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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 '광복 제1성' 연설문

[광복80주년명문80선 2] "조선민족 해방의 날은 왔다"

등록 2025.01.10 15:28수정 2025.01.10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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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 YMCA 건물에 있었던 조선건국동맹 본부에서 인사말을 하는 몽양 여운형(1945. 8.)
종로 YMCA 건물에 있었던 조선건국동맹 본부에서 인사말을 하는 몽양 여운형(1945. 8.)눈빛출판사

8.15해방의 소식에 가장 기쁜 사람들은 독립운동가들과 옥중에 있던 양심수들이었다. 당시 전국의 감옥(형무소)에는 2만여 명의 양심수가 갇혀 있었다. 당시 조선 지도층은 두 갈래의 삶이 있었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유혹을 뿌리치면서 민족적 양심을 지켜온 소수와 일제에 협력한 다수의 친일군상들이었다.

8·15 당시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중경에서는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면서 일제와 싸우고 있었고, 서대문형무소 등 전국의 감옥에는 한국인 2만여 명이 견디기 어려운 옥고를 치르고 있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주미대표부 대표로 미국에 머물고 있었고, 박헌영은 6년 복역 후 출감하여 광주백운동 벽돌공장 인부로 위장하고 있었다. 김두봉은 중국 연안에서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장으로, 김일성은 중국 동북위에 설치된 조선공작단위위원회 정치군사담당 책임을, 이희승·정태진·이극로 등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감옥에 있었다.

김창숙은 왜관경찰서에 갇혀 있었고 조만식은 평양에 첩거하면서 독립의 꿈을 접지 않았다. 홍명희는 충북 괴산에 은신하고, 김병로는 경기도 가평으로 내려가고, 김준연은 금곡의 전야에, 이영은 북촌의 한촌에, 정백은 광산업을 핑계로 심산유곡을 헤매고, 김약수는 집을 전전하고, 백남운은 하숙집을 전전하고, 원세훈은 서울과 농촌을 오가면서, 함석헌은 시골에서 똥통을 짊어지고 농사를 짓는 등 일제의 위협과 유혹을 피해 민족의 대의와 지조를 지켰다.
 해방 직후 휘문학교 교정에서 열변을 토하는 여운형 선생
해방 직후 휘문학교 교정에서 열변을 토하는 여운형 선생 몽양기념관

그러면 친일파들은 어떻게 8·15를 맞았는가.

최남선은 중추원 참의를 지내면서 경기도 사능리에서 전원생활을 즐기고 있었고, 이광수는 서재에 일장기를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목례를 하며 남대문을 지날 때는 두 손을 합장하며 남산에 있는 신궁을 향해 묵도를 하였다.

정비석·유진오·조용만·모윤숙·김용제·최정희·장덕조·노천명·오영진·김소윤·김팔봉·곽종원·양명문·김동인·주요한·박종화·백철·유치진 등 문인들은 줄줄이 친일매족의 글을 쓰고 연설을 하느라 무더위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배정자·이각종·장덕수·서춘·이종협·전봉덕·김석원·박홍식·김성수·방응모·진학문·장덕수·신태악·김활란·고황경·황신덕·이능화·최린·이종욱·권상로·홍난파·김은호·김기창·정춘수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일제의 승전을 위해 글을 쓰고 연설하느라 역시 진땀을 빼고 다녔다.

일본에 충성을 맹세한 백선엽·박정희 등 친일군인들은 중국전선에서 항일군에 총질을 하거나 후방 지원을 하면서 승전하면 승진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이들 친일군인들이 해방조국의 주역이 되고, 친일문인·언론인·학자들은 한국 사회의 주류세력이 되었다.


해방을 맞은 여운형은 당초 각계 각층 인사들을 망라한 거족적인 단체를 만들려고 구상하였다. 그래서 좌우를 가리지 않고 역량 있는 지도급 인사들과 연대를 하고자 노력하였다.

여운형은 8월 15일 안재홍을 만나 뜻을 함께 하기로 한데 이어 오후에는 건국동맹의 간부들과 회합하여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을 발족하였다. 안재홍은 일제강점기 총독부의 갖은 회유와 협박에도 민족적 양심을 지켜온 터였다. 이날 저녁, 1944년에 조직된 건국동맹을 모체로 하여 건준이 출범하였다.

건준의 명칭은 안재홍이 제안한 것을 받아들이고,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안재홍, 총무부장 최근우, 재무부장 이규갑, 조직부장 정백, 선전부장 조동호, 경무부장 권태석이었다.

"우리의 당면과제는 완전독립과 진정한 민주주의 확립을 위하여 노력하는 데 있다.(…) 건준은 완전한 새 정권의 수립을 위해 산파적 역할을 담당하는 과도적 조직체이다."

여운형은 이 자리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건준의 강령도 발표했다.

1.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한다.
2. 우리는 전민족의 정치적·사회적 기본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정권의 수립을 기한다.
3.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 한다.

건준은 해방 직후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직된 최초의 민간 정치조직이었다. 무질서와 혼란, 살상과 약탈이 예상되는 무정부상태에서 건준은 치안과 자치를 맡았다.

건준이 활동하면서 해방공간의 무질서는 어느 정도 예방되었다. 총독부가 비록 공식적으로 그에게 위임했던 '치안유지' 등의 권한을 곧바로 회수했지만, 여운형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여운형은 8월 15일 건국동맹원들을 정식으로 소집했다.
여운형이 14일 총독부 엔도와 만나 나눈 내용은 다음 날(16일) 오후 1시 계동 휘문중학 운동장에서 열린 5천여 군중 앞에서 '광복의 제1성'으로 발표되었다. 여운형의 연설문이다.

여운형 연설문

조선민족 해방의 날은 왔다. 어제 15일 아침 엔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초청을 받아 "지나간 날 조선 일본 두 민족이 합한 것이 조선민중에 합당하였는가, 오해로서 피를 흘린다든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민중을 잘 지도하여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이에 대하여 다섯 가지 요구를 제출하였는데 즉석에서 무조건 응락을 하였다. 즉

1. 전 조선 각지에 구속되어 있는 정치경제범을 즉시 석방하라.
2. 집단생활인 만치 식량이 제일 중요한 문제이니 8. 9. 10 3개월 간의 식량을 확보 명도하여 달라.
3. 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있어서 아무 구속과 간섭을 하지 말라.
4. 조선 안에 있어서 민족해방의 모든 추진력이 되는 학생훈련과 청년조직에 대해 간섭 말라.
5. 전조선 각 사업장에 있는 노동자를 우리들의 건설사업에 협력시키며 아무 괴로움을 주지 말라.

이것으로 우리 민족해방의 첫걸음을 내디디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 날에 아프고 쓰라렸던 것은 이 자리에서 모두 잊어버리자. 그리하여 이 땅을 참으로 합리적인 이상적 낙원으로 건설하여야 한다.

이때 개인의 영웅주의는 단연코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 일사분란의 단결로 나아가자. 머지않아 각국 군대가 입성하게 될 것이며 그들이 들어오면 우리 민족의 모양을 그대로 보게 될 터이니 우리들의 태도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하여야 한다. 세계 각국은 우리들을 주목할 것이다.

그리고 백기를 든 일본의 심흉을 잘 살피자. 물론 우리들의 아량을 보이자. 세계 신문화 건설에 백두산 아래에 자라난 우리 민족의 힘을 바치자. 이미 전문대학 학생의 경비원은 배치되었다. 이게 곧 여러 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오게 될 것이니 그들이 올 때까지 우리는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주석 1)

주석
1> <매일신문>, 1945년 8월 17일.
덧붙이는 글 [광복80주년명문80선]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광복80주년명문80선 #광복80주년 #명문8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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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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