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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까지 덮친 데모의 열기, 19살에 처우개선 투쟁에 나서다

[여성노동자의 자기역사쓰기 9-1] 김용균재단 이사장, 김미숙씨가 살아온 삶

등록 2024.12.03 09:12수정 2024.12.03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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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노동자 자기역사쓰기'는 여성노동자들이 자기 삶과 노동의 경험을 젠더관점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노동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여성' 노동자로서 자긍심을 고취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과 더불어 기록되지 않은 여성노동자들의 경험을 되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이 사업을 통해 10여 명의 공공운수노조 조합원들은 60년대부터 현재까지 역사적 배경 속에 딸로서, 아내로서의 경험한 것을 돌아보고 여성 노동자로, 한 인간으로서 자기 성장의 역사를 기록하였습니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며 고통스러웠던 기억, 신나게 투쟁했던 경험, 조합원에서 간부로 성장한 경험을 모두 담아냈습니다. 왜 노조가 필요했는지, 노조활동을 통해 어떻게 성장했는지 등 개개인의 목소리를 통해 2024년 현재의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과 투쟁을 함께 고민하고 연대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기자말]
풍진 세상에 태어난 나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충북 영동군 용산면. 나는 1968년 12월 6일 셋째 딸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충북 영동군 용산면. 나는 1968년 12월 6일 셋째 딸로 태어났다. perfumekiller on Unsplash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충북 영동군 용산면 안에 12가구가 전부인 작은 시골 마을이다. 산 중턱에 옹기종기 자리 잡은 아담한 집 중에 우리 집은 3대가 함께 사는 12식구 대가족이었다. 나는 1968년 12월 6일 셋째 딸로 태어났다. 동네 대부분이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빈곤에 시달릴 시기였다.

고추, 벼, 담배 위주로 농사를 지었고, 우리 집은 소를 키웠던 것 외에 다른 집과 별다를 게 없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고추 한 근 가격이 겨우 3000원밖에 안 됐던 시절이라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살림이 나아지질 않았다. 우리 집은 선대에서 물려받은 재산은 거의 없었고, 부지런한 부모님 덕에 논과 밭을 사거나 일구어 살림이 넉넉하진 않아도 근근이 살았던 것 같다.

내가 중학교 마칠 무렵 아버지는 나보고 "고등학교 다니고 싶으면 동네 선배 언니가 일하고 있던 섬유공장에 들어가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면 된다"고 했다. 아직 어린 나이라 세상 물정 모르던 나는 좋은 직장을 고를 눈도 없었고, 학벌도 없어 아버지의 말씀대로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빨리 돈을 벌어 항상 돈에 시달리는 가정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열악했던 첫 직장생활

그렇게 선배 언니를 따라 1985년 경북 구미에 처음 발을 딛게 되었다. 한 달 기초교육을 받고 원단 생산하는 현장으로 투입되었는데, 여기가 가장 인원이 많았고 모두 여자였다. 남자들은 고장난 기계를 고치는 역할을 했고, 관리직들 또한 전부 남자였다. 3교대 근무로 자리를 배정받은 후 나는 선배에게 할당된 기계 10대를 열심히 따라다니며 일을 배웠다.

기계가 너무 커서 위압감이 들었고, 가동 소리도 시끄러워, 선배들에게 배우려면 서로 목소리 통을 키워야 했다. 그래서였는지 일 끝나고 퇴근할 때면 귀가 먹먹했다. 거기다 가끔 창문 사이로 햇빛이 들어올 때면 먼지가 얼마나 많이 날리는지 확인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아무렇지 않은 듯 일하고 있으니, 이런 환경에도 몸에 별 탈이 없나 보다 했던 것 같다.


좋지 못한 환경에도 나처럼 주야 학교에 다니기 위해 들어온 많은 친구와 재미있게 어울려 놀 수 있어 좋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기숙사 생활은 묘미가 있었다. 매일 일 끝나고 모여앉아 수다 떠는 것도 재미있는 생활 중 하나였다. 때때로 친구들과 함께 쉬는 날이 되면 놀이공원도 가고, 바다 보러 가고, 산악회에 가입해서 등산도 다니며, 나름 행복했던 기억이 많다.

그렇게 주간에는 회사에 다니고 야간에는 구미상고를 다니며 새로운 환경에도 별 탈 없이 적응해갔다. 드디어 첫 월급을 받았다. 12만 원이나 되었다. 난생처음 만져보는 큰돈을 벌었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나 자신이 대견하다고 느꼈다. 그 후로 학교 다니며 만난 다른 섬유회사 친구들과 서로 월급을 비교도 해봤지만, 모두 비슷했다. 그때 시내 버스비가 100원 할 때였는데, 처음 만지는 큰 금액이라 박봉이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첫 월급은 부모님께 내의를 선물해드리고, 나머지는 새 이불도 사는 등 수고한 나를 위해 모두 썼다.


처우개선을 위해 처음 투쟁을 해보다

1987년 88올림픽 열기가 매우 극심할 때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태어난 곳이 구미였고, 그 유명했던 금오공대가 구미 1공단에 있었다. 내가 다녔던 회사도 금오공대 근처에 있었다. 이런 지역 특성으로 다른 지역에 비교해 데모가 적은 도시였지만, 전국으로 확산된 대학들의 데모 흐름은 여기 금오공대까지 거세게 몰아쳤다. 대학에서 최루탄 터트리는 날은 눈뜨기가 어려웠다. 눈물은 또 얼마나 흘러나왔던지, 지금도 그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대학뿐만 아니고 여러 회사도 처우개선을 위해 투쟁하는 곳이 많아졌다. 드디어 말로만 듣던 데모를 우리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처우개선을 위해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관리자들 몰래 진행했고, 대부분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다음 날 오전, 기계가 멈춰진 현장에는 투쟁하러 회사 안 공터에 모인 사람들이 진두지휘에 따라 모두 자리에 앉았고, 나 또한 행동에 합류했다. 그렇게 3일째 되던 날 극적으로 회사와 합의하게 되었다.

정확하게 그때 받은 월급은 기억할 수 없지만, 거의 두 배에 가깝게 임금이 껑충 뛰어올랐다. 내 권리를 위해 처음 해 본 투쟁이었다. 이런 행위가 처음에는 불안하고 어리둥절했지만, 노동자들이 함께 뭉쳐 잘 싸웠던 것 같다. 그날 이후 넉넉해진 월급 덕분에 마음마저 풍요로워졌다. 그리고 명절에만 받던 보너스를 두 달에 한 번씩 손에 쥐다 보니, 월급날마다 돈 받는 재미가 쏠쏠했다.

결혼과 귀농

1992년 즈음은 섬유공장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뒤였다. 울릉도 친구들은 새 직장을 찾아 하나둘 떠나갔다. 나도 더 나은 환경의 직장을 알아보고 있을 때였다. 일하는 현장에 남자들은 많았지만, 한 번도 남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재미 삼아 몇 번 미팅한 정도였다.

결혼은 아직은 거리가 먼 얘기라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직장에서 상사와 일로 자주 의견 충돌이 있었는데, 서로 오해를 풀면서 지금의 애 아빠를 만나게 되었다. 성실하게 가정을 중시하면서 나를 아껴주는 세심함이 맘에 들었다. 그동안 모아온 돈으로 전세를 마련해서 살면 되고 함께 노력하면 남부럽지 않게 살겠거니, 생각하며 결혼을 약속했다.

친정에 먼저 인사하러 갔는데 아버지가 "성까지 갈겠다"라며 펄쩍 뛰며 결혼을 말리셨다. 이유는 시댁도 형편이 없는 집안에다 사위 될 사람도 비전이 보이지 않아서란다. 그렇지만 나는 나와 함께 살 사람은 내가 고를 것이며, 부모님이 말려 잘못되면 원망을 하게 될 거라고 끝까지 시위했다. 결국, 부모님은 마지못해 결혼을 승낙하셨다. 시댁의 무난한 승낙으로 2년 사귀다가 1993년 3월 20일 결혼을 하면서 구미시 신평동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처음부터 맞벌이로 시작했고, 집안일도 공평하게 나누었다.

우리는 사이가 좋았고, 이듬해 아들이 태어나면서 나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때는 나날이 행복이 충만했으므로 더 바랄 게 없었다. 그렇게 3년이 흐르다 예기치 않던 IMF가 터졌다. 애 아빠가 다니던 회사까지 부도를 맞게 되면서, 남편은 갑작스레 일자리를 잃었다. 임시방편으로 시댁이 있는 경북 영천으로 내려가 시부모님과 1년을 함께 살았다. 이듬해 분가해 소를 키우고 복숭아 농사를 지으려고 했지만, 애 아빠의 강력한 반대로 결국 못하게 되었다.

고추와 벼농사를 지으며 해마다 통장은 비어갔고 어영부영 날짜는 흘러, 어렸던 아이는 어느새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영천으로 내려갈 때 가진 돈은 기계 산다며 농사 밑천으로 다 써버렸고, 오히려 빚을 짊어지고 구미로 돌아왔다. 2000년, 아이를 형곡중학교에 입학시켰다. 구미는 이미 섬유업에서 전자업으로 전환된 상태였고, IMF 이후라 비정규직이 여기저기 퍼져있었다. 우리 둘 다 전자업에 취직했다.

애 아빠는 완제품을 포장하는 단순 노동을 하였고, 나도 PCB(인쇄 회로 기판)를 다루는 단순 노동을 했다. 회사는 서로 다르지만, 주야 12시간 맞교대를 해가며 악착같이 일했다. 그런데 상경할 때 전셋집 얻을 돈조차 없어 원룸에 들어갔다. 가구점으로 기반을 다져왔던 친정 언니한테 도와달라고 해야 하는데 무척 자존심 상했다. 하지만 당장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으니 마지못해 언니에게 손 내밀었다. 다행히도 언니는 기꺼이 "빌려주겠다"라고 해서 나는 "빨리 갚겠다"고 약속하고는 전셋집을 마련했다. 그렇게 만만치 않던 금액을 1년 만에 갚게 되면서 그나마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연재9-2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김미숙씨는 김용균재단 이사장입니다.
#여성노동자 #김미숙 #김용균재단 #자기역사쓰기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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