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양사 운문암의 뒤에서 바라본 전경. 운문암 모습(2024년 12월 12일 촬영)
박용규
1894년에 운문암의 주지 경담(鏡潭) 선사가 운문암의 암자를 중건하고자 앞장서서 응운 스님을 추대하여 화주(化主:시주승)로 삼아 공사를 시작하였다. 때마침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응운 스님이 추진하던 운문암 중건 공사도 중지되고 말았다.
응운 스님은 중생(민중) 구제에 전념하고자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로 나서서 동학 포(包)의 대오를 지휘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이 진정되자, 운문암에 돌아온 응운 스님은 1895년에 운문암 중건 일을 거의 완수하였다.
그러나 응운 스님은 1896년에 장성 백양사에서 관군에 체포되어 전주감영에 압송되었다. 전주감영의 감옥에 구금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전주부재판소 이병훈(李秉勳) 판사는 1896년 8월 8일(양력)에 그를 교수형에 처하고, 집행하였다. 승려 응운은 최후 진술에서 이렇게 당당히 발언하였다.
"나는 동학의 우두머리 전봉준(全琫準)의 무리로 진실로 여러 곳을 수행하였으나 오히려 체포에서 벗어났다. 오늘에야 체포되었다. 이는 진실로 내 목숨이 다한 때이다.(矣身이以匪魁全琫準之徒黨으로果爲隨行各處而尙在漏綱이다가被捉於今日하니此實矣身命盡之秋이다.)"(「전주부재판소 판사 이병훈 보고서」(1896년 8월 8일 제4호), <사법품보(司法稟報)>)
이번 백양사 탐방의 또 다른 목적이 응운선사 탑비 답사에도 있었다. 최근 김남수 편집장은 <동학혁명에서 순절한 응운應雲 스님>(<불광미디어>, 2024. 11. 19)이라는 글을 통해 '응운선사순공지탑(應雲禪師殉公之塔)'의 내용과 원문을 소개하였다. 김 편집장의 글에 나오는 응운선사 탑비의 원문 가운데 몇 개의 한자가 누락이 되어 있어, 필자는 이를 보완하고자 하였다.
응운선사 탑비는 백양사 성보박물관을 지나 1백미터 오른쪽의 부도(승탑군) 안에 있었다. 승탑군 입구에서 가장 오른쪽 가장자리에 응운선사 탑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응운선사 탑비의 상태는 매우 양호하였다.
탑비에는 일제강점시기인 1940년 6월에 백양사 주지 만암 송종헌 스님(65세)과 영호(映湖) 박한영(朴漢永) 스님(71세)과 제자 기룡(基龍) 차성희(車成熙) 스님(60세)이 합세하여 비를 세웠다고 쓰여 있었다.

▲‘응운선사순공지탑(應雲禪師殉公之塔)’과 필자 (2024년 12월 12일 촬영)
박용규
필자는 탑비의 원문 전체 글자를 모두 확인하였다. 응운선사의 탑비 바로 왼쪽에는 스승 한양선사(漢陽禪師)의 탑이 있었다. 응운선사의 탑비에서 한 계단 바로 아래에 제자 기룡선사(基龍禪師)의 탑이 있었다. 응운 스님의 스승과 제자가 사후에도 모두 한 곳에 모셔져 있어, 매우 아름다웠다. 다음 기회에 '응운선사순공지탑(應雲禪師殉公之塔)'의 전체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백양사에 가거든 진영각(眞影閣) 안에 있는 동학농민혁명군 지도자 응운 스님 초상화와 운문암 그리고 부도(승탑군) 안에 있는 '응운선사 탑비'를 살펴보는 즐거운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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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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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성 백양사에 가거든 꼭 봐야 할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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