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저는 44년 전, 국회와 KBS를 점령한 계엄군이었습니다

12.3 윤석열 내란 사태로 되살아난 트라우마... 이 고통을 안고 사는 이들이 더는 나와선 안 돼

등록 2024.12.12 07:12수정 2024.12.12 09:17
15
원고료로 응원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 무장한 계엄군들이 투입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 무장한 계엄군들이 투입되고 있다.유성호

아들이 살고 있는 미국에 방문하고 귀국한 지난 3일, 시차 적응 때문에 수면제를 복용하고 저녁 8시 반쯤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러다 밤 11시경 메시지 알림 소리에 잠에서 깨, 베개 옆에 두었던 휴대전화를 열었습니다. 아는 교수님으로부터 온 카톡이었습니다.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했답니다. 이거 미친 짓 아닌가요?"

아닌 밤중에 웬 홍두깨 같은 소리일까, 생각했습니다. 야밤에 무슨 이런 정신 없는 농담을 하시다니.

그러고서 다시 잠이 들었다가 새벽 4시 반쯤 다시 깼습니다. '어젯밤 카톡을 보낸 교수님이 밤 늦게 농담을 하실 분은 아닌데...' 혼자 생각하며 거실로 나가 TV를 켰습니다.

전 방송국이 난리였습니다. 완전 무장한 군인들이 국회를 침탈하는 모습이 여과 없이 TV화면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순간 온몸에서 피가 역류하다, 하체를 타고 쏟아져 내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44년 전 21살의 나이에 계엄군으로 국회와 KBS에 동원되었던 기억이, 잊혀졌던 상처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고통의 파고가 몸을 휘감았습니다.


며칠이 지난 지금도 그 육체적 정신적 트라우마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44년 전 그날... 멍에처럼 남아있는 죄의식


 4일 새벽 국회 본청에 진입한 군 병력이 국민의힘 당대표실쪽에서 본회의장 으로 진입하려 하자, 국회 직원들이 소화기를 뿌리며 진입을 막고 있다.
4일 새벽 국회 본청에 진입한 군 병력이 국민의힘 당대표실쪽에서 본회의장 으로 진입하려 하자, 국회 직원들이 소화기를 뿌리며 진입을 막고 있다. 연합뉴스

저는 44년 전 KBS와 국회를 점령했던 계엄군이었습니다. 부천의 33사단 101연대 1대대 2중대 2소대... 사단장은 소장 전아무개.

우리 대대는 당시 수도군단 기동 타격대대였기 때문에 박정희 사망 이후 밥 먹고 하는 일이 시민들을 '폭도'라고 부르며 제압하기 위한 충정훈련이었습니다.

저는 일등병이 된 지 얼마 안 됐던 때였는데, 박정희 사망 이후 박정희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서울 동작구 국립묘지 경호에 파견되었다가 얼마 후 계엄이 발령되고 국회를 접수한 것입니다.

몇 시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새벽에 출동하여 KBS와 국회, 양 기관을 접수한 우리 중대는 2개 소대는 KBS 지하에 내무반을 설치하고, 2개 소대는 국회의사당 왼쪽에 막사를 설치함과 동시에 출입을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병사들은 새벽에 국회로 달려와 계엄군을 밀치고 들어오려는 국회의원들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냥해 위협하고, 저항하는 의원들의 어깨를 개머리판으로 찍어 내리기도 했습니다.

경계는 반드시 실탄이 장전된 M16 소총을 휴대하고, '극렬 저항자나 야간 접근자가 암호를 받지 않고 도주할 시 발포하라'는 명령까지 받은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계엄령이 발효되면서 저희 중대에는 실탄을 휴대하고 자위적 발포 명령이 이루질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가 하달돼 있었습니다.

그때의 행동들이 44년이 지나도 멍에처럼, 부채의식처럼 죄의식으로 남아있습니다.

또, 전라도 순천 출신인 저는 부대 내 가혹행위도 경험했습니다. 고참들은 저를 마주칠 때마다 '너 전라도놈이야? 전라도 새끼들은 다 멸종을 시켜야 해!'라며 툭툭 주먹으로 머리를 치거나, 군홧발로 정강이를 걷어차며 지나갔습니다.

5.18 이후 폭행은 일상화되고, 저는 하루에도 수 번씩 M60 기관총을 만지작거리곤 했습니다. 저는 기관총 부사수였고, 탄약통을 관리하고 있었으니까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순간 순간 저를 총기사고와 죽음의 문턱으로 내몰곤 했습니다.

어느 날 밤에는 중대 중사 한 명이 술에 취해 내무반에 들어와서는 자고 있던 저의 침상으로 올라와 군홧발로 1시간을 짓이겨 대며 "전라도 새끼는 다 죽어야 해! 너를 반드시 죽여야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고통스러웠지만, 가족의 얼굴을 떠올리며 버텨냈습니다. 이러한 폭행은 내가 고참이 돼서야 끝이 났지만, 이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저는 업무상 여의도를 지나갈 경우에 결코 국회의사당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트라우마로 공황장애와 같은 고통을 겪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44년 여가 지났습니다. 다 잊은 것 같았던 고통이 이번 윤석열의 비상계엄에 의해 강력한 트라우마로 다시 재생될 줄을 몰랐습니다.

그 고통의 기억이 세포 세포 하나에 박혀 있는 것처럼 분노가 온몸을 휘감고, 하루 종일 하체의 피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듯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도대체 윤석열은 무슨 짓을 한 것입니까

 윤석열 대통령이 3일 저녁 기습적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계엄군이 점령을 시도한 국회앞에서 시민들이 집결해 계엄해제를 요구하고 있다. 일부 시민들이 국회 담장에 올라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3일 저녁 기습적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계엄군이 점령을 시도한 국회앞에서 시민들이 집결해 계엄해제를 요구하고 있다. 일부 시민들이 국회 담장에 올라가 있다.권우성

왜 그랬을까요?
왜 또 다시 그렇게 저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를 주었을까요?

윤석열은 자신의 처와 본인의 권력을 공고화하기 위해, 그리고 반대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입니다.

윤석열과 그의 내란에 동조한 권력자들은 지금까지 젊음을 국가에 바쳐온 장교들과 직업군인들을 내란의 범죄자로 내몰고, 그들이 저와 같이 평생 트라우마를 경험하며 살도록 내몰았습니다.

도대체 윤석열은 무슨 짓을 한 것입니까?

만약 윤석열의 쿠데타가 성공했다면,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되고 남북 간 국지전이 일어났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청년들이, 얼마나 많이 죽어나갔을까요?

저의 이 트라우마와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겠지요.

빨리 이 국가적 혼란이 끝나야 합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우리가 겪었던 고통을 겪지 않게 해야 합니다.

윤석열과 쿠데타를 공모한 세력, 그리고 반란인 줄 알면서 항명하지 못하고 동조한 군인들, 일벌백계해야 다시는 이 땅에 이러한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요.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눈물이 납니다. 빨리 좋은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제보를 받습니다
오마이뉴스가 12.3 윤석열 내란사태와 관련한 제보를 받습니다. 내란 계획과 실행을 목격한 분들의 증언을 기다립니다.(https://omn.kr/jebo) 제보자의 신원은 철저히 보호되며, 제보 내용은 내란사태의 진실을 밝히는 데만 사용됩니다.
#탄핵 #비상계엄
댓글15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순천고등학교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 전공 교보문고 편집장 역임 SuSE 리눅스 한국법인 대표 현 (주)서울교과서 대표이사


AD

AD

AD

인기기사

  1. 1 탄핵 1인 시위 도운 한남동 자영업자, '집단 린치'에 결국 영업 중단 탄핵 1인 시위 도운 한남동 자영업자, '집단 린치'에 결국 영업 중단
  2. 2 내란 공범들의 '후덜덜한' 학벌을 소개합니다 내란 공범들의 '후덜덜한' 학벌을 소개합니다
  3. 3 [단독] 경찰, 김성훈 경호처 차장 체포영장 신청 [단독] 경찰, 김성훈 경호처 차장 체포영장 신청
  4. 4 '내란집단 국힘' 찢은 부산시민들 "윤 즉각 체포" '내란집단 국힘' 찢은 부산시민들 "윤 즉각 체포"
  5. 5 박정훈 대령을 구한 사람... 재판부가 판결문에 굳이 남긴 말 박정훈 대령을 구한 사람... 재판부가 판결문에 굳이 남긴 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