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평화전망대 맞은편에 보이는 북한
조경일
북쪽에 남은 가족이 있음에도 실향민들의 고향은 기록으로만 남은 채 사실상 소멸되었다. 그래서 실향민은 현실적으로도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다. 이 존재는 단절된 존재다. 연결이 없다. 반면 북향민은 여전히 북에 고향이 존재한다. 그곳에 가족들이 살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의미상으로도 '북쪽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라는 뜻의 북향민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다시, '왜 굳이 북향민으로 바꿔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내가 '존재의 문제'라고 답했음에도 그 답이 그이를 만족시키지 못했다면, 이번에 나는 '현실의 문제'로 다시 답해 보고자 한다. 바로 '북향민'이라는 용어가 체제 경쟁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탈북'이라는 정체성은 분단의 상징이자 결과물이다. 여기서 '탈북자'는 분단 체제가 낳은 존재들로 조난자이자 경계인들이 되고 만다. 그래서 북에서 온 이들은 자신을 자유인, 통일인, 통일민 등으로 부르며 자기 정체성을 새롭게 확립하려 한다.
하지만 이런 용어들 모두 분단과 체제 대결의 현실을 상징하는 의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거나, 정치적 이상향을 진술한 용어에 불과하다. 정치적 이상향은 그 이상향에 동의하지 않거나 그런 이상향을 주창하는 사람들과의 어울림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소외와 배제를 낳는다. 게다가 남한 사람들은 자유인이 아니며 통일이나 통일민이 아닌가라는 반문에 답할 수 없다. 결국 '탈북자'라는 용어가 우세할 뿐이다.
북향민들이 계속 '탈북자'로 규정되는 한 우리는 일상의 대화에서까지도 '분단'에 종속되게 된다. 사실 '탈북자'들은 분단과 체제 경쟁에서의 패자와 승자 모두에게 환영 받지 못하는 존재이다. 승자 입장의 남쪽에서 '탈북자'는 정치적으로는 환영 받을지 모르지만, 사회적으로 또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외부에 겉도는 사회적 타자로서 존재한다. 마치 이방인들처럼 말이다.
한국 사람들의 마음의 벽은 생각보다 높고, 그래서 '탈북자'라는 정체성을 벗어 던지지 않는 한 이들에게 근본적인 신뢰감을 주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물론 모두가 불신한다는 뜻은 아니다. 친절한 사람도 많다). 그래서 북향민들 앞에는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끝없는 인정 투쟁과 신뢰 투쟁이라는 과제가 놓인다. 인정 투쟁은 악셀 호네트가 소개한 이론이며, 신뢰 투쟁은 인정 투쟁에 빗대어 내가 만든 개념이다. 인정 투쟁과 신뢰 투쟁은 주류에 서지 못한 사람들이 해야 하는 것으로 당연시되는 숙명 같은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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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일 작가는 함경북도 아오지 출신이다. 정치컨설턴트, 국회 비서관을 거쳐 현재 작가로 활동하며 대립과 갈등의 벽을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까 줄곧 생각한다. 책 <아오지까지> <리얼리티와 유니티> <이준석이 나갑니다>(공저) <분단이 싫어서>(공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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