덩어리를 던졌다. 동생은 웃통을 벗고 형사들에게 욕설을 하며 대들었다. 남편과 형이 억울한 죽임을 당했는데, 아무런 대책이 없자 화병이 생겼던 터이다.
'어떤 폭력도 안 된다'는 사상을 가진 '한국의 간디' 함석헌은 이들을 쫓아다니며 말리기 바빴고, 2층 사무실에 있던 문익환은 "약자의 저항은 정당한 것"이라며 응원을 했다. 1978년 6월 26일 얼어붙은 겨울 왕국의 비극적 코미디였다.

▲백기완 강연하는 백기완.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약 150일간의 장기 단식농성에도 불구하고 농민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한천동은 청주시에서 대토(代土)를 마련해 준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하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대토가 아니라 자신의 땅을 돌려달라고 했다.
자신들의 요구가 해결되지 못하고 농성을 정리하는 한천동과 박창우의 마음은 쓰라렸다. 하지만 농성 과정에서 정진동과 청주도시산업선교회를 만난 것은 감동 그 자체였다. 그들은 단식농성 과정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참나무 십자가를 만들어 청주도시산업선교회에 설치했다. 산에서 참나무를 베어와 만든 십자가는 민중의 땀이 배어든 전국 사상 초유의 십자가였다.

▲ 청주고등학교 옆 청주산선 앞에서의 진흙 시위.
청주도시산업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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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은 부추기고, 함석헌은 말리고... 얼어붙은 겨울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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