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평등 정의
대법원 홈페이지
들어가며 : 법이란 무엇인가?
법은 약자를 위해 만들어졌다.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
내가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일하면서 들었던 생각은 늘 "위 명제는 잘못된 것이 아닐까?"라는 것이었다.
'왜 국가폭력의 피해자는 바로 구제받지 못 하는가?', '왜 가해자는 처벌 받지 않고 떳떳하게 거리를 활보하는가?', '왜 진실·정의·배상이라는 과거사의 핵심 숙제는 여전히 해결이 되지 않고 있는가?', '과연 과거사위원회의 존속 이유는 있는가?'라는 질문은 지금도 여전히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2. 한국에서 이행기 정의의 문제점
기억할 것인가, 잊을 것인가?
흔히 한국 사회에서 정의 실현의 난점은 가해 주체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지배 세력으로 남아 있으면서 국가의 이름으로 이행기 정의 문제를 단순히 과거의 위법에 대한 실증주의적인 사법적 해결로 축소하는 데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곤 한다. 그러나 이는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다는 자포자기식의 타협적 주장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국가란 무엇인가', '축소하고자 하는 가해자들에 대해 법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결국 법은 사람의 문제이다. 약자의 눈물을 씻어 줄 법, 그것을 강단 있게 만들어 낼 법률가가 필요한 이유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각에도 법비의 준동, 광란의 현장을 목도하고 있다. 잊기 위해서는 기억해야만 한다. '타협된 정의'나 '한계가 정해진' 정의가 아닌 진정한 정의를 위하여.
3. 과거사 청산 방식에 대한 질문 5가지와 단상
과거사 청산을 위한 위원회는 흔히 5가지 기본 목표가 있다고 한다. ① 과거의 폐해를 찾아내 밝히고, 공식적으로 인정 ② 피해자들에 대한 대책 마련 ③ 정의를 바로 세우고, 책임 묻기 ④ 책임질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개혁안 권고 ⑤ 화해를 촉진, 과거에 대한 갈등을 해소. 그러나 세 번째 목표, 즉 정의를 바로 세우고 책임 묻기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 진실위원회의 사례를 보아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과거사 청산방식에도 비슷한 질문이 제기된다.
1)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진상규명)
2) 일어난 일에 대해 누가 어떤 책임이 있는가? (책임규명)
3) 그때 일어난 일이 옳았는가 틀렸는가? (가치판단)
4) 피해자(유가족)의 슬픔을 이해하고 같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공감 여부)
5) 이를 통해 잘못된 과거의 문제를 개선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개선 의지 여부)
나는 두 번째 질문, 즉 책임규명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해자가 누구인지, 어떤 체계를 갖고 있었는지, 가해의 내용은 어떤 것인지,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지 등등. 그러나 우리 과거사위원회들은 한시적인 기구라는 핑계로 피해자의 증언 수집만 열심히 할 뿐, 책임 소재와 책임자를 묻고 따지고 끝까지 책임지게 하려는 노력은 부재했다.
1기 진화위 때도 해당 법에 버젓이 동행명령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에 대한 적극적인 조사와 단호한 조치는커녕 가해자를 비호하거나 스스로 조사범위와 보고 내용에 대해 한계를 정하고, 특정 주제를 회피하는 등 핵심 인사들의 행태를 눈앞에서 보면서 상당한 자괴감을 가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의식 있는 조사관이나 위원들조차 제대로 된 과거사 진상규명을 방해하려는 세력에 의해 이미 누더기가 된 법과 씨름하면서, 법의 한계를 핑계 삼아 용서와 화해만 강조했던 게 패착은 아니었을까?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과거사 청산과 진상규명은 '지체된 정의'로, 결국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5·18민주화운동을 전면 부인하고 자연사한 전두환과 그 무리를 우리는 지금도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집단학살 문제는 이승만 정권이 법적 절차 없이 부당하게 민간인들의 목숨을 앗아가 놓고도 피해자와 유족들의 억울함은 늘 정당한 법적 절차 타령으로 풀어지지 않고 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야반도주한 후 국민을 부역자, 빨치산 협조자, 빨갱이로 몰았던 이승만과 그 협조자들을 지금이라도 법정에 세워 처벌하지 않는 한 제대로 된 과거사 청산은 요원하다.
해당 가해 기관들이 과거사위원회 권고안을 제대로 이행하지도 않고 대충 무산시켜 버렸던 사례를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다. 유가족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국가 기관이 알아서 하겠지"라는 막연한 기대와 무관심, 치열한 감시 부재는 유사한 이름의 과거사위원회를 계속 출범시키는 도돌이표 역사를 반복하게 한다.
1기 진화위 보고서에 대해 피해자들은 부실한 내용으로 학살자들에게 면죄부를 주었다고 성토하였고, 학계에서도 보고서가 군경과 좌익에 의한 희생을 병렬적으로 기술해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의도적 폭력이란 성격을 희석시켰고, 미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미국 쪽 설명 위주로 기술해 희생의 불가피성을 부각시켰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물론 이러한 결과는 과거청산에 소극적 내지 무책임했던 이명박 정권의 탓이 크며, 이명박이 지명한 위원장이 진화위의 이전 결정을 뒤집는 발언도 불사하는 등 스스로 진화위를 약화시키는 데 앞장섰고, 많은 경우 가해자였던 군경은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진화위의 권고 이행을 미루고 심지어 결정을 뒤엎으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2기 진화위 역시 윤석열 정권에서 임명된 자들이 과거사 청산의 기본적인 역사적 임무마저 내팽개치고 있음을 우리는 지켜 보고 있다.
과거사 청산위원회가 영장발부와 수색, 압수를 포함한 광범위한 조사권한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대부분 나라의 진실위원회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 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발간한 종합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4. 가해자 처벌을 위하여
한 줌도 안 되는 자들이 '국가'의 이름을 팔아 국가 공권력을 이용하여 개인에게 행한 폭력, 즉 인권침해를 바로잡고 재발을 방지할 해결책의 시작은 '확·실·한·가·해·자·처·벌'에 있다. 늘 화해니 용서니 추상적이고 감상적인 단어만 반복할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자에게 죄를 묻고, 시스템의 문제라면 시스템을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가해자들을 처벌할 정치적 의지가 중요하며 이는 실제적으로 가해자를 처벌할 '반인권행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 법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야 한다.
1) 국가폭력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의 경우 공소시효 폐지
2) 가해 지휘체계 및 가해자 강제조사
3) 가해자의 공직 배제
4) 불법행위 가담자는 말단이라도 가해 책임을 물어 구상권 행사
5) 훈·포장 박탈
6) 군사법원 폐지
7) 특별사면 폐지
8) 가해자 실명 공개
9) 강간과 성범죄 등 전쟁범죄/인권유린 조사와 가해자 처벌
5. 나오며
법률에 근거하지 않고 기관장의 재량과 운영규정에 의해 활동했던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나 국정원, 경찰청 과거사위원회는 '과거사 청산'이라는 뚜렷한 명분으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직 이기주의의 강고한 벽을 넘지 못했고, 실미도 사건의 경우 국방부과거사위의 사형수 4인의 유해발굴과 시신 인도 등의 권고는 국방부가 제대로 이행도 하지 않다가 17년이 지난 최근에서야 2기 진화위 권고에 의해 마지못해 이행하기도 하였다. 제대로 된 과거사 청산, 가해자 처벌을 위한 사법적 정의를 위해 정치적 의지가 중요한 이유이다. 범죄자가 처벌받지 않고 넘어가는 관행을 이제는 반드시 종식시켜야 한다.
옷장에 해골을 억지로 처박아 세워두면, 제일 곤란한 순간에 쓰러져서 문 밖으로 쏟아진다. 과거의 유령들을 조용히 잠재우려고 하면 할수록 더 자주 출몰할 것이다
- 프리실라 B, 헤이너
*글쓴이 안김정애는 현재 평화를만드는여성회 상임대표이며 기지촌여성인권연대 공동대표이다. 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2과장, 1기 진화위 조사팀장,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조사1과장으로 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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