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운선사순공지탑(應雲禪師殉公之塔) 3면. 탑비 3면은 “동학이 일어나 몹시 어지러웠다(東道?攘)”로 쓰여 있고, 응운 스님이 “동학(삼매경)을 쫓아 봉기하였고, 중생(백성) 구제에 전념하여 동학 포(包)의 대오를 이끌며 지팡이를 휘둘렀다.(師從三昧以起專念?衆飛錫包伍)”라고 기록하고 있다.(2024년 12월 12일 촬영)
박용규
응운 스님의 동학농민혁명 시기 활동상은 구술 자료에 의해 보완할 수 있다. 서동석 선생은 백양사 방장을 역임한 수산(壽山, 1922∼2012) 스님으로부터 1994년 4월∼5월 경 영광 불갑사에 찾아가서 응운 스님에 대해 직접 들은 내용을 그대로 <법보신문>에 기고한 글('장성 농민군 이끌며 응운 스님 맹활약', <법보신문>, 2004, 8, 10.)에 그대로 옮겼다고 필자에게 말씀해 주었다.(필자는 2024년 11월 25일에 서동석 선생(1954년생, 71세)과 통화함)
"응운 스님의 지휘로 백양사와 불갑사, 선운사 스님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곳의 스님들은 1893년 3월의 원평집회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삼남지방에 혹독한 가뭄이 일고 농민들의 소규모 저항이 빈발하면서 스님들의 합류는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공주의 우금치에서 대규모의 결사항전이 일본군의 개입 후 패전으로 끝난 뒤 농민군의 전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관군과 일본군의 공세에 밀리면서도 논산 황화대에서 일대접전을 벌였다. 진산에서도 격전을 벌였는데 이때 응운 스님이 참전하였고 수만 명이 관가를 습격하여 읍성을 함락했다. 그러나 거센 관군·일본군의 연합부대에 밀려 전주를 거쳐 원평으로 남하했다. "(수산 스님의 1994년 증언, '서동석의 글')
즉 응운 스님이 백양사와 불갑사, 선운사 스님들을 지휘하여 동학농민혁명에 참여시켰다는 것이다. 전봉준은 1894년 9월 10일에 삼례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2차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다.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티에서 11월 9일 일본군과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다시 논산 황화대에서 11월 15일 일본군과 싸웠으나, 또 패배하였다. 금구의 원평에서 11월 25일 일본군과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전라도의 진산(珍山)·고산(高山)과 충청도의 동학농민군 수만 명이 10월 22일 진산에 모여 10월 24일까지 전라도 금산읍(錦山邑)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여기에 응운 스님도 참여하였다.
이처럼 응운 스님도 동학 2차 봉기시기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일이 발각되어, 응운 스님은 1896년에 장성 백양사에서 관군에 체포되어 전주감영에 압송되었고,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박한영 스님은 응운 스님의 동학농민혁명 시기 활동을 자비심의 발로로 "백성 구제에 전념(專念捄衆)"한 실천승으로 1940년 '응운선사순공지탑' 비문에 기술하였다. 필자는 적확한 사필(史筆) 기록이라고 판단한다.
탑비 건립 내력
응운 스님 서거 45년이 되는 1940년 봄에 백양사 주지 만암 송종헌 스님과 영호 박한영 스님 그리고 기룡 차성희 스님이 힘을 합쳐 '응운 스님 탑비'를 세웠음을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옛 응운 박우능 선사 서거 후 45년이 되는 1940년(경진년) 늦은 봄에 작은 스님 차기룡이 백양사와 협동하여 견고한 비석을 갖추고 정호(박한영)에게 비명(碑銘)을 구하였다."(탑비 3면)
아울러 탑비의 비문을 짓고 탑비의 글씨를 쓴 박한영 스님의 비명(碑銘)을 탑비 3면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박한영이 드디어 비명을 지어 말하였다.
'오직 구름(응운 선사)은 흰 돌 높은 바위에 머물렀기에
절 짓고 불법을 수호하는 그런 절의 경영과 같은 일은 참담하였네.
슬프다! 저 남북조시기 현감 적중간(翟仲侃)이 신광 혜가(慧可, 선종 2대조)선사를 해침(처형함)에 미쳤으나
혜가를 해침은 칼로 봄바람을 벰과 같아서 머리를 돌려나도 어찌 혜가가 손상될 것인가.
강남 여러 사찰의 꽃과 대나무는 응운 스님의 편안함에 힘입었고
돌에 글을 지어 새겨 어리석고 흉악한 놈들(응운 스님을 죽인 자들)을 경계할 수 있었다네.'
귀산 후학 영호 박정호(朴鼎鎬, 박한영)가 글을 짓고 글씨를 씀."(탑비 3면)
이렇게 박한영은 비명에서 응운 스님의 억울한 죽음을 중국 선종의 제2조 신광 혜가(慧可, 487∼593)의 죽음에 비견(比肩)하였다.
끝으로 탑비 4면에서 응운 스님의 제자들 이름을 쓰고, 탑비 건립 연월을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응운의 법을 이은 1세: 경신(敬信) 성희(成熙) 학신(學信)
응운의 법을 이은 2세: 일선(一鮮) 기준(基俊) 정민(正敏) 명안(明彦) 융원(戎圓) 승렬(承烈)
불기 2967년 경진(庚辰) 소화15년(1940) 6월 세움."(탑비 4면)
이처럼 응운 스님의 1세 제자로 경신(敬信)·성희(成熙)·학신(學信)이 있었다. 2세 제자로 일선(一鮮)·기준(基俊)·정민(正敏)·명안(明彦)·융원(戎圓)·승렬(承烈)이 있었다. '백암산백양사불사리탑비'(1924)의 뒷면 시주질(施主秩)에 기룡성희(基龍成熙)가 나오고 있고, 화주질(化主秩)에 운양일선(雲羊一鮮)이 나오고 있는데, 각각 같은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제자를 키워낸 응운 스님의 학승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응운(應雲, 1854∼1896) 스님 초상화. 백양사 진영각 안에 있음(2024년 12월 12일 촬영)
박용규
총괄컨대 응운 스님은 학행일치(學行一致),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승려였다. 특히 그는 동학농민혁명시기 항일 승려이기도 하였다. 항일 한국불교사의 정신사적 맥이 임진왜란 시기 서산대사(휴정)·사명당(유정)·영규대사에서 동학농민혁명 시기 응운 스님으로, 다시 일제강점기 만해 한용운·백용성·백초월로 전개·계승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전남 장성에 있는 백양사에 가거든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응운 스님의 탑비'를 탐방하고 살펴보는 즐거운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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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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