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4.3평화기념관에 전시된 서북청년회 출신 경찰 박형요씨의 증언.
전선정
그러던 중 1948년 3월, 경찰에 연행된 청년 3명이 고문치사로 잇따라 사망하며 제주도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제주도당이 내건 슬로건은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 남한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실현됐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요구들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4.3 발발 당시 제주도를 시찰했던 군정관리들조차 이 사건의 원인으로 관공리의 부패와 경찰의 가혹행위, 서청의 만행도 지적했다는 것이다. 미군정 검찰총장 이인은 시정방침에 신축성이 없었고 관공리들이 부패한 것이 제주도 사태를 악화시켰다면서 "고름이 제대로 든 것을 좌익계열에서 바늘로 터뜨린 것이 제주도 사태의 진상"이라고 규정했다.
4.3 발발 이후 9연대와 무장대 지휘부 간에 어렵게 맺어진 평화협상합의마저 '오라리 방화사건'이 일어난 뒤, 미군정이 9연대를 포함한 경비대에 총공격을 명령하면서 깨졌다. 김익렬 9연대장은 현장조사를 벌여 서청, 대청 등 우익청년단체가 방화를 했다고 미군정에 보고했지만, 미군정은 이 보고를 묵살하고 '폭도들이 자행했다'는 경찰 보고를 선택했다.
이 가운데 <동아일보>도 오라리 방화를 폭도의 소행으로 단정했다. 제주에 파견돼 연재기사를 쓴 정준수 기자는 5월 1일 노동자의 날에 제주도에서는 노동자, 농민의 집을 불살라버리고 노동자를 학살했다고 보도했다. 평화협상합의가 맺어진 상황에서, 언론의 허위보도와 미군정의 오판은 끝내 대학살극인 '초토화작전'으로 이어졌다.
무장대에 관해 부풀려지고 왜곡된 것들이 많다. 토벌대는 강경작전을 합리화하기 위해 무장대 숫자를 과장했고, "무장대는 남한 각지에서 모집한 백정", "중국 팔로군 출신"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딘 군정장관은 "무장대는 북한 공산군"이라고 언론에 왜곡 발언하는 등 여론을 어지럽혔다. 사실, 무장대의 초기 병력은 350명이었고, 전 기간 통틀어 500명 선을 넘지 못했다. 4.3봉기 당시 무기는 일제 99식 총 27정, 권총 3정, 수류탄 25발이고 나머지는 죽창이었다. 미군 장비로 무장한 토벌대에 견줄 수도 없는 전력이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과 무장대에 관한 정확한 이해 없이, 이들의 정치 성향이 좌익이니 규탄대상이라는 논리는 당시 소련과 힘겨루기를 해야 했던 미국의 '반공논리'를 비판의식 없이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트루먼 독트린을 천명한 미국은 패권국 지위를 유지하려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악으로 규정했다.
김익렬 9연대장의 회고에 따르면, 1948년 4월 UN 무대에서 소련이 제주4.3 문제를 비유하며 미군정의 실정을 질책하는 목소리를 높이자 미국 정부는 발끈해 한국에 파견된 군정장관 딘을 문책하고 조속한 진압을 명령했다. 미국은 소련의 선전공세를 막기 위한 방책으로 4.3을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한 반란'으로 규정하라는 지시를 했다. 김익렬의 유고집은 4.3의 본질을 왜곡하고 그 성격을 '공산폭동'으로 규정하는 이면에 미국의 전략적인 입김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중앙지와 지역지의 차이
민언련 모니터링 결과, 여전히 언론 댓글에서는 폭동, 북한, 빨갱이와 같은 단어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제주의소리>를 비롯한 제주지역매체는 댓글의 양상이 중앙언론과 달랐다. 단어빈도분석 상위에 빠짐없이 폭동, 남로당, 북한, 빨갱이 등이 들어간 중앙언론과 달리 지역매체에는 폭동을 제외하고는 모욕적인 단어가 상위에 올라와 있지 않았다. 김 대표는 이런 현상이 앞서 짚은 중앙지와 지역지의 다른 보도 양상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다.
"중앙지는 대개 특정한 시기와 특정한 의제에 한해서만 제주4.3을 조명합니다. 4월에 관련 기획보도를 하거나, 정부의 보상 정책, 정치인의 발언을 싣는 식이죠. 꾸준히 관심을 쏟지 않습니다. 반면 지역지는 4.3이 중요한 지역사회 현안인 만큼, 새로운 유골 발굴, 유족에 대한 보상, 4.3 역사왜곡 현수막 등을 꾸준히 보도해요. 중앙지와 지역지의 의제 설정 방향에 차이가 있는 거죠. 지역지가 필요한 이유예요."
실제로 중앙언론과 지역언론의 기사량에는 차이가 있었다. 올해 제주지역지는 월마다 비교적 균등하게 제주4.3 관련 기사를 내보냈지만, 중앙언론은 4월과 10월에 유독 기사량이 많았다. 4월은 제주4.3이 일어난 때이고, 10월은 <작별하지 않는다>를 쓴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때문이다. 토론에 참여한 김익태 KBS제주 기자도 "낯선 게 좋은 것"이라며 다른 지역 사람들도 제주4.3을 포함한 역사를 공유하는 창구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표현의 자유' 고통을 유족이 감당하라고?
4.3은 긴 세월 철저히 은폐됐다. 국민이 제주도민을 위로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4.3사건은 민중항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국가의 4.3사건 관련자 탄압은 계속되었다. 1987년 이산하 시인은 4.3을 다룬 장편서사시 <한라산>을 발표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았다. '폭도'와 '빨갱이'라는 낙인에서 벗어나지 못한 희생자와 유족들은 연좌제를 우려해 피해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1992년 제주도 다랑쉬굴에서 11구 유해가 발견되면서 4.3사건의 참상이 전국에 드러나는 듯했지만, 희생자의 시신은 한 유족의 말처럼 '콩 볶듯이 해치워졌다'.
미흡하나마 김대중 정부 이후 4.3 진상 규명이 시작됐다. 55년 만인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4.3사건과 관련해 사과하고, 2005년에는 국가 차원에서 공식 사과가 이뤄졌다. 그러나 여전히 피해자들은 국가 폭력의 상흔을 홀로 감내하고 있다. 기사와 댓글에서 치욕스러운 고통을 다시금 마주한다. 과연 4.3이 끝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폭도라는 말은 70년 전의 그 기억이 고스란히 오는 거거든요. 언론이나 유튜브에서 말하는 게 우리한테 폭력이 된다는 걸 현대 사람들은 모르세요."
4.3유족회 외무부회장을 맡고 있는 양성주씨는 보고회에 참석해 그간 느꼈던 설움을 토로했다. 그는 "표현의 자유를 유족들한테 감당하라고 하는 건 가슴이 아프다"며 "혐오 표현 하나로 희생자의 상처가 곪는다"고 말했다. 언론 보도와 댓글에 사용된 몇 마디가 희생자와 유족이 어렵게 지켜온 4.3의 진실을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 양성주 4.3유족회 외무부회장이 질의응답 시간에 발언하고 있다.
전선정
4.3을 왜곡하는 보도에 대응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지막 발제자로 나선 이용성 민언련 정책자문위원장은 4.3 역사왜곡이 반복되는 원인을 분석했다. 그는 역사왜곡의 배경에 사회적 갈등이 얽혀 있다고 지적했다. 진상조사보고서는 4.3특별법에서 규정하는 허위 사실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그는 4.3특별법 제정을 두고 "여야가 입장을 절충하는 과정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며 법과 진상조사보고서의 간극을 해결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고은경 4.3평화재단 연구원은 혐오 표현이 죄의식 없이 남발되는 사회에 아쉬움을 표했다. 언어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과거 4.3을 '폭동'과 '빨갱이'로 내몬 언론의 가짜뉴스는 국가 폭력을 합리화했고, 희생자를 침묵 속에 가두었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는 많아졌지만, 여전히 '폭동'과 '빨갱이' 낙인은 끊임없이 재생산돼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는다.
역사가 소비의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클릭 장사와 받아쓰기 관행에 익숙한 우리 언론은 진실을 왜곡한다. 독자와 광고주가 호응하면 진실은 뒷전으로 밀린다. 최근 우크라이나발 가짜뉴스에 놀아난 언론이 많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지역을 공격해 북한군 500명이 숨졌다고 보도하자, 우리 언론은 사실 검증 없이 일제히 받아쓰기에 나섰다.
미셸 푸코에 따르면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배제할지 결정하는 건 지식체계다. 지식체계가 누적될수록 배제는 점점 쌓인다. 이 과정에서 동일자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만, 타자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진다. 동일자는 드러나 있어 알기 쉽지만, 배제된 타자는 숨겨져 눈에 띄지 않는다. 동일자 중심의 역사가 반쪽에 불과한 이유다. 총체적으로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침묵한 타자의 목소리를 드러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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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조천읍에 배롱서원 북스테이를 열어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무료 기숙학교로 운영하며, 서울에선 MBC저널리즘스쿨 교수(초대 디렉터)로 일합니다. 조선일보 기자, 한겨레 경제부장,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초대원장(2008~2019), 한겨레/경향 시민편집인, KBS 미디어포커스/저널리즘토크쇼J 자문위원, 연합뉴스수용자권익위원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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