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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치'의 뜻 아시나요?... "새빠지게 썼어예"

점차 사라져가는 세계... 권영란, 조경국 지음 <경상의 말들>

등록 2025.01.05 19:48수정 2025.01.07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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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 출판 편집자이다. 거실 책상에서 일하며 책 속으로, 책 밖으로 산책하는 것이 일상의 낙이자 유일한 신체 활동이다. 편집 작업을 하는 와중의 책 이야기, 다 만든 책 이야기, 남이 만든 책 이야기… 기웃기웃, 어슬렁거린 산책길의 이야기를 풀 계획이다.[기자말]
30대 후반, 이직으로 서울살이를 할 때 나의 대구 사투리를 대하는 사람들은 대략 두 부류로 나뉘었다. 귀엽고 재미있다며 한 번씩 내 토박이말에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호의적으로 대하던 부류와 투박한 억양이 공격적으로 느껴지는지 나는 전혀 의식도 못 한 지점에서 왜 화를 내냐며 "어~ 무서워!"하던 부류.

이렇건 저렇건 나이를 먹을 대로 먹어서 타지로 간 터라 다행히 별로 개의치 않고 웃으며 넘길 수 있었는데 먼 기억 속으로 들어가면 조금 다르다. 여름방학 때마다 서울에서 대구 외삼촌 댁으로 놀러 온 한 살 터울의 고종사촌 오빠는 한 번씩 나와 내 동생의 억양을 흉내 내며 놀렸는데 그때마다 지은 죄 없이 부끄러웠던 기억이 있다.


심지어 토박이말이 일상어인 우리 동네, 우리 집에 와서 저 혼자 이상한 말을 쓰는 주제에 말이다. 그때의 그 부끄러움과 주눅은 지금 생각하면 얼토당토않은 것인데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분명히 부끄러움이 맞다. 대체 그 부끄러움은 어디서 왔을까?

이번엔 사투리의 세계

외주 편집자로 이 출판사, 저 출판사의 일을 하다 보면 어제는 중동태라든지 당사자연구라든지 하는 세계나, 일본 학자의 배움의 즐거움에 관한 세계에 빠져 있다가 오늘은 릴케의 세계에 빠져 있기도 한다.

지난가을에 받아 들게 된 원고는 문학작품이나 매체에서 경상도 사투리로 쓰인 인용문과 그와 관련된 단상을 쓴 원고였는데, 좋아하는 선배와 후배가 함께 쓴 글로 그야말로 '글 잘 쓰는 아는 선후배'의 원고를 우연찮게 작업한 특별한 경우였다.

권영란, 조경국 작가 <경상의 말들> 출간 후 서점 미팅을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권영란, 조경국 작가<경상의 말들> 출간 후 서점 미팅을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이병진

<경상의 말들>(유유, 2024)은 "다양한 정서를 품은 유서 깊은 말, 오래 기억하고 함께 쓰고 싶은 사투리 표현을 모아 우리 언어문화의 다양성을 살핀다"는 출판사의 기획에서 출발한 '사투리의 말들' 중 한 권으로 나왔다.


마을과 문화, 사람을 톺아보며 지역의 이야기를 여러 매체를 통해 써 온 권영란 작가와 지역 헌책방을 운영하며 책과 글을 통해 독자를 만나 온 조경국 작가, 두 사람이 함께 '새빠지게' 경상도의 말을 썼다.

서울, 충청, 전라의 말들과 함께 경상의 말들도 나온 것인데, 문학작품이나 영화, 여러 매체 등에 쓰인 그 지역의 사투리 100개를 그러모으고 거기에 단상을 덧붙인 책이다. 노상 쓰는 말인데도 문자로 옮겨놓으니 잊은 지도 모르고 잊고 있던 말들도 보이고, 같은 경상도라고 생각했지만 낯선 말도 보이고, 무엇보다 여기엔 이런 정서가 흐르네, 저곳엔 저런 문화를 품고 있네, 하는 뜻밖의 생각을 수시로 하며 일했다. 다양하게 말맛을 즐긴 건 덤이다.


다른 '사투리 시리즈'와 달리 <경상의 말들>은 두 명의 저자가 작업해서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경남 창원이 연고지인 프로야구 구단 엔씨 다이노스를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두 사람 모두 거론한다든가 하는 지역의 문화를 들여다보는 재미도 있었고, 혹은 같은 말을 두고도 약간은 다른 정서로 인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는 '아는' 작가님들이라는 이점을 백분 이용해 바로 카톡이나 전화로 묻는 즐거움도 있었다. 어느 때는 나 또한 경상도 편집자라는 이점을 살려 "이건 이런 뜻이라기보다는 저런 경우에 쓰이는 것 아닌지?"라고 물어볼 수도 있었다.

토박이말에서 만나는 이웃, 우리 모두의 이야기

개인적으로는 처음 듣는 토박이말도 여럿 만났는데 개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말이 '줌치'였다. 문학작품이나 여러 매체 등에 쓰인 인용문이 아니라 권영란 작가가 실생활에서 직접 들은 말인데 그 말 사연이 퍽 아파서 기억에 남았다.

"돈이 요물인기라. 줌치를 열래야 열 줌치가 없대이"

줌치는 '호주머니'를 이르는 경남 지역의 사투리다.

어쩌다 병원에 입원하게 된 저자는 거동이 불편한 '할매(할머니)' 다섯 분과 몇 주를 함께 지내게 됐다. 입원실에서 제일 기세등등한 사람은 누구일까. 자식들이 자주 찾아오고, 먹을거리 인심 좋은 사람이 그 병실에서 제일 기세등등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중 한 할매는 유독 다른 할매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겉도셨다. 인용한 말은 몇 번 말을 걸고 주전부리를 드리며 꾸준히 다가갔더니 그나마 속을 살짝 내보이신 할매가 하신 말씀이다. 과일 한 조각, 음료수 한 병, 얻어먹고 마시면 나도 줌치를 열어 베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돈은 요물이 맞다. 돈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누군가에게 마냥 퍼주고 싶은 것이 되기도 한다. 남에게 한 푼이라도 뺏길세라 주머니를 여미기도 하지만, 인심을 나누고 속 깊은 정을 나누려 아낌없이 호주머니를 열고 싶을 때도 있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그럴 때 '열래야 열 줌치'가 없는 아득한 마음이라니.

필요할 때 없는 마음도 절박하고, 나누고 싶을 때 당최 나눌 수 없는 마음도 퍽 애잔하다 싶어 가슴 한쪽이 따끔따끔했다. 한편으로는 나의 노년도 그럴까, 저절로 걱정도 되었고 말이다.

<경상의 말들> '사투리의 말들' 시리즈의 하나로 경상도의 말들을 소개한다.
<경상의 말들>'사투리의 말들' 시리즈의 하나로 경상도의 말들을 소개한다.김은경

사라져가는 말과 함께 잊혀가는 언어문화의 정서

<경상의 말들>에는 두 작가가 어지간히 애써 구한 각각 50개, 모두 100개의 토박이말 인용문도 있지만 그 지역의 문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정서, 기억 너머의 말과 옛 추억의 나날이 함께 들어있다. 물큰, 내 기억 너머의 말과 추억도 함께 되살아나니 그런 시간을 음미하는 맛도 있다.

"할매예, 희한타예. 할매캉 내캉 이바구하고 있으모는 내가 오데 살고 있는지 알겠대예. 내가 갱상도 사람인 기 딱 표띠가 나더라고예. 와, 글 속에는 할매 말을 고치삐까. 할매예, 할매 없으모는 인자 할매 말도 없어질건디 우짜꼬예."

이 책의 들어가는 말에서 권영란 작가가 만난 할매들에게 꼭 하고픈 말이라고 적은 것이다. 우리의 토박이말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다. 이야기하고 있자면 내가 어디 살고 있는지 알겠는, 그런 말. 딱 표가 나는 그런 말. 그런 말이 점점 사라지는 것이 현실의 일인지라 저자의 말이 유독 와닿는다.

두 작가에게 이 글을 쓰며 새삼스레 갖게 된 지역말에 관한 생각을 물었다. 권영란 작가는 "평소에도 글을 쓰며 자주 뵙지만, 이 책을 쓰며 특히 더 동네 '할매'들을 자주 뵙곤 했습니다. 그런데 할매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제가 뱃속부터 들었던 말이라 그런지 '아, 우리 동네 말을 써야 내가 훨씬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유독 많이 했어요"라는 말로 할매들의 입말을 통해 지역 토박이말을 글말로 옮기며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금 되짚었다는 소회를 전했다.

조경국 작가는 "새삼스레 힘들었지요. 늘상 듣고 쓰는 말인데, 늘상 읽는 책 속에서 찾아내는 것이 이토록 힘들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사투리'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의 어려움을 전했다.

이 세계의 모든 말은 사투리

친척 오빠의 서울말 앞에서 괜스레 주눅 들며 부끄러웠던 내 어린 마음은 추억의 한 장면이지만, 우리 토박이말이 점점 사라지고 희미해지는 것은 현재진행형의 일이다. 그나마 이번 사투리의 말들 문장 시리즈를 통해 서울, 충청, 전라, 경상의 말들이 기록되고 기억되며 언어 문화의 다양성을 살피는 계기가 되는 것 같아 뜻깊다.

"이 세계의 모든 말은 사투리"라는 출판사의 말처럼 모든 지역, 모든 땅에는 그 역사와 문화를 품고 있는 토박이말이 있다. 그 말과 그 말이 품은 다양한 정서를 글말로 남기는 일에 응원이 따르길 바란다. 또한 서울, 충청, 전라, 경상의 말들과 더불어 제주, 강원의 말까지 연이어지길 바라본다.

경상의 말들 - 만다꼬 그래 쌔빠지게 해쌌노

권영란, 조경국 (지은이),
유유, 2024


#경상의말들 #사투리 #유유출판사 #전라의말들 #충청의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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