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 예산에서 의료급여 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의 변화 추이
정성식
이렇듯 예산 비중 추이가 안정적인 상황인데도 정부는 2007년에 준하는 "제2의 의료급여제도 혁신대책"이 필요하다고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 감춰진 다른 기준이 있는 게 아니라면, 결국 의료급여 재정 지출은 '줄이면 줄일수록 좋다'는 게 정부의 원칙이자 목표라고 밖에 해석할 수 없습니다.
복지부 뒤에 기재부가 있다
정부라고 뭉뚱그려 말했지만 부처 중에서도 기획재정부(아래 '기재부')가 의료급여 재정절감에 대한 강력한 동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국가 재정 운영을 책임지는 부처로서 기재부는 그동안 의료급여 재정관리에 깊숙이 관여해 왔습니다.
복지부는 건강보장과 사회안전망 강화를 주요 목표로 하는 부처로서 재정절감 일변도 정책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야 하지만, 예산편성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재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요. 정률제를 고집하며 복지부가 몽니 부리는 배경에는 이런 역학 관계가 작동하고 있을 것입니다.
지난 2006년에도 기재부(당시 '기획예산처')가 의료급여 재정문제를 가장 먼저 의제화했습니다. 당시 기재부가 만든 '국가재정운용계획 공개토론회' 자료에 담긴 주요 계획들이 거의 유사한 형태로 '의료급여제도혁신 추진계획'에 포함되기도 했었지요.
추정컨대 이번 정률제 추진 배경에도 어떤 형태로든 기재부의 압력과 개입이 있었을 것입니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이 기재부 출신인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만, 우리는 그가 2006년에 발표된 국가 장기종합전략인 '비전2030'을 총괄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전2030 전략은 복지정책을 성장전략의 하나로 간주하며 복지정책 기조를 '사회투자'로 전환하는 것을 골자로 했는데요. 아동과 같이 미래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가 사회투자의 핵심이었습니다. 따라서 투자 가치가 낮다고 판단된 의료급여는 재정 배분의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지요.
비전2030은 참여정부가 출범 초기 약속한 '의료급여제도의 지속적 보장성 확대'라는 정책 노선을 철회한다는 공식 선언인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비전2030의 혁신과제 중 하나가 '의료급여제도 개편'이었던만큼, 조 장관이 정률제와 관련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재정절감 패러다임과 '이삭줍기' 전략
지난 17년간 변하지 않은 건 바로 이러한 정책기조입니다. 정권이 계속 바뀌었음에도 견고하게 유지돼 왔다는 점에서 이를 '2007년 정책 패러다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다 상위의 차원에서 의료급여와 관련된 정책결정 과정을 지배하는 가치, 신념, 규범의 틀로 작동한다는 뜻입니다.
이 재정절감 패러다임 속에서 그동안 여러 비용억제 정책이 동원되었습니다. 요양급여일수상한제, 낮은 종별가산율(건강보험대비 75% 수준), 정신과(입원) 정액수가제, 의료급여 진료비 알림서비스, 의료급여사례관리사업 등이 그러한 예입니다.
한편 2022년 의료급여 진료비 중 입원(52.8%)이 외래(31.0%)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며 총지출 증가를 견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가장 큰 재정 위험요인인 입원비 지출을 어떻게든 통제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입원은 질환 중증도와 치료의 절박성이 높다는 점에서 외래처럼 본인부담금 부과가 쉽지 않습니다. 또 입퇴원 결정은 의사의 고유권한이라는 점에서 '입원일수 연장승인제도' 등도 선뜻 도입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차선책으로 장기입원 통제에 초점을 맞춘 사례관리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올해 '재가 의료급여 사업'을 전국으로 확대 실시한 것도 이런 의도가 크다고 봅니다. 건강 회복과 관리가 어려운 환경인데도 무리하게 퇴원을 종용할 경우 건강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은 별로 개의치 않으면서 말이지요.
이처럼 재정절감 패러다임은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정부로 하여금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도록 만듭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이삭줍기' 전략(행태)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요. 한 알의 낟알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철저히 재정·지출을 최소화하려 한다는 뜻입니다.
윤석열 정부가 열어 준 '기회의 창'
그동안 수급자 수를 전체 인구의 3% 수준으로 묶어 두었지만, 여전히 재정 당국은 고령화에 따른 의료비 지출 증가를 염려해 왔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긴축재정을 강조하는 윤석열 정부가 집권했지요. 윤석열 정부는 약자복지를 말하지만 정작 약자복지 확대에 무관심하고,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경청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적대적이기까지 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게다가 올해 의사 증원 이슈로 혼란한 와중에 의료개혁을 한다면서 건강보험 재정 위기설을 적극 띄우며 과다 의료이용 문제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도록 만들었지요. 그 일환으로 지난 7월에 '외래진료 본인부담률 차등제'가 시행하기도 했습니다.
연이은 대규모 세수부족으로 재정 허리띠를 졸라매야 될 상황이 되자, 의료급여 재정절감 문제에 골몰하던 관료들로서는 드디어 정치적 기회의 창이 열렸다고 판단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이전부터 준비해 왔던 외래 정률제 방안을 꺼내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을 고려할 때 의료급여 재정을 향한 '칼질'은 정률제 도입에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지속가능성'을 위한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외래진료, 약제비 뿐 아니라 입원 치료에서도 본인부담을 높이며 제도적 보장성을 위축시킬 공산이 큽니다.
지난 3일 갑작스런 비상계엄령 선포와 해제, 그리고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국면이 전개되면서 복지부가 정률제 도입을 어물쩍 연기할 가능성도 생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더라도 '2007년 정책 패러다임'이 그대로 유지되는 한, 또다시 틈만 나면 개악안을 꺼내들 것입니다.
결국 의료급여의 제도적 보장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재정절감 기조와 패러다임을 바꿔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 전체 보건의료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노력과 함께 수급자들을 과다 의료이용을 일삼는 부도덕한 존재로 매도하는 담론에 맞설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과다 의료이용=도덕적 해이' 담론이 왜 허구의 정치적 프레임에 가까운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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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건강연구소 연구원. 건강불평등 문제와 빈곤층 건강보장제도를 주로 고민하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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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퇴진과 함께 사라져야 할 의료급여 개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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