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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처단'에서 느낀 공포, 환자들이 겪었을 불안을 떠올리다

12·3 계엄과 7개월간의 산골 의사 생활이 불러온 사직 전공의의 생각 변화

등록 2024.12.24 17:47수정 2024.12.24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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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월 12일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 응급의료센터에 의료진 인력 부족 안내문이 나오고 있다.
지난 9월 12일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 응급의료센터에 의료진 인력 부족 안내문이 나오고 있다.연합뉴스

나는, 2024년 2월 윤석열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 발표 직후 강경하게 저항했던 전공의 중 한 명이었다. 가톨릭중앙의료원의 인턴 대표를 맡아 동료들과 함께 앞장서 사직서를 제출했고, 석 달간 내외신 인터뷰와 기고, 국회와 의사협회 및 광화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000명 증원의 비합리성, 전공의 탄압의 부당성을 알리려 바쁘게 활동했었다.

그러나 12월 3일의 계엄과 이전 7개월간의 강원도 산골 의사 생활과 수련은 강경 전공의였던 내게 변화를 불러왔다. 그 변화를 나누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해 이 글을 쓴다. 여전히 의대 증원을 반대함은 물론이다.

아, 환자들도 이랬겠구나

윤석열 대통령은 12월 3일 계엄 포고령 5항에서 '전공의…는 계엄법에 따라 처단한다'라는 조항을 넣었다. 계엄의 사유와 전공의 복귀를 연결하는 것은 윤석열 대통령의 상황 판단 수준을 의심케 했으며, 이미 6개월 전 행정적으로 사직 처리가 완료된 것을 개인감정으로 추가한 것은 그의 인간적 치졸함을 보여주었다.

계엄 직후인 12월 4일 새벽 1시경, 나는 어머니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그제야 잠에서 깼다. 이미 수 차례 부재 중 전화가 와 있었다. "계엄이 선포됐어!" 처음에는 현실감이 없었다. "대통령이 그예 미쳤다! 그대들을 처단하겠단다. 어여 피하셔!" 군사정권의 엄혹함을 겪으신 당신이기에, 아들에 대한 걱정은 더 크셨다.

무서웠다. 죽음의 공포가 엄습했다. 다음은 당혹감이었다. 나는 이미 7개월째 강원도 산골 응급실에서 근무 중인데, 어디로 복귀하라는 말인가. '처단'이라면, 죄가 있음을 결정하여 처치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글자대로라면 '죽여 없애다'는 뜻이기도 하지 않은가! 한 직역을 이토록 악랄하게 탄압한 예가 있던가. 개인적인 원한과 악의가 느껴져 모골이 송연했다.

급한 대로 짐을 챙겨 전공의가 아닌 동료의 집으로 피신했다. 모든 전자기기는 전원을 끄고 공원에 묻어두었다. 다행히도, 용기 있는 공화국 시민과 국회의원들과 보좌관들의 기민한 대처 덕분에 계엄은 해제되었고, '내란'은 몇 시간 만에 막을 내렸다.


부정과 분노, 당혹과 비현실감, 감정의 폭풍이 휘몰아친 뒤 찾아온 것은 '환자들'에 대한 짙은 공감이었다.

12월 3일 계엄으로 내가 느낀 모든 감정을, 환자들은 2월 의료 대란 때부터 느껴왔을 터였다. 갑자기 줄어든 병원의 기능에 분명 불안하고 무서웠을 것이고, 누군가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왜 내게 이런 일이 닥쳤을까, 병원은 구급차를 왜 받아주지 않는 걸까, 수술이 밀리면 암이 어디까지 퍼질까…'


다시 한번, 급작스럽고 일방적으로 내민 의대 증원 정책도 정책이려니와 폭력적이며 보편 인권에 어긋나는 '사직금지명령' '집단행동금지명령' '업무개시명령'과 같은 협박에는 지금도 분노를 참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책임의 논쟁과 경중을 떠나 의료 대란의 당사자 한 사람으로서, 어려운 시기를 겪으셨을 환자분들께 죄송하다. 이 자리를 빌려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강원도 산골 의사 생활과 수련이 불러온 인식 변화

4월 말, 강원도에서 제안이 왔다. 지역에서 여러 가지 재미있는 실험을 하고 있다고 했고, 의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연고도, 선후배도 없는 강원도 산골 인구 4만의 유일한 응급실의 당직 의사가 되었고, 일차의료를 참관하고 배우며 수련하고 있다.

시끄러운 바깥 세상과 단절된 강원도에서의 경험은 내게 새로운 시야의 창을 열어주었다. 의료 시스템과 의료계에 대한 생각을 환기해 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동안 한국 의료가 뛰어난 성과를 보여온 것은 사실이다. 평균 수명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상위권, 짧은 수술 대기 시간, 낮은 도시-농촌 간 의료 격차는 객관적 수치다. 2월에도 이를 바탕으로 정부의 의료 개혁에 반대해 왔고, 2월 이전으로의 '원상 복귀'를 주장해 왔다.

그러나, 한국 의료 시스템은 이미 곪아있었다. 지속가능성을 상실한 지 오래다. 2022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경상의료비는 9.7%로 OECD 평균을 넘어섰고, 2033년 16%에 도달할 것으로 발표되었다. 소송 위험과 과로에 고통받고 필수 의료를 떠나는 의료진, 환자의 건강을 증진하지 못하고 필수 의료를 정의롭게 보상하지 못하는 지불 제도, 영리화된 병원과 무너진 의료전달 체계, 보장성 강화 정책의 반쪽 성공과 실손보험의 교란적 기능 등 기존 의료시스템은 문제투성이였다.

'진짜' 의료 개혁이 필요하다. '환자를 중심'에 놓고 인구 집단의 건강 결과를 개선하는 시스템, 행위별 수가에 의존하지 않는 지불 제도로의 점진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보장성의 확대 방향성은 유지하되, 실손보험의 보충적 성격은 명시해야 한다. 의료전달 체계는 강화해야 하며, 지역-수도권 의료 격차는 줄여야 한다. 필수의료 의사들이 일할 수 있도록 소송 위험을 줄이고 분야 수가를 현실화해야 한다. 국회 차원에서도 도움이 절실하다.

그동안 의료계의 일방적인 주장만 들어오지는 않았나 반성한다. 공급자인 의사 목소리만큼이나 돈을 지불하는 주체인 의료 소비자의 목소리가 반영되어야 한다. 임상의사, 보건의료정책 전문가, 정책 당국, 소비자와 치열한 토론을 통해 지속 가능한 의료 제도로 개혁이 이뤄지기를 바란다.

인간은 서툴고 모자란 존재, 늘 반성과 성찰할 수 있는 존재

인간은 모두 서툴고 모자란 존재다. 늘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나 또한 잘못과 실언으로 사람에게, 시민에게, 환자에게 상처를 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계엄으로 죽음의 위협이 닥쳐서야 내가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은 이들의 공포를 생각한, 공감의 결여를 반성한다.

2,000명 증원이라는 주술적인 숫자를 고집하던 윤석열 대통령의 시간은 끝났다. 이제는 공화국 '시민'과 합리적인 '의사'의 시간이다. 서로 공통점을 더 많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갈등이 두려워 논의를 미루지 말자. 우리의 연대는 분명 더 나은 의료를 가져올 것이다.

* 필자 소개: 류옥하다 기자는 강원도 산골에서 일하는 일차 의료, 응급의료 의사입니다. 지난 2월 16일 윤석열 정권의 일방적이고 비과학적인 의대 증원에 맞서 사직한 전공의 중 한 명입니다.
#의대증원 #의료대란 #계엄 #내란 #전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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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살려 섬기고 나누는 소박한 삶, 그리고 저 광활한 우주로 솟구쳐 오르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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